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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 - (6). 교회가 가진 것

사도행전 3:1-10,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 4:2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9-25

말씀내용
사도행전 1-2장은 신약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성령세례를 통해 탄생되었고 그들이 성령의 충만을 입음으로써 공동체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3장부터 8:3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삶, 증거, 시련과 성장을 좀 더 들려줍니다. 특히 3-4장은 성전 앞에서 걷지 못하는 걸인을 치유한 사건과 이 사건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 두 편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의 행각에서 백성들에게 행한 설교와(행 3:11-26) 공회 앞에서 한 설교입니다(행 4:8-12). 오순절날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 치유 사건에서 교회의 핍박이 시작되는 조짐을 보게 됩니다. 이 치유 사건은 어려서 주일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는 “은과 금 나 없어도”라는 노래로 익숙하게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1. 사건의 전말 (단 6:10; 9:21; 행 4:22; 요 5:5; 9:2; 약 1:27; 행 3:16)
일단, 치유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가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당시 경건한 유대인들은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 시간 2번(오전 9시, 오후 3시)과 그 사이인 정오에, 세 차례 기도 시간을 지켰습니다. 이 전통은 다니엘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보입니다(단 6:10; 9:21). 초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거의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은 유대교의 경건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간 것이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이들이 성전에 올라간 시간은 세 번의 기도 시간 중 오후 3시로 사람들이 가장 붐비는 시간이었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으로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 앞에서 걷지 못하는 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4장 22절에 의하면 나이가 40세 정도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었기에 가족이나 친구들이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 메어서 데려다 놓으면 거기서 구걸을 하곤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의 무력함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38년된 병자를 떠올리게 합니다(요 5:5). 그 사람도 스스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무력한 사람을 통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절망적 상태의 죄인과 스스로는 죄와 비참함 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의 무력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신체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종종 조롱의 대상이거나 값싼 농담거리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과거 30-40년 전 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볼 때 그 부모들의 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주님은,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차원이 있다며 그 생각을 고쳐 주셨습니다(요 9:2,3).
걸인은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미문이 어느 문을 가리키는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하지만 이 사람이 성전 문에서 구걸을 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제는 경건의 중심 요소였고, 성전에 기도하러 오는 유대인들이라면 이 사람을 그냥 지나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구약 율법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을 돕고 보살필 것을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신약교회에서도 이것은 동일하게 강조되었습니다. 야고보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7).”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걸인은 누구에게라도 했던 것처럼 “적선하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우리를 보라”고 자신을 향해서 하는 말을 듣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 중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한 남자가 자기를 향해 “우리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걸인은 당연히 ‘무언가 대단한 것을 줄 심산이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걸인은 그런 마음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눈이 마주친 걸인을 향해 베드로가 말을 이어갑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말을 들은 걸인의 실망하는 눈빛을 상상할 수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의 이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말은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가 당면하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우리가 2장에서 본 것처럼, 그들은 물질의 결핍 때문에 물건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통용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재산이 있는 성도들이 재산을 팔아 공동체의 필요를 채워야 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말은 공동체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이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구절이지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말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 능력으로’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베드로가 걸인의 오른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자 그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었고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워커의 말입니다. “그 권능은 그리스도의 권능이었으나 그 손은 베드로의 손이었다.” 태어나서 40년 간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일어나 걷게 된 것입니다. 7절에서 ‘곧’이라는 단어는 ‘즉시’라는 말입니다. 그에게는 일정 기간의 재활치료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는 뛰었고 성전으로 걸어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어려서 불렀던 노래의 후렴이 이렇습니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2x).” 그가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은, 이 치유를 행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3:16) 이 사람은 주님의 이름과 그 이름의 능력을 믿었던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사도행전 3:16).”
이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성전 문 앞에서 벌어졌고, 치유를 받은 걸인은 성전으로 기도하러 오던 대부분의 유대인에게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베드로의 말 한 마디에 즉시 일어나 걷고 뛰고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람에게 일어난 초자연적 치유 이적을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고 놀랐습니다. 10절에 ‘놀라다’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데, 헬라어로는 서로 다른 단어들이 사용되었습니다. 첫번째 놀랍게 여겼다는 말은 두려움이 개재되어 있는 놀라움을 의미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라면 이런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기에, 그들의 두려운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그들은 유대와 갈릴리에서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런 일들을 행하는 것을 직접 보았거나 들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사와 표적들을 행하셨던 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두 세 달 전에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퍼진 소문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부활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믿었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그 유대인들은 예수는 죽었는데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에 의해 예수가 일으켰던 기적이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을 본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심히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단지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얼마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가 일으켰던 동일한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은 두렵기 조차 했을 것입니다.
두번째 ‘놀라니라’는 말은 ‘대경실색하다’ 혹은 ‘무아지경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시쳇말로, ‘놀라서 까무라치다’, 즉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이것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이 단번에 치유되는 것을 본 유대인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얼마 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처럼, 다시 예루살렘을 소동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이 치유 사건의 전말입니다.


2. 새 시대의 표적—예수께서 통치하신다. (마 28:18,20; 행 1:8)
그렇다면 이제 치유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이어 사도행전에 기록된 두번째 사건입니다. 왜 성령님께서는 이 사건을 예루살렘 교회 초기의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이 치유 사건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이 새로운 시대의 표적을 보여주는 사건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와 갈릴리에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며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사도들과 교회, 심지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에게까지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마 28:18,20), 지금 그것이 그대로 타나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행하시던 이적과 기사가 베드로의 손을 통해서 똑같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 말씀하신 대로,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자 권능을 받고 예수님의 효과적인 증인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즉, 이 이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셨지만 지금도 여전히 교회와 사도들을 통하여 지상에서 당신의 주권과 능력을 행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의 교회와 세상에 보여주시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으로써 선언하신 새 시대는 주님의 죽음이나 승천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의 나라, 즉 새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고 교회를 통해서 지속될 것이며 주님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통치를 의미하는 천년 왕국이라는 것을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살펴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 치유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지금 교회를 통해 세상을 통치하심을 보여주는 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의 신실한 증인이 되도록 주님은 당신의 초자연적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초점은 베드로나 요한 또는 걷지 못하던 걸인이 아닙니다. 이 치유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성령님 안에서 늘 교회와 함께 계시고 그 능력을 행사하신다는 것입니다.


3. 능력에 대한 오해—십자가의 능력 (고전 1:18; 고후 13:4; 빌 4:11-13)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교회와 함께 계시고 당신의 주권과 능력으로 통치하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인데, 교회 역사에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오해가 많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세상이 생각하는 자연적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과 복음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십자가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약함과 무력함과 절망의 방식을 보여주는 십자가는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 말한 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린도전서 1:18).”입니다. 교회는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유혹을 가집니다. 말하자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이 걸인이 한 순간에 치유되고 일어서서 걷고 뛰는 것처럼 나타나길 바랍니다. “보라, 그리스도의 능력을!”이라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은 이 세상에서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린도후서 13:4).”
우리는 늘 그리스도의 능력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나타나기를 바라지만, 그 능력은 초자연적이고 역설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교회에게 한 유명한 고백을 살펴보지요.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2000년 시드니 올림픽 10미터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인 미국 대표 로라 윌킨슨(Laura Wilkinson)이 역경 속에서 금메달을 따고 인터뷰에서 이 구절을 말했던 것이 유명합니다. 그녀의 고백은 진실한 고백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의 이 고백은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즉 우승을 하거나 역경을 딛고 승리를 이루었을 때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이 고백을 하는 맥락은 11-12절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립보서 4:11–12).”
그는 모든 상황에서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견디고 감사하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는데, 그것은 자기에게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궁핍과 비천과 풍부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견디게 하고 이기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가 외적 성장을 하고 멋진 예배당을 지음으로써만이 아닙니다. 성도가 경제적 곤경을 딛고 경제적 번영을 이룸으로써만이 아닙니다. 모든 환경에서 교회와 성도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경험하고 세상 앞에 드러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본문의 치유 이적은, 하나님께서 교회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와 능력을 만천하에 확인시켜 주신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이 걸인을 고쳐준 뒤에 모여드는 청중을 향해서 “누구 또 낫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까? 앞으로 나오시면 제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쳐드리지요.”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은 종종 감추어져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 한 가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베드로의 말은 교회가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물질적으로 돕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교회는 오로지 영적인 도움만을 줄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으로 상징되는 물질을 그 걸인에게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 걸인의 신체를 치유해 주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걸인은 믿음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지만, 그는 또한 실제로 육신의 치유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을 섬길 때 우선순위에 대한 교훈을 여기서 배울 수 있습니다.


4. 우리가 가진 것
교회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을 세상에 줄 수 있습니다. 자기가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 가진 것을 줄 수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은과 금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면, 교회는 세상을 은과 금으로 섬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아니더라도 그런 일을 잘 할 수 있는 단체나 조직들은 많습니다. 그리고 모든 교회가 다 은과 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교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말한 ‘내게 있는 이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었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세상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세상이 기대하는 은과 금(felt needs)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언제나 세상이 기대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걸인에게 일어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걸인이 상징하는 죄로 타락한 세상은 무기력하고 마비되어 있으며 무능합니다. 타락한 세상은 스스로를 고칠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교회가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도덕적 기여나 심리적 치유와 평안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정도가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한국 사회는 그 조차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윤리적이거나 지적인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영적 생명과 능력으로 세상과 구별됩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에서,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영적 생명과 능력에서 찾으려 하지 않았던 때가 많습니다. 도리어 은과 금을 소유하고 권력을 가짐으로써 교회의 영광과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유혹에 무릎을 꿇어왔습니다. 12세기의 일입니다. 한 번은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 이노켄티우스 2세를 방문하였는데, 마침 엄청난 액수의 돈을 세고 있던 교황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토마스,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필요가 없어졌다네.” 그러자, 토마스는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제 ‘일어나 걸으라’고 더 이상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슬픈 이야기입니다. 아퀴나스의 이 말은 오늘날 교회와 우리 자신에게 어떤 도전을 주고 있습니까?


5.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 (행 19:11-17)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은과 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소유한 은과 금이 하나님의 축복을 증명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베드로의 말은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그것은 예수 이름의 능력이고 생명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지는 마술적 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바울을 흉내내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린 사람에게 명령하였다가 귀신을 공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행 19:11-17). 나면서 걷지 못하던 걸인을 걷게 한 능력은 예수님의 이름이 지닌 마술적 능력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도 늘 이런 정체성의 위기와 유혹을 경험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변변치 못하게 살아가는 게 아닌가,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중한 병이 들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그런 것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세상적으로 규모가 있고 멋진 예배당을 갖추고 있다고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당의 규모와 화려함, 교회 명의의 부동산이나 은행잔고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가진 영적 생명과 영적 능력이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과연 그 생명과 능력을 누리는 교회인가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의 은혜 안에서 그 생명과 능력을 향유합니까?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명은 이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교회가 초자연적 공동체라면 교회가 가진 능력도 초자연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의 능력은 중세의 교황들이 누렸던 세상의 권력이나, 오늘날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가진 재력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우리를 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줄 수 있는 그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적 생명과 능력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능력 보다 의사나 어떤 과학적 힘, 숫자적 계산을 더 의지하는 합리주의적 태도로 가는 것은 위험합니다. 동시에 아프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일상적 수단과 합리적 사고를 멸시하는 열광주의적 태도도 위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한도에서 모든 수단을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 만이 가졌고 우리 만이 줄 수 있는 그 능력을 의지하여 살아가고 세상을 섬겨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적으로 죽은 자가 살아나고 구원을 경험한 신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에 동참하게 하는 일입니다. 걸인이 뛰며 걸으며 성전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하였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세상은 교회를 두려워하고 놀라서 입이 다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합니다.


6. 소망
주님은 공생애 기간에 유대와 갈릴리의 모든 병자를 하나도 남김없이 고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이 치유사건은 하나의 표적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있다는 표적이고, 예수님께서 여전히 교회를 통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표적이며,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표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당장 이런 기적적 치유가 약속된 것은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언제 어느 때라도 이런 비상한 치유의 역사들을 일으켜 주실 수 있으시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치유를 통해서 오는 세상, 새 시대를 엿볼 수 있고 소망을 품게 됩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기적들은 재창조된 새 시대의 질서를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원치 않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금 중한 질병으로 고통을 겪게 된 사람들에게, 새 시대의 표적으로 임한 이 치유 사건은 오는 세상에서 우리가 새로운 몸의 자유와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제공해줍니다. 뛰고 걸으며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송했던 이 사람 처럼 말입니다. 어느 날, 우리는 부활의 몸 안에서, 죄가 우리에게 행한 모든 흔적이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날을 볼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