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Home > 설교말씀 > 사도행전 강해 - (9). 대주재의 백성

권별 강해설교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사도행전 강해 - (9). 대주재의 백성

사도행전 4:23-31, 시편 2:1-2, 데살로니가후서 1:3-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0-23

말씀내용
사도행전은 단지 1세기의 교회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나아가 교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위협에 직면하여 하나님께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를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그들이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았고 믿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누구에게 구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교회의 기도와 기도하는 공동체인 교회를 배우려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요점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기도하는 공동체가 됩시다’라는 구호로 그 자리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위협하는 세상 앞에 선 교회 (4,8,24)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이 한 순간에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것은 예루살렘의 공회원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로 솔로몬 행각에 모인 백성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그날 5천명의 성인 남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4:4). 이 소동은 베드로와 요한을 공회에 서게 만들었고, 성령의 충만을 입은(4:8) 사도들은 공회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결국 베드로와 요한을 굴복시킬 수 없었던 공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경고로 이들을 위협하고 놓아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려난 두 사도는 즉시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리더들이 모여 있던 어느 가정이었는지, 아니면 솔로몬 행각에서 여전히 두 사도를 염려하며 기도하고 있던 교인들의 큰 무리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두 사도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위협한 일들을 모두 알리자, 공동체는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24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24).”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기관이었고 그들에게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회의 위협 소식을 들은 교회가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습니까?
교회는 언제나 적대적 세상 속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교회의 초기 300 여년 뿐 아니라, 15-17세기 유럽에서 참된 교회에 대한 특별한 박해가 있었던 시기 그리고 20세기 볼세비키 혁명으로 시작된 공산 국가에서의 박해들만을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적대적이고 위협하는 세상 속에 존재했습니다. 때로는 그 위협은 달콤한 음녀의 혀를 통해 주어지기도 했지만, 세상은 언제나 교회를 말살하려고 해왔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참된 교회는 세상의 갖은 위협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2. 대주재—절대적 힘을 가지고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통치자 (24; 마 6:9; 히 4:16)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한 마음으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본문은 그들이 누구에게 기도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주재여’라고 불렀습니다. 대주재는 절대적 힘을 가지고 주권적으로 다스리는 통치자, 절대 주권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워드 마샬은 “대주재는 발생하고 있는 일들 모두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방영하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자신들을 위협하는 이 상황은 물론, 자신들의 전 존재가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자신들의 목숨과 재산과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신앙고백이 이 호칭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9).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호칭은 중요합니다. 주님은 육신을 입고 지상에 계실 때, 성부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를 부르는 아주 친밀하고도 신뢰 가득한 호칭입니다. 구약 성경은 다양한 하나님의 성호를 소개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그 모든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최고의, 최적의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깊이 생각해야 하며, 신중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허겁지겁 혹은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하심을 입는 고로, 생각 없이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히 4:16).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그들은 자신들이 들어가는 그 거룩한 자리가 신을 벗어야 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말씀을 드리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 기록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그들이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위협을 당하는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해야 했습니다. 현실과 사실을 파악하고 분석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하시려는지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상황에서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두 사도의 이야기를 들은 교회는 비상 대책회의를 열거나 예루살렘 정가에 밝은 전문가들을 세워 현실 분석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도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은 교회는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모든 상황을 당신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허락하시고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대주재 하나님께 나아가 여쭙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라는 말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한 번 더 강조합니다. 그들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임을 알았습니다.
대주재라는 호칭은 이미 그들이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도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분의 목적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이러하다면, 어떤 상황이 과연 그들에게 문제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스스로를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불러내신 백성, 대주재의 백성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들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3. 성경으로 해석하는 상황 (25-28; 눅 12:11-12; 21:12-16; 요 16:33; 시 2:1-2; 눅 23:12)
우리는 사도들이 옥에 갇히고 공회에 서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진작에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들을 기억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 바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이 회당이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것이며 그들이 무엇을 말할지 몰라도 성령께서 할 말을 가르치셔서 대적들이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 12:11–12; 21:12-16). 또 주님은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할 것이며, 그들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셨었습니다(요 16:33). 사도들 뿐 아니라 교회는 주님의 말씀대로 모든 상황들이 전개된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상황 이해는 그들의 기도 속에서 더 깊어지게 됩니다. 그들의 기도는 다윗이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예언한 시편 2:1-2절을 인용함으로 시작됩니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25-26).”
여기서 당시에 이들이 어떻게 기도했을지 간단히 생각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은 통성으로 기도했다기 보다 한 사람의 리더가 대표로 기도하고 모든 사람이 한 마음으로 함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그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시편 2:1-2은 그리스도를 대적한 세상의 군왕들의 모의와 헛된 시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분노하며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였지만, 그 일은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27-28절은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보여줍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서로 반목하던 헤롯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에서 한 순간에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편 2편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눅 23:12). 헤롯과 빌라도 외에도,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과 이스라엘 백성이 합세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힘을 합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주재라고 부르는 신앙은, 하나님을 거역하려고 헤롯과 빌라도와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하나님의 예정하신 것을 행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헤롯과 빌라도는 기고만장하게도 예수님을 처형할 권세가 자신들에게 있다고 여겼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 교회가 성경으로 해석한 자신들의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의 기도는 철저하게 성경에 이끌리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4. 세 가지 간구 (29-30; 막 16:20)
이어지는 두 절은(29-30) 간구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구한 것은 자신들의 대적인 공회를 무력화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이 모든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이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자신들이 적대와 고난을 신실하게 대면하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들이 간구한 세 가지를 하나씩 살펴보지요.
첫째로, 그들은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을 굽어봐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라는 기도입니다(29a). 이 간구는 대적들을 심판하시거나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달라는 게 아닙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살펴봐 달라는 것입니다. 이 간구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큰 신뢰를 반영합니다. 모든 상황을 굽어보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실 것을 그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비록 당장 하나님의 어떤 조치가 있어서, 그들이 위협이나 두려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대주재 하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고백입니다. 지금과 장래의 모든 상황이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다스림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이루게 되리라는 믿음이 이 간구의 기초인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간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라는 간구입니다(29b). 그들은 자신들을 대주재의 종들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속된 종,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된 사람들로 자신들을 인식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하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의 증인으로서의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그들의 두번째 간구였습니다. 그들은 충분히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지만, 가감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두 번 이상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본 대로, 복음은 거친 것이었습니다. 복음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한 죄를 지적하는 것을 언제나 포함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복음을 돌려서 말하거나 부드럽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종들’에게 중요한 것은 안전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번째 간구는 병 고침과 표적과 기사로 그들이 증거하는 말씀을 확증해달라는 간구였습니다. 30절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 병 고침과 표적과 기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병 고침과 같은 표적과 기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확증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담대한 말씀 증거를 간구한 뒤에, 표적과 기사들을 구한 이유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마가복음 16:20).”


5. 하나님의 응답 (31,33; 행 16:26; 출 19:18; 사 6:4; 행 5:12)
이들의 세 가지 간구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31절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 하나님의 응답은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현현이 있을 때 종종 나타났던 것처럼, 모인 곳이 진동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행 16:26; 출 19:18; 사 6:4). 이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의 모든 상황을 다스리고 있고 너희를 지켜 보고 있노라”는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인 곳이 진동하게 하심으로써 친히 이 모든 상황을 굽어보고 계심을 알리셨습니다.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두번째 간구는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심으로써 응답되었습니다. 이것은 오순절 사건의 반복이거나 두번째 오순절 사건이 아닙니다. 담대한 증인이 되도록 성령의 충만을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는 33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사도행전 4:33).”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말라는 공회의 위협은 소용이 없었습니다.
세번째 간구에 대한 응답은 5:12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사도행전 5:12).” 하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의 치유와 같은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도록 당신의 권능으로 계속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의 세 가지 간구는 모두 응답되었습니다!


6. 교훈과 적용


A. 안전이 아니라 사명(살후 1:3-5; 눅 21:16-19)
오늘 본문은 교회가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공동체 이상임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대주재의 백성입니다. 교회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제하고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교회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신의 권능과 뜻대로, 그리고 예정하신 것을 이루도록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의 손에 달려 있지 않으며, 북한으로부터 우리의 안전은 미국 대통령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어떤 악한 통치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회를 박해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굽어보시며 당신의 예정하신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역사의 모든 인물은 선을 행하든지 악을 행하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으며 대주재라고 부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이나 통치자도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너무나 분명하게 확신했고, 이 확신 위에서 그들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에 직면하여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대주재의백성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박해 속에서 대주재께 기도했고(23-31), 믿음과 풍성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으며(32-35), 자신들이 예수의 증인인 교회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5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데살로니가후서 1:3–5).”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기 위하여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부르심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고 있습니까?
주님은 진작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누가복음 21:16–19).” 죽임을 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주님은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이것은 영적이고 영원한 보호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박해의 위협에 직면한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위와 안전을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거기에 지나치게 매여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부활이 그들에게는 실재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고 체험했고 자신들의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을 들은 백성들은 그 부활이 자기들에게도 영광스럽게 주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후 사도들과 초기 교회의 많은 성도의 순교는 그들에게 부활 신앙이 얼마나 분명한 실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님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 그리고 율법을 이기고 마지막 원수인 사망도 이기셨습니다. 그것이 부활 사건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부활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너무나 분명한 실재였듯이, 부활신앙은 우리를 세상에서의 안전에 매여 살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부활 신앙이 예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거하는 열쇠가 됩니다. 여러분은 부활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붙들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부르심은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B. 기도의 역할 (눅 12:28-32; 요일 5:14)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서 구하지 않았고, 증인의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상황에서 교회의 기도의 우선순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관찰하는 예루살렘 교회는 박해의 위협이 찾아왔을 때, “올 것이 왔다”는 식으로 이해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셨던 것들을 기억했습니다. 이 말씀도 기억했을 것입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28–32).”
무슨 말씀입니까? 그저 살기 위해서 염려함으로 기도하지 말고,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최우선적 목적으로 삼고 살며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주님의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대주재의 백성은 모든 상황에서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힘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일서 5:14이 답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한1서 5:14).”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워드 마샬의 말대로, 그들의 “기도는 초기 교회가 박해의 시기에 하나님을 의지했고, 하나님이 어떤 일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아신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았으며, 교회의 증거 사역에 필요한 힘을 얻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여러분에게도 기도가 그런 역할을 합니까? 우리는 기도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굽어보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습니까? 그리고 기도에서 우리는 담대한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힘을 얻습니까?
교회는 대주재의 백성입니다. 대주재이신 하나님의 백성 답게 기도하며,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는 공동체가 되게 해주시기를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