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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2). 교회의 우선순위와 경건한 어른들

사도행전 6:1-7, 요한계시록 6:9, 요한계시록 2:6, 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1-13

말씀내용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두번째 외부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공회가 사도들에게 준 물리적 가해는 도리어 그들의 기쁨의 근거가 되었고, 교회를 결코 침묵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탄 또한 쉬지 않았다는 것을 본문은 보여줍니다. 다시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사탄은 교회 내부의 분열을 획책하지만, 성령께서는 이 두번째 내부 공격에서도 교회를 보호하시고 도리어 건강하게 세워 가신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교회의 우선순위와 함께, 우리는 또한 소위 초대교회 일곱 집사라고 불리는 일곱 사람의 존재를 주목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들’이었고(3), 또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5). 이들의 존재는 장차 교회가 체계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집사’의 직분의 기원이 될 것입니다.


1. 성장통 (행 6:1,7; 신 10:18; 행 2:44-45; 4:32-37; 2:46; 4:24, 32)
사도행전은 1장부터 5장까지 사도들 가운데 특별히 베드로를 중심인물로 등장시켰습니다. 그러나 6-8장에서는 베드로가 두드러지게 언급되는 대신,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이 소개되면서 사도행전 후반부의 중심 인물이 될 사울(후일의 바울)의 등장을 예고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모든 중심인물들의 변화에 아랑곳 없이 교회는 주의 은혜로 성장해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본문 1절은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라고 시작합니다. ‘그 때’는 사도들의 체포와 풀려남,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공회의 금령이 내린 상황을 지시합니다. 이런 외부적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제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이었고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믿음으로 고백한 길따름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과 끝인 1절과 7절은 모두 교회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사도행전 6:7).”
이런 성장 속에서 교회는 하나됨을 위협할 만한 내부적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회중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공동체에 어려움이 발생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가이 워터스(Guy P. Waters)는 이 일을 ‘성장통(Growing pains)’이라고 부릅니다. 교회의 성장은 문제를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고 좋았던 교회의 그 장점이 문제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의 원망은 자기의(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서 불이익 혹은 차별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살피기에 앞서, 당시 예루살렘 사회와 교회의 구성을 조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는 각각 주전 8세기 후반과 6세기 초반에 제국들의 정복을 당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이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었고, 유대인은 전세계에 퍼진 유랑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회가 비록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있기는 하였으나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가지게 되는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유대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특히 절기에는 성전으로 순례를 오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붐볐습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어도 상당수 헬라어가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헬라파 유대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본토 유대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히브리파 유대인이라고 불립니다. 이들은 주전 7세기부터 중동지역에서 외교와 무역의 언어로 사용되었던 아람어를 주로 사용했습니다. 물론 이들은 모두 혈통적으로 유대인이었기에, 문제는 인종의 차이가 아니라 언어의 차이였고 이에 따르는 문화적 차이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루살렘 사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도 당연히 이 두 부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당시 유대교 회당에서 이중언어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이중언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어떤 차별 혹은 차별로 느껴지는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는 말년을 예루살렘에서 보내기 위해 돌아온 상당수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 살아왔었으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친척이 없었을 것이고, 생계를 유지할 만큼 일하기도 어려웠기에 생활은 쉽지 않았고 실제적 궁핍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율법에 의하여(신 10:18; 14:29; 16:11,14; 24:17,19-21; 26:12-13; 27:19) 유대 권력기관의 구제가 시행되고 있었다고 전제하더라도, 그리스도인 헬라파 과부들은 그들의 도움을 받지 않기로 선택했거나 예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성령 충만한 교회는 물건을 공유했고 심지어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났기에 그들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행 2:44-45; 4:32-37). 그렇게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게 된 것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원망했다’는 말은 주로 뒤에서 낮고 불분명한 어조로 수근거리는 것을 말합니다.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매일의 구제’라고 했는데, 이것은 재정을 공급해주는 일이었다기 보다 매일의 음식을 나눠준 일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구제’라고 한 헬라어 단어는 ‘디아코니아’인데, 일반적으로는 섬김, 봉사를 의미하고, 특정해서는 집사의 직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헬라파 과부들이 매일의 섬김에서 차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거나 그렇다고 느끼게 된 것입니다. ‘빠지므로’라는 말은 미완료과거시제인데, 일정 기간 이 문제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가지고 원망한 대상이 ‘히브리파 유대인’이었다는 점을 볼 때, 아무래도 사도들을 도와서 초기 예루살렘 교회의 살림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던(행 2:46; 4:24, 32) 교회에 분열의 조짐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가는 가장 이상적으로 보이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불만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기록합니다. 이것은 가이 워터스의 말대로, 성장통이었습니다.


2. 교회 사역의 우선순위 (행 6:2-4; 1:8; 마 28:18-20; 계 6:9)
상황을 파악한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한 말은 두 가지입니다. 원리와 문제 해결 방안 제시입니다. 먼저 원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2-4).” 사도들의 이 결정은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를 위한 탁월한 결정이었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준 원리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에 말씀 사역과 구제 사역을 모두 자신들의 책임 하에 감당해 왔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장하면서 그 두 사역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두 사역은 모두 사도들이 직접 감당했을 만큼 중요한 사역이었습니다. 본문은 1절에 ‘구제’라는 말에서 사용한 ‘디아코니아’라는 단어를 동일하게 말씀 ‘사역’에서 사용함으로써(4), 두 가지 사역이 모두 교회에서 중요한 사역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사역의 본질, 그리고 교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본질에 속하는 것은 말씀 사역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얼마든지 구제 사역을 둘러싸고 일어난 두 그룹 사이의 갈등을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열두 사도가 여섯 명씩 두 그룹으로 나뉘어 말씀의 사역과 구제의 사역을 나누어 관장할 수도 있었겠지요. 이 두 사역이 모두 너무나 중요하기에 우리가 직접 관장해야만 한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도들은 구제의 사역이 기도와 가르침 보다 낮은 수준의 봉사라고 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이 사도로서 받은 소명은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강조함으로써, 교회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사도들은 구제의 사역을 전담할 일곱 사람의 일꾼을 세우라고 제안하면서, 자신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도들은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신할 수 있는 사역 때문에 자신들이 우선적으로 감당해야 할 주요한 사역이 위태로워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그 기준 위에서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도들의 이 결정은 모든 시대의 교회가 포기하지 말아야할 사역의 우선순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두 가지 사역이 모두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해서 우선적 사역이 말씀의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이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해야 하는 공익적 사역을 말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사역입니다. 또는 교회가 내외적으로 구제 사역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교회는 경우에 따라서 사회 윤리와 정치 정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다 문제 없이 잘 수행한다고 해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자선활동이나 공익활동을 하는 단체가 아니며, 윤리운동을 하는 기관이나 정치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복음 전파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땅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행 1:8). 그들은 땅의 모든 족속에게 가서 주님이 분부하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는 제자로 삼아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마 28:18-20).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정도로, 이 일에 생명을 거는 존재입니다(계 6:9).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보는 교회는 물론 착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가지는 하나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단순히 착한 행위만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에게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복음 안에 열려 있음을, 그리고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선언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자선 사업이나 공익 사업, 혹은 윤리 운동이나 정치 운동을 할 수 있는 기관은 많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관은 오직 교회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전가시키기 위해, 그 형벌을 대신 감당케 하기 위해.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자유와 죄사함과 새 생명을 주기 위해, 심판을 통과하게 하기 위해. 마침내 영원한 영광 안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음을 믿으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는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이 사실을 믿고 순종하면, 모든 죄가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아는 지식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할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관이나 단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교회이고 교회의 본질입니다. 사도들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조금의 관심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름 받은 그 일을 현재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서 내려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결정한 일은 모든 시대의 교회를 위한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일로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3. 구제 사역의 중요성 (행 6:3,5,8; 21:8; 8:4-39)
사도들은 교회의 사역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했고 자신들이 포기할 수 없는 그 일, 가르치는 일을 제쳐 놓을 수 없기에, 지금 문제가 된 그 일, 구제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일곱 사람을 세우라고 제안했습니다. ‘일곱’ 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특별 임무를 위해 7인 위원회를 구성하던 유대적 관행을 따른 것이라고 하워드 마샬은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말했습니다(3).
여기서 ‘형제들’이 누구를 가리킬까요? 물론 사도들은 ‘모든 제자를 불렀’다고 했습니다(2). 그러나 에크하르트 슈나벨은 이 형제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특정하여 말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들은 ‘너희 가운데서…택하라’고 했는데, 선택된 일곱 사람의 이름을 보면 모두 헬라파 유대인들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체 교인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헬라파 유대인들 일곱 사람을 선출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교회는 비록 일부 지속되던 구제의 편향성 때문에 불만이 제기되기는 하였지만, 그 누구도 자기 편을 주장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구제라는 중요한 일을 감당할 사람들을 직접 제시하는 대신, 그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제시하였고 선출을 회중에게 맡겼습니다.
사도들은 이 일이 구제의 일이고 좀 더 나아가 경영의 일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경영의 경험을 가진 사람이거나, 그 방면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을 택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제시한 조건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믿을 때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행 2:38) 그 결과 삶의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으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증거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 지혜를 사용하여 바른 판단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른 판단력(지혜)은 공적 사역자의 중요한 자질입니다. 이것 만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감당할 사람들은 ‘칭찬받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회중에 의하여 검증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이 없다면, 공정하게 행함으로써 불만을 잠재워야 하는 일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성령과 지혜의 충만은 회중의 검증을 필요로 합니다.
사도들이 제시한 조건들로 미루어 볼 때, 교회에서 행해지는 구제의 사역은 영적인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을 감당하는 일꾼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전문성을 가진 좋은 자원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이런 전문성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전혀 다른 차원, 영적 차원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온 무리가 사도들의 제안을 기쁘게 여겼을 뿐 아니라,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였습니다(5).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사도들이 제시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이 아니라 삶 가운데 열매가 분명했던 사람들입니다. 8절에 보면,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많이 행하는” 사람이었고, 이어지는 그의 말씀 사역은 성령이 함께 하심과 지혜로움을 보여줍니다. 탁월한 전도자였던 빌립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행 21:8). 그로 인하여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뿐 아니라(행 8:4-24),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이도 빌립이었습니다(행 8:26-39). 말하자면, 구제의 사역을 전담하기 위해 회중에 의해 선택된 일곱 일꾼은 비록 사도들은 아니었지만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4. 회중의 책임 (행 6:3,5,6; 엡 4:3; 계 2:6,15; 행 20:30)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통은 사도들의 지혜로운 제안과 회중의 바른 순종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마크 데버는 『매력적인 공동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p.236f).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일치를 보호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회중의 책임이다.” 여기에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중의 책임과 관련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사도들이 지혜롭게 대처를 잘 했다고 여기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회중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사실상 사도들이 한 일은 회중에게 말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은 무시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요한 문제이지만 우리가 말씀 사역을 포기하는 것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이렇게 썼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에베소서 4:3).”
예루살렘 교회는 분열의 위기를 직면했었습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불만이 있는 지도자들을 만나 설득하거나 온 회중에게 하나가 되라고 설교를 한 것 같지 않습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은 사도들에게 맡겨진 책임이라기 보다, 교회인 회중 전체에게 맡겨진 책임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에게 쓴 말씀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온 무리는 사도들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제안을 따라 그들이 일곱 사람을 택하였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어떤 방식을 사용하여 일곱 사람을 선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곱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서 다시 사분오열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일곱 사람의 이름은 모두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헬라식 이름에는 팔레스타인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드문 이름도 있습니다. 아마 그들 모두가 헬라파 디아스포라 유대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특별히 마지막 인물 니골라는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이라고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유일하게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닌 사람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람은 초대교회의 이단인 니골라당을 창시한 인물일 것입니다(계 2:6,15).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인정하여 그를 택하여 세웠지만, 슬프게도 그는 참된 성령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이런 일들을 제시하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고 여깁니다. 심지어 주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열두 제자 중에도 예수님을 배신하여 팔아넘긴 제자가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이 속으셔서 그렇게 하셨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성경을 응하게 하시는 주님의 방도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가 선택한 일곱 일꾼 중에서도 이런 사람이 일어났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에베소 교회의 장로 중에서도 교회를 무너뜨릴 자가 일어날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예언합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사도행전 20:30).”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 가시고 당신의 거룩하신 뜻을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교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지키십니다(행 20:28). 그러나 하나됨을 지키는 회중의 책임은 감소되지 않습니다.
온 무리가 선택한 일곱 사람을 사도들 앞에 세우자, 사도들은 기도하고 안수함으로 그들을 사도들을 보조하여 예루살렘 교회의 구제 사역을 감당하는 일꾼들로 세우게 됩니다(6). 비록 이들이 후에 교회의 직분 개념에 의한 집사는 아니었지만, 이것을 시초로 집사제도에 대한 전반적 개념이 생기게 되고, 후일 교회의 집사 직분이 서게 됩니다. 교회의 재정과 사업을 살피게 하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책임지고 돌보게 하는 직분으로서 집사의 제도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5. 막을 수 없는 성장 (행 6:7; 눅 1:5-6; 행 9:31; 12:24; 16:5; 18:20; 28:31)
분열의 문제가 해결되자 교회가 다시 성장하게 됩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교회의 생명력 있는 약동을 보여주려고 누가는 미완료시제를 세 번 사용합니다. ‘왕성하여’라는 단어는 본래 ‘자라다, 성장하다’라는 의미인데,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입니다. 그 말씀이 스스로 열매를 맺고 자라나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많아지고’인데,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되었는데,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를 강조하려는 의도인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세번째로 ‘복종하니라’인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믿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평범한 제사장들은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제사장들과는 달리, 세례 요한의 부친인 사가랴와 같이 거룩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F.F.브루스는 말합니다(눅 1:5-6). 이런 제사장들 가운데 허다한 무리가 복음에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복음의 승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6:7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여섯 번의 요약 중 첫번째라고 할 수 있습니다(6:7; 9:31; 12:24; 16:5; 18:20; 28:31).


6. 교훈과 적용
예루살렘 교회가 성장하면서, 교회의 살림에는 체계와 질서가 요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는 교회가 그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터졌는데 그것은 하나의 성장통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헬라파 과부들이 공정하게 구제를 받지 못하는 일로 뒤에서 수근거리는 일이 최초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에서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많이 수근거리던 사람들이었는지를 기억하면서 아연실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지혜롭게 이 일을 처리했고, 회중은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하여 바르게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보이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탄은 내부의 분열을 획책하여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사탄은 헬라파 과부들이 의도치 않게 구제의 사역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을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시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교회의 일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영적 차원과 물리적 차원이고, 보이지 않는 영역과 보이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신중함은 결국 발생한 위기를 교회가 체계와 질서를 갖추는 계기로 삼게 합니다. 이것이 언제나 성도들이 바라고 취해야 하는 길입니다. 교회는 이 일로 인해, 본질상 사역의 우선순위를 확정하게 되었고, 또 다른 중요한 일을 맡을 집사 직분의 시초를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 위기의 시간에,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고 했고, 회중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이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목사의 부재도 문제이거니와, 교회 안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어른의 부재 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경건한 어른이십니까? 우리 그 길로 갑시다. 경건한 어른들이 있었던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게 힘을 얻었고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복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구합시다. 그 길로 신실하게 걸어가십시다. 우리는 본문에서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돌보셨고 보호하셨으며 이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도 그리 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께 모든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올려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