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밴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 보내기
  • 블로그 보내기

사도행전 강해 - (5). 초자연적 공동체의 삶

사도행전 2:42-47, 요한일서 1:3, 요한일서 3:1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22-09-18

말씀내용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 어떻게 신약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면 신약교회는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태생적으로 그리고 본질상 초자연적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우리는 어떻게 죄인이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회원이 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거듭남이라는 초자연적 역사가 삶 가운데 일어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들이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유형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마 13:30).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께서 알곡은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던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자기 영혼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마땅하고, 또 지금 지역교회(유형교회)의 울타리에 들어와 있지만 스스로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구해야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이런 초자연적 역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 교회로 모였을 때,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입니다.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전수받은 교회 운영매뉴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들과 성도들은 말씀과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이 미리 준비한 프로그램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갑자기 삼천 명이나 더해진 교회에서 ‘일어난(발생한)’ 일을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순절 아침 성령 강림이라는 초자연적 현상에 이어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한 대규모 회심 사건에 입을 다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회심과 죄사함을 경험한 첫날이었으니, 그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들 모두는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역사에 대한 경이로움과 한편으로는 경외감에 사로잡혔을 듯 합니다. 그들의 삶은 결코 어제와 같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서로를 보면서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새 사람들을 보는 감격이 넘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최초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삶을 단순한 감상주의적 설명만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영감된 이 본문은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삶의 핵심 요소들을 보여줍니다. 그 요소들은 교회다운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성령님께서 다스리시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1. 힘쓰는 교회 (마 13:30; 42, 46)
먼저 초자연적 공동체의 전체적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들은 힘쓰는 공동체, 전념하는 공동체였습니다. 42절에 ‘힘쓰니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단어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는 이 모든 행위들에 걸리는 말입니다. 헬라어 시제는 그들이 한 번 힘쓴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전념하고 전념했음을 강조합니다. ‘힘쓰다’라는 단어는 고집스럽게 밀어붙이고 그것에 헌신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할 때, 다시 한 번 나옵니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교회는 그저 멤버십을 유지하는 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모임이고, 모임은 교회의 본질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세요. 교회는 온라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네트워크가 아닙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씀으로써 사도의 가르침과 교제와 떡을 뗌과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들에게 교회 공동체의 삶은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기 전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이 인생에서 전념할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던 장소는 크게 두 곳이었습니다. 성전과 성도들의 집이었습니다(46). 아마 전체의 큰 모임은 날마다 정해진 기도 시간에 성전의 이방인의 뜰 동쪽 끝에 있는 솔로몬 행각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모임은 성도들의 집집에서 모였습니다. 집에서 모일 때 그들은 음식을 나누며 주님을 기념했고 교제하며 자신들이 한 가족임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그렇게 했습니다(46). 그들은 의무 때문에 모이지 않았습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은 그들이 떡을 떼고 음식을 먹는 태도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 표현은 그들이 이 모든 일들을 어떤 마음과 태도로 했는지, 공동체의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마음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었습니다. 허세 없고 거짓 없는 기쁨이었고, 나뉘어지지 않은 한결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조직이나 집단도 결코 이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충만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 자기만의 이유가 있고 목적이 있고 품은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초자연적 공동체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초자연적 공동체의 전체적인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이 모여서 전념했던 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A.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회(42)
첫째로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은 신약교회 부흥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서 강조는 사도들이 가르침에 전념했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먹었습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초대 교회의 회중은 거룩한 설교로 배부르기 전에는 흩어지지 않았다”고 표현했습니다. 미국의 켄트 휴즈 목사님이 루마니아의 살아있는 순교자 리처드 범브란트 목사님을 만났을 때의 일화입니다. 켄트 휴즈가 “우리 교회는 성경을 믿는 교회(Bible-believing church)입니다.”라고 소개하자, 범브란트 목사님이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의 교회는 성경을 살아내는 교회(Bible-living church)인가요?”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성도들이 말씀이 가르침을 받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면, 교제와 성찬과 기도가 온전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먼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교제와 성찬과 기도를 바르고 힘있게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제발 열심히 말씀을 배우시라고, 수요기도회에도 오시고, 금요학당에도 오시라고 말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사도들이 사정 사정해서 출석율이 좋아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초자연적인 역사를 그들 심령 속에서 지속적으로 행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 회심하고 나서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녀오자마자 성경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주일에는 어른들의 주일예배와 중고등부 예배에 참여하고, 교회에 남아 어른들과 밥을 먹고 대화에도 참여했습니다. 오후에는 중고등부 성경공부에 참여했고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예배를 드리고서 기쁨과 아쉬움 속에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삼일 후, 수요기도회에 참석했고, 한 주일 내내 설교 노트를 읽으며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의 삶의 첫번째 특징은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일에 전념했다는 것입니다.

B. 서로 교제하는 교회(42,44-45; 고전 12:13; 요일 1:3; 3:14; 막 10:29-30)
두번째로 최초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 전념했던 것은 교제였습니다. 벧샬롬교회의 교인이 되실 때, 여러분은 우리 교회가 혹은 제가 성도의 교제를 얼마나 강조하는지 느끼셨을 것입니다. 교인은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면 되지, 무슨 교인들에게 헌신하라는 것인가?”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서로를 사랑하여 서로에게 헌신하는 공동체입니다. 교제는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교제의 토대는 그들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시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고전 12:13). 교제는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우리 교회 소그룹 이름도 코이노니아입니다. 교제의 본질이 경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지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일 공예배에 참석하고 코이노니아에서 교제하지 않는다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한 성령을 마시는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 즉 교회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적 교제는 단지 코이노니아 그룹 안에서의 관계나, 내가 편한 몇 사람, 혹은 나와 사회적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의 초자연적 특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교제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왜곡된 단어도 없습니다. 교제는 교회 로비에서 몇 마디 인사나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제는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를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한1서 1:3).”
성령의 선물을 받고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헌신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증거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도전합니다. “여러분 자신이든 누구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한 첫번째 테스트는 이렇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이고 싶어합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바람이 없다면 결론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본문은 이것을 말씀합니다. 거듭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을 모시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이 가장 큰 일이고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것은 자신과 사회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과의 교제입니까, 아니면 대단하고 멋진 불신자와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까? 요한일서에서 강조하듯이,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중요한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한1서 3:14).” 동일한 본성, 동일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과 교제하는 것, 자신의 죄인됨을 알았고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알았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은 얼마나 즐겁고 복된 일입니까? 교회는 그저 인생에서 잠깐의 시간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영원을 함께 보내게 될 친구들이고,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사귐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교제는 더 깊은 데로 나아갔습니다. 44-45절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의 교제는 물질의 나눔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말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새로 회심한 삼천 명의 사람들 중 다수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순례하러 온 여행자들이었으니, 그들의 체류가 길어지면서 그들이 준비한 자금이 바닥이 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먼저 한 것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한’ 것입니다.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합니까?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미숙한 성도들, 영적 유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 안에서 자라가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참된 성도들이었습니다. 존 웨슬리가 “주머니가 회심해야 참된 회심이다”라고 말한대로, 참된 회심은 돈과 소유와 재산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냅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물건을 통용하는 것으로도 부족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중에 부유한 성도들이나 예루살렘에 소유를 가진 성도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성도들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기 시작했습니다. 강요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5장과 6장으로 가면, 이 훌륭한 일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씀하는 것은, 어떤 자연적 요소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초자연적 공동체의 삶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 교제의 실상은 사실 주님께서 마가복음 10:29-30에서 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29–30).”
끝으로, 이들이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나눠주는 일은 일회성으로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팔아 나눠주었다는 동사들은 헬라어 미완료시제로 쓰였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일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 선물을 받았으며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줍니다.

C. 떡을 떼는 교회 (42,46; 행 27:35; 눅 9:16)
세번째로 최초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 모여서 전념했던 것은 떡을 떼는 일이었습니다. 떡을 뗀다는 말은 음식을 먹는 것을 나타내는 유대식 표현입니다(행 27:35; 눅 9:16).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주님이 제정하신 성찬을 의미한다는데 동의합니다. 성찬이 지금 같이 약소한 의식이 되기 전인 초기에는, 진정한 공동의 식사로 행해졌었기 때문입니다. 성찬으로서의 공동식사는 한편으로는 앞에 있는 교제의 영역에 속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뒤에 나오는 기도와 함께 예배의 영역에 넣을 수도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만큼 성도를 겸손하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죽으심과 다시 오심을 선포하기 위해 떡을 떼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떡을 뗄 때마다 죄사함의 감격이 살아나고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에 불이 붙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일을 모일 때마다 열심으로 행했습니다. 이 은혜의 방편을 모일 때마다 열심으로 행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려고 합니다.

D. 기도하는 교회 (42; 행 1:14)
네번째로 그들이 한 마음으로 전념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들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다락방에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행 1:14). 성령 강림 후, 삼천명의 회심자들이 함께 모인 교회는 계속해서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필요한 존재, 죄인이며 실패자인 자신들을 인식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서야 어찌 기도하려 하고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그들이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그들에게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났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알았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말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아버지와 말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비록 회심한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진정한 의미의 초신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교회됨의 열매 (43,47; 벧전 3:15)
우리는 최초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이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전념했던 네 가지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들은 초자연적 공동체의 삶의 초자연적 특성을 보여주는 것들이었기에, 그 공동체의 삶을 밖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은 대단했습니다. 초자연적 공동체가 이 자연 세상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주는 충격효과였습니다.
먼저, 교회가 세상에 주는 충격은 두려움이었습니다(43). 예루살렘 사람들은 “저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삶은 숨겨질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의 두려움은 어떤 신적인 또는 초자연적 역사가 나타날 때 사람들이 가지는 일종의 경외심을 보여줍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교회의 삶을 보았을 때, 그들은 초자연적 역사를 보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들도 그들의 두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입니다. 헬라어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와 ‘그들이 두려워했다’고 할 때, 두 번 다 ‘일어나다, 발생하다’라는 뜻의 단어(γίνομαι)를 사용했습니다. 즉,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긴 것’이고, 기사와 표적도 ‘발생한’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일어나게 하셨다는 뉘앙스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단어의 미완료시제는, 계속해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의미를 전달해줍니다.
초자연적 공동체의 삶이 교회 밖의 세상에 미친 두번째 파장은 칭송이었습니다(47).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교회는 사실 늘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말한 것인데, 슬프게도 우리는 오늘날 이런 질문을 들어보지를 못합니다.
결국 교회 공동체적 삶이 세상에 미친 결과는, 계속되는 회심의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47절 하반절입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날마다’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주께서는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해 주셨습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회심의 열매는 사도들이 주도하는 전도 캠페인이나 교회의 전도 프로그램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수적 부흥을 목표로 삼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르침에 전념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초자연적 역사였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을 받고 성령이 충만한 교회 공동체의 존재가 주변 세상에 미친 결과였습니다. 그들은 그냥 교회로 존재했을 뿐이었습니다. 복음은 그리고 교회는 그 자체로 세상에 폭탄처럼 던져지는 메시지요, 실재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연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닌, 초자연적 공동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 교훈과 적용(히 10:24-25)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에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누가는 성령의 영감으로, 최초의 교회 공동체가 보여준 초자연적 특성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교회 회원이 된 사람들 각자에게 초자연적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었고,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사함과 성령의 선물을 받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공동체의 삶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억지로 하지 않았고 강요 때문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마음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러나오는 대로 행했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그 모든 일에 전념했습니다. 아무리 유형교회라고 할지라도 성령으로 거듭나는 초자연적 역사가 일어난 사람들이 적다는 사실이 오늘의 교회가 왜 성경에서 보는 교회로부터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친다고 최초의 신약교회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했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하는 것도 무익합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그들 안에서 이렇게 일하셨으니, 우리도 성령의 충만을 구하고 그런 특징적, 본질적 요소들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를 구하자.”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순종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고 순종의 의지와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본문을 함께 상고할 때,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라는 갈망이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벧샬롬교회로 부르신 거룩한 소명이 아닙니까? ㄱ13
영적이고 초자연적 공동체인 교회가 몸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들은 날마다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힘쓰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히 10:24-25). 그러나 본문은 그 이상의 이유들을 보여줍니다. 최초의 그리스도의 길따름이들은 말씀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서로 교제하기 위해 그리고 떡을 떼고 기도하기 위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믿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오,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우리에게도 허락하사 영광스러운 교회를 보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