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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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7).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사도행전 3:11-26, 고린도전서 2:8, 잠언 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10-09

말씀내용
성전 미문 앞에서 매일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일어나 걸었고, 뛰었으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하루 중 성전이 가장 붐비던 저녁 기도시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든 백성이 지금 놀라서 이 사람과 이 사람을 한 마디 말로 일으킨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솔로몬의 행각에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이 평범한 날의 소동은 얼마전, 일년 중 예루살렘이 가장 붐비던 오순절 아침의 소동을 기억하게 했을 것입니다. 솔로몬 행각은 큰 기둥들이 받치는 지붕 아래의 열린 집회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서 정치, 종교, 상업 등의 사회적 모임들이 열리곤 했습니다. 지금 그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고 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물증이 군중의 눈 앞에 있는 것입니다.


1. 초자연적 사건을 이해하는 열쇠, 예수 그리스도 (눅 14:26; 벧후 4:10-11; 막 12:27; 사 53:2-10; 신 18:15; 창 12:1-3)
베드로는 놀라서 모여든 군중에게 또 한 번의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 설교는 오순절의 설교처럼, 이미 발생한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
베드로가 즉시 한 일은, 군중의 관심을 치유 받은 사람 그리고 치유를 일으킨 사람인 자신들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보겠지만, 사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기적들은 종종 사도들을 주목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 관심의 초점을 자신들로부터 그리스도께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이 일에서 실패한 사역자의 수는 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에 유혹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클수록 사역자가 경험하는 유혹은 큽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그 초자연적 사건은 자신들의 ‘권능과 경건’ 때문이 아니라고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을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눅 14:26). 후일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를 쓸 때 이 일을 기억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전서 4:10–11).” 하나님을 섬길 때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 말씀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초점은 치유의 기적 자체도, 치유 받은 사람도, 치유를 행한 사람도 아닙니다. 베드로는 이제 이 초자연적 사건의 열쇠가 되는 분을 소개합니다. 13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a).” 베드로는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과 청중을 동일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하나님이 죽은 조상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막 12:27). 블레즈 파스칼이 죽은 후, 그가 즐겨 입던 외투 안에 실로 기운 포켓을 하인이 발견해서 열어보니, 그 안에는 글이 빽빽하게 적혀 있는 양피지가 있었습니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성 클레멘트의 축일,…
저녁 약 열시 반부터 열 두시 반쯤까지
불,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죽기 팔 년 전에 회심한 파스칼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만남에 대한 신앙고백을 이렇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만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다른 하나님이 아닌,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인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베드로의 설교를 관통하는 주제입니다. 예수, 그분이 그들 앞에서 일어난 초자연적 사건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당신의 종이라고 하셨고 그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구약에 뿌리를 둔 다양한 칭호로 나사렛 예수를 소개합니다. 그 첫째가 ‘그의 종’이라는 칭호입니다(13). 이 칭호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여호와의 종을 보여줍니다(사 53:2-10). 나사렛 예수는 바로 그 여호와의 종이라는 선언입니다. 이 칭호는 26절에서 설교를 마칠 때 다시 한 번 사용됩니다. 둘째는 ‘거룩하고 의로운 이(14)’입니다. 헬라어에서 하나의 정관사 아래 두 형용사가 사용된 점은 이것이 칭호임을 시사합니다. 이 칭호도 구약에 근거를 둔 하나님의 종에 대한 또 다른 칭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이 칭호로써, 예수님을 ‘살인한 사람’과 대조합니다. 세째로 ‘생명의 주’입니다(15). 이것은 생명의 창시자, 생명의 왕, 생명의 선구자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표현입니다. 주님은 생명으로 이끄실 뿐 아니라 자기를 믿는 자에게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분입니다. 네번째 호칭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입니다(22).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 형제 중에서 세우실텐데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신명기 18:15을 인용합니다. 그 선지자가 메시아를 가리킨다고 보던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분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다섯번째로는 20절에 ‘그리스도’ 칭호입니다. 구약 성경은 그리스도(메시아)를 보내시겠다는 예언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오실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여섯번째이자 끝으로 베드로는 ‘아브라함의 씨’라는 칭호를 소개합니다(25).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창 12:1-3)은 아브라함의 자손(씨)을 통해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실텐데, 바로 예수님이 그 자손, 그 씨라고 베드로는 선언합니다.
이렇게 다중적인 구약의 메시아 호칭들을 사용하여 베드로는 군중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그 분이 그들의 눈 앞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현상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2. 예수 이름의 능력 (16)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이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일은 그가 바로 구약에 예언된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 기적 치유 사건에 대한 베드로의 핵심 설명입니다. 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걸인을 고친 것은 그가 믿은 예수 이름의 능력이었습니다. 이름은 고대세계에서 인격과 동의어였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당신을 믿은 그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16절은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는 표현과 ‘믿음이.. 완전히 낫게 하였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를 낫게 한 것은 이름입니까, 믿음입니까? 그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기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님 자신이고 그 구원의 은혜가 믿는 자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몇 주 전, 예루살렘 영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출신 청년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그 이름은 비천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베드로는 바로 그분이 부활하셨고 승천하여 지금도 살아 계셔서 군중들이 ‘보고 아는 이 사람을’ 고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3. 무지는 악하다 (13-15,17,26; 고전 2:8; 고후 4:4; 잠 1:7; 27:22; 눅 23:34a; 롬 7:18; 시 119:98-100)
그런데 이 청중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몇 주전에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베드로는 그들이 한 일을 조목조목 고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적어도 세 번이나 죄가 없다고 놓아주려고 하였지만(눅 23:4,14-15,22) 그것을 거부하였으며(13-14), 도리어 살인한 자를 놓아주기를 구했고(14),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15). 그들이 예수님께 대하여 한 행동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행하심과 반대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영화롭게 하셨지만 그들은 그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지만 그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자,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7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무지입니다. 심지어 베드로는 ‘너희 관리들도’ 무지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관원은 대제사장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정죄했고 처형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넘겨준 자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도 무지해서 그랬다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극악한 죄를 덮어주려는 것입니까? 그들의 악행을 경감시켜 표현하려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로 볼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지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는 죄에 대한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몰라서 그랬다’고 대답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문제도 무지입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마땅히 쏟아야 할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무지는 타락한 인간이 가지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지적을 말도 안 되는 무식한 소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21세기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시대에 무지라니요?”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무지는 인간의 지성과 이해력에 상응하는 무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영적 무지입니다.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은 왜 사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랑하는지, 어떻게 유혹을 이기는지, 어떻게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지,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바울 사도는 세상의 무지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린도전서 2:8).”
무지의 문제는 이 무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지는 악합니다. 극악합니다. 예수님에게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이며, 주변의 사람들을 죽입니다. 이 무지에서 나올 수 있는 선함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무지는 마음의 문제이며, 죄와 연결됩니다. 26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그들의 악함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무지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무지는 사탄이 그들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린도후서 4:4).”
잠언은 지혜와 미련함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연결된다면(잠 1:7), 미련함은 곧 악함에 연결됩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잠언 27:22).” 미련함은 이런 것입니다. 결국 그 미련한 무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무지가 비극적인 것은 자기 죄에 대한 무지이며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셨던 일곱 말씀 중 하나가 무지와 관련된 기도였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a).” 무지는 자신의 죄인됨과 죄악된 본성이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죄인됨을 처음으로 알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악의 무서움을 알고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고백합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로마서 7:18).”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세상)의 차이입니다. 세상의 특징은 스스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똑똑하다고 자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기 한계를 인정하고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신자는 이런 식의 성품의 근본적 변화가 시작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신자들을 점점 더 지혜롭게 빚어 가십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리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나으며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나으니이다(시편 119:98–100).”
이것은 여러분의 경험이고 고백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무지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4. 새롭게 되는 날과 만물 회복의 날 (행 2:37-38; 3:19-21,26; 요 14:3; 창 3:17-18; 고후 4:4; 엡 2:2)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청중 다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지금 여전히 살아서 능력으로 이 걸인을 고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인생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오순절의 청중처럼,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행 2:37).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19).” 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자신들의 악함을 인정하고 그것들을 버려야 합니다(26). 여기에 오순절 설교에서와 같이, 두 가지 약속이 주어집니다. 죄 없이 함과 새롭게 되는 날입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오순절 설교에서는 회개에 따르는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이었습니다(행 2:38). 이 말씀에 비추어, 베드로가 새롭게 되는 날로 의미한 것은 성령의 선물을 의미한다고 보는 해석은 타당해 보입니다. 즉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 날이 베드로에게 찾아왔습니다. 두려움에 쌓여 주님을 부인했던 그 사람이 지금은 담대함과 용기를 가지고 관원들과 로마 군인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의 증인으로 지금 설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새롭게 되는 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죄인의 인생에는 이런 날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치고 힘겨운 세상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이런 새롭게 하는 날들이 아닙니까? 성령님께서 회개를 통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아가서 베드로는 이 설교에서 마지막 날에 대한 언급도 합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사도행전 3:20–21).”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만물이 회복되는 때를 가리킵니다. 만물이 회복되는 날까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에 받아 두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만물의 회복의 날을 말하는 것은 그 일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날 군중이 본 걷지 못하는 자의 치유 사건에서 만물의 회복이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 치유 사건은 우주에 일어날 일의 전주곡이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회복된 우주에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죄의 장애도 없이 말입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고 약속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죄의 저주로 망가진 세상에서 살아갑니다(창 3:17-18). 이 망가진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서 제한적이나마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고 설명됩니다(고후 4:4; 엡 2:2). 이 망가진 세상을 향해 기독교 복음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주의 만물이 회복될 날이 있고, 그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그날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걸인이 걷고 뛰며 성전으로 들어가 찬송한 것처럼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이 치유 사건은 그날에 있을 우주적 회복의 서막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5. 교훈과 적용
결국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입니까? 로이드존스에 의하면, 이런 말입니다. “기적에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도 관심을 갖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주를 죽였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여러분이 부인하고 배척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회개하고 마음을 돌이켜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렇게 하는 순간, 여러분의 죄는 씻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의롭다 하시고, 여러분이 전혀 죄를 짓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실 것입니다.” 그가 말하려고 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한 호칭들을 다양하게 사용하면서, 몇 주 전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청년 예수가 바로 그분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A.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은 기적을 일으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보여주듯이, 교회의 정체성과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세상이 무지에서 벗어나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고 새롭게 되는 날들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죄로 망가진 세상에 이것 말고 다른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이 있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그리고 언제나 악한 무지에 붙잡혀 주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세상이 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저를 없이 하소서!”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기에 구경꾼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태도에서는 아무도 중립적인 위치에 설 수 없습니다. 교회는 이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세상에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예수 이름의 능력을 말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사역을 찾아야 합니다.

B. 역사의 주권자 하나님(18)—그날은 온다!
우리는 또한 베드로의 설교에서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봅니다. 18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
예루살렘 백성과 유대 관원들, 그리고 빌라도와 로마군인들이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대로, 미리 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셨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작정하신 일을 섭리 속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것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걷게 된 것은 하나님의 역사 개입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떨리게 하는 동시에 담대하게 합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뜻을 좌절 시킬 수 없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나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하나님의 뜻을 좌절 시킬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는 역사의 상황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작은 인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악함과 악행을 통해서도 (‘불구하고’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향하신 당신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조급함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인가?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고자 하는가? 신자들은 자연의 법칙과 세상의 계산이 지배하는 현실을 하나님의 능력이 지배하는 현실보다 더 신뢰하지 않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여기서도 늘 살펴야 하는 것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구원을 이루시고, 만물의 회복의 날을 주시며, 우리 모두가 모든 죄를 벗어버리고 모든 죄의 장애로부터 자유한 가운데, 치유 받은 그 사람처럼, 기뻐 뛰며 하나님을 찬송할 그 날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열쇠를 쥐고 계십니다. 그가 오실 때 그 일이 이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절망 가득한 세상에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날은 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재림과 함께, 그날은 반드시 옵니다! 이 세상 역사의 열쇠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