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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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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10). 성령과 사탄

사도행전 4:31-5:11, 여호수아 7:1, 요한복음 12:4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0-30

말씀내용
오늘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 이야기’이지만, 이면적 의미를 보면, ‘성령과 사탄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초자연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언제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언제나 영적이고 이면적이며 초자연적 의미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1. 밖으로부터의 공격의 결과 (4:31-35; 요 17:21; 행 12:12)
예루살렘 교회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의 치유 사건으로 다시 한 번 큰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4:32에서 ‘믿는 무리’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미 큰 군중이 되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줍니다(참고로, 4:31,33의 ‘무리’는 헬라어로 다른 단어). 하지만 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공회의 협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밖으로부터의 공격이었습니다. 이 공격은 실패했습니다. 사도들과 교회는 협박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4:33은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라고 말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큰 무리는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었고(4:32) 하나의 정체성, 복음의 증인으로서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한복음 17:21).”
다시 한 번, 누가는 오순절 날 성령 강림의 결과로 교회가 성령 안에서 초자연적이며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이상적 사회의 실험적 모델이 아니라 성령 충만의 결과였습니다(4:31). 성령의 충만은 성령님께서 지배하시는 상태를 가져옵니다. 그들의 마음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자 나타난 근본적인 변화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돈, 소유,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십니다. 내 건강, 내 시간, 내 소유, 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그렇게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의 분명한 결과입니다. 그들 중에 밭과 집이 있는 자들은 소유를 팔아 그 값을 가져다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기에,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4:34).
성령 충만한 성도들은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전하는 복음을 들으며 큰 은혜를 받음으로써, 자기 소유를 팔아 교회에 드려 가난한 형제들의 필요를 공급했던 일은 한 동안 지속된 것 같습니다. 복음으로 인한 ‘큰 은혜’가 성도들로 하여금 그 일을 계속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는 표현은(4:35,37; 5:2) 이것은 사도들의 처분에 맡겼다는 의미입니다. 처음에 사도들은 말씀 사역과 자금 관리의 임무를 모두 감당했지만, 점점 사도들의 짐이 무거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이후 6장에서 보게 됩니다. 이제 누가는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난 대조적인 두 케이스를 소개합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악하고 추한 이야기입니다.


2. 아름다운 이야기: 바나바 (4:36-37; 민 18:20; 렘 32:7-9)
누가는 초대교회의 선교에서 대단한 역할을 감당하게 될 인물을 소개합니다. 바나바입니다. 그는 구브로(사이프러스) 출신의 레위인으로,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레위인은 일반적으로 유복했고 교육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래 이름은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요셉인데 그래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도들은 그의 성품적 특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지어 바나바라고 불렀습니다. 위로의 아들을 뜻하는 바나바는 설교자 혹은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였듯이, 자기가 가진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가 처분한 밭이 구브로에 있었는지, 유대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레위인에게는 기업으로 땅이 주어지지 않았으나(민 18:20; 신 10:9) 당시 이 율법 규정은 거의 사문화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제사장 출신이었으나 자기 소유의 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렘 32:7-9).
바나바의 이야기는 성령충만한 성도들의 공동체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헌신의 한 사례로 소개가 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나바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악하고 추한 사례입니다.


3. 악하고 추한 이야기: 아나니아와 삽비라 (5:1-10; 딛 2:10; 수 7:1)
그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는 성령 충만한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도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사탄이 밖으로부터의 공격에 실패하자, 이제 안에서부터 교회를 허물려고 공격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꽤 알려진 비중 있는 인물들이었을 것이고, 리더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바나바 같은 인물들이 사도들의 인정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것을 봤을 것이고, 어느 정도의 압박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1절은 앞의 내용과 논리적 대조를 보여주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5장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누가는 본래 장절의 구분 없이 사도행전을 썼습니다. 그는 밖으로부터의 사탄의 공격을 공회의 위협으로 설명했고, 그런 공격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성령의 충만을 입고 대주재의 백성 답게 일어섰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가운데 바나바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굴하지 않고 안으로부터 교회를 공격합니다. 그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러나’라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바나바와는 달리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도 있었고, 이들은 사탄이 자기들의 마음을 채우도록 허용함으로써 비참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을 입은(4:31) 결과와는 정반대의 참혹한 결과입니다. 이 전체 맥락을 놓치지 마십시오.
히브리 이름인 아나니아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이고, 삽비라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아람어 이름입니다. 두 사람은 경건미를 드러내는 그들의 이름처럼 살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은 공모했습니다. 1절에서는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라고 말했고, 2절은 ‘그 아내도 알더라’고 했는데, 이는 이 악한 일에서 삽비라가 상당 부분 역할을 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들은 가진 땅을 팔았고 아나니아는 판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바나바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아나니아가 “이것이 저희의 땅을 판 값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5:3-4).”
베드로의 말에서 우리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 재산을 팔아 전액을 헌금하는 것이 규율이나 강제 규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 일은 전적으로 자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 교회의 신실한 성도였던,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가 여전히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행 12:12). 땅을 팔고 전액을 바치든 부분을 바치든 그것은 전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달린 문제였고, 그들 부부의 자유였습니다. 그들이 일부만을 드렸더라도 그 자체로도 이미 훌륭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나니아는 왜 이런 거짓을 저질렀습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더 큰 명성을 얻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돈을 낸 동기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아를 살찌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얼마든지 자아를 살찌우는 방식으로 행해지는 선행과 헌금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런 거짓을 행한 이면적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이 자기들의 마음을 채우도록 그들이 허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사탄 충만’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베드로는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라고 질책합니다. 여기서 ‘가득하여’라는 단어는 성령이 충만하다고 할 때의 그 단어와 같은 어근을 가집니다. 이것은 사탄에 대한 책망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왜 사탄이 네 마음을 채우도록 허락했느냐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아나니아의 마음을 채웠습니다. 마음은 한 사람의 의지를 움직이는 추진력의 역할을 하는데, 사탄이 그 마음을 채운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동기는 성령님도(3) 하나님도(4) 아닌 사탄이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탄이 자기 마음을 채우도록 허락한 것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가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들어와서 자리를 잡지 않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아나니아의 마음을 채웠습니까? 그 부부는 사도들과 예루살렘 공동체에서 자기들도 이타적으로 희생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바나바가 받는 칭송을 시기했습니다. 거짓말과 돈을 감춘 행위는 사탄이 그들의 마음을 채운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그 거짓말이 단지 사도와 교회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고 했는데, ‘감추다’라는 단어는 신약에서는 디도서 2:10에서 ‘훔치다’는 의미로 한 번 나오고,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에서는 아간이 여리고성에서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다’고 할 때 한 번 나옵니다(수 7:1).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들은 구약의 아간 사건과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연관성을 말합니다. 아니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여리고성을 점령하고 가나안에 입성한 구약교회의 초기에 일어나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막을 뻔했던 아간의 사건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아간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 두 사람을 심판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세 시간 쯤 지나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는 삽비라가 솔로몬 행각에 모인 큰 무리와 베드로 앞에 나타났습니다. 삽비라는 남편이 사도들에게 헌금을 전달했을 것이므로 무리의 감사와 칭찬 속에 환영을 받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녀를 본 베드로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8).” 베드로는 그녀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었지만 슬프게도 그녀는 남편처럼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고 말하고 그녀가 죽임을 당할 것을 선언하자, 그녀 역시 남편과 같이 즉사를 하고 맙니다.


4. 큰 두려움 (5:5,11)
이 사건은 예루살렘 교회를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의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5절과 11절은 그 일로 ‘큰 두려움(φόβος μέγας)’이 발생했다고 말합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쓴 것은 그 결과를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먼저 큰 두려움이 임한 대상은 교회였습니다(11). 5:11에서 누가는 처음으로 투표권을 가진 자유 시민의 민회를 가리키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교회를 표현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라도 벌어질 수 있는 일로 여겨졌기에 그 사실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이 심판의 사건으로 죄를 혐오하시며 죄인을 심판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존을 직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두려움이 임한 것은 교회에게만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을 듣는 사람들’ 모두에게 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11). 이들은 주로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심판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 심판의 표적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을 말하지 않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을 듣는 여러분도 교회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큰 두려움’을 가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교훈과 적용 (창 3, 6; 출 32; 삼하 11; 고전 3:16-17; 11:30; 눅 19:8; 요 12:43; 갈 5:19-23)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교회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역사는 안팎으로 쉼 없이 전개됩니다. 에덴에서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세계를 누리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범죄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것은 에덴에서의 추방이라는 쓰디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창 3). 인류가 에덴에서 흩어진 뒤 사람들은 각자 자기 눈에 좋은 대로 행함으로써 범죄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노아의 홍수 심판으로 귀결됩니다(창 6). 출애굽의 장엄한 구원 역사가 일어난 후,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 사건이 일어났고(출 32), 다윗이 왕국을 이룬 뒤에 간음과 살인 교사 사건이 일어났습니다(삼하 11). 이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처럼, 사탄이 사람의 마음을 채우는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안팎으로 사탄의 공격 가운데 놓여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성도들은 늘 신중해야 하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경우에도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교회를 허무는 결과를 초래하고 교회에 임재하시는 성령님을 대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령님께서 교회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은혜와 심판을 동시에 가져옵니다. 교회가 성령의 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고전 3:16-17) 교회에는 무조건적 용서와 용납만이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성령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고린도교회에서 교회의 질서를 무너뜨림으로써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다’고 한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1:30).
셋째, 성령 충만의 증거는 소유와 물질에 대한 관대한 태도입니다. 삭개오를 보십시오. 그가 주님을 만난 뒤에 한 말입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누가복음 19:8).” 주님을 만난 사람은 물질에 대한 태도가 바뀝니다. 더 이상 물질의 노예로 살지 않을 힘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바나바가 그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넷째, 사탄의 충만은 그럴듯한 거짓 모조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이 모조품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참된 신자였는가 물을 수 있습니다. 5:1에서 아나니아를 소개하는 ‘사람(ἀνήρ)’이라는 단어는 사도행전에서 주로 믿지 않는 사람을 새롭게 소개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3:2; 8:9,27; 10:1; 14:8; 16:9).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교회에서 꽤 알려진 비중 있는 인물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복음에 공감하는 정도의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요 12:43).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 보다 더 사랑하는 일은 심히 위험한 일입니다. 신자들도 때로는 심각한 죄에 빠지는 경우가 있지만, 참된 신자는 회개함으로 돌이키는 사람입니다.
다섯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교회의 입구에 세워놓으신 경고 표지판입니다. 이것이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일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은 “위험! 여기로 가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입니다. 1세기 예루살렘 교회 입구에 세워진 그 표지판은 지금도 모든 교회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이 표지판을 통해 경고하시는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행동하시는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교회사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성령님을 속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 경고 표지판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즉시 죽지 않았지만, 이 경고 표지판은 성령님을 속이는 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처럼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고 그때 심판이 행해질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고 표지판이 경고하는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영적인 영역,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거기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사탄이 존재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모두 최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부했다는 공로도 인정받고 우리 몫도 챙겨서 기분 좋게 누리며 사는 거야. 교회도 좋고 우리도 좋은거지. 희생한 보람은 보람대로 누리면서 사람들의 인정과 갈채도 받고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들도 챙기는 거지.” 하지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속이고 교회를 속이며 성령님을 속이는 기만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이면에는 언제나 성령의 충만 아니면 사탄의 채움이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의 결과는 바나바가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명을 감당하며 물질 보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사탄으로 채워지도록 허용한다면, 그 결과는 교회와 하나님을 속이고 영원히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 만큼이나 사탄의 실재도 있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라면, 사탄이 마음을 채우도록 허용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를 다스리도록 사탄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두 경우를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라디아서 5:19–23).”
그러므로 여러분,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어느 순간에도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도록 허용하지 마십시오. 오직 성령의 충만을 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이시고 지배하시기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