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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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4). 말씀에 의존하는 삶

시편 119:105-112, 로마서 8:35-37, 히브리서 11: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11-02

말씀내용
시편 119편의 14연은 히브리 알파벳 눈(נ)으로 시작하는 여덟 절로 구성됩니다. 시인은 12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에 견고하게 서있다고 했고, 13연에서는 그 말씀이 세상 지혜와 비교할 수 없는 지혜를 주며 변화된 삶으로 인도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14연에서 그는 경건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결심을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할 때, 그 말씀이 시인을 인생 여정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말했고, 그 매력적인 말씀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경건한 인생을 살고 싶은 열망을 자신의 결단에 담아 표현합니다.


1. 보호하는 말씀 (105; 시 18:28; 56:13)
14연을 시작하는 105절은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105).” 성경은 우리 인생의 여정을 종종 길에 비유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길게 나있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에만 걷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인생 여정에서 어두운 밤을 만나서 밤길을 걷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 필요한 것은 등과 빛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우리 발 앞을 비추어주는 등이 필요하고 낮에는 빛을 따라 행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밤이나 낮에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인생의 길을 비추어주는 등과 빛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여정에서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은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거친 세상에서 버티다 보면, 우리 마음이 거칠고 사나와지기 십상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그들이 걸어가는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보호하시는데 당신의 말씀으로 보호하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게 하시고 그 은혜로 우리의 거칠고 상한 마음을 만지시고 부드럽게 만드십니다. 이 은혜가 없이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사람이 마음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105절이 성도의 여정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말씀의 기능 가운데 인도하심 보다는 보호하심을 의미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일상의 삶 속에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으로 인도하신다고 말할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서 모든 결정의 근거를 발견하려고 하는 태도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사용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곧 바로 난관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결혼과 직장과 대인관계와 사업에 관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정의 근거를 제공하는 책이 아닙니다. 도리어 성경은 모든 지혜의 원천으로서 우리를 모든 스승과 노인과 대적보다 지혜롭고 명철하게 하여, 이 지혜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게 하고, 의롭고 선한 길을 결정하고 선택하게 합니다. 105절은 주의 말씀이 그렇게 모든 위험천만한 여정에서 당신의 언약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기능을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에 대한 데렉 키드너의 말입니다. “시인은 직업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세속적 지침이 아니라 도덕적 선택을 위한 진리에 관심을 두었다.”
시편 18:28을 봅시다. “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시편 18:28).” 여기서 등불은 구원, 승리,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등불이 필요한 이유는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식별하기 위함입니다.
또 시편 56:13입니다.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시편 56:13).” 여기서 시인은 사망에서 지켜주고, 실족하지 않게 지켜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어떻게 보호하신다는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요. 이것은 교통사고나 기타 물리적 상해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을 그 인생 여정에서 인도하신다고 하는 것은, 세상 지혜를 의존하여 살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대인관계, 부부관계와 육아와 사업의 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광범위하고, 책과 미디어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지대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지혜는 도덕적으로 왜곡되어 있고 그 한계는 명확합니다. 무신론과 인본주의의 전제를 가지고 있는 세상의 지혜는 성경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인간의 전적 부패와 도덕적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출발점의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의 지혜는 다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일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이 세상에 허락하신 지혜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만, 전제가 틀렸기에 우리는 무분별하게 세상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고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는 성경이 주는 월등한 지혜와 그 원리로 삶의 모든 영역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육아에 대해서 상당한 자신감을 피력하던 젊은 부부가 있습니다. 그 자신감은 그들이 관련 서적들을 많이 공부했다는 데서 나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수년이 지나 그들은 자신들이 책에서 배운 이론이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지만, 중요한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육아를 넘어, 인생의 여정에서 그 때마다 만나서 풀어야 하는 과제들이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유튜브에서 관련 주제들을 찾아보면 소위 ‘전문가’들의 견해들을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형서점의 자기계발 분야에서 여러분은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소위 ‘전문가’들이 쓴 책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위험 요소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뢰가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여러분을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성경, 곧 “주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대에 살았던 시인에게는 자기계발서들과 유튜브가 없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지만,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너무나 많은 전문가들의 서적과 강연 영상들이 있지 않은가?”라고 말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와 오늘과 내일, 영원토록 불변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2. 거룩한 결심(106-108; 삿 11; 민 30:6,8)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은 참 좋다고 고백만 하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는 거룩한 결심을 합니다. 106절입니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106).”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라는 시인의 말은 자신이 결단하면 지킬 수 있다는 식의 오만한 결심이 아닙니다. 107절을 보십시오. “나의 고난이 매우 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107).”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자신을 살아나게 하시지 않으면 시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존재가 그렇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식하고 살아가십니까? 성도들이 하는 모든 결단에는 이런 간구가 언제나 따릅니다. 가령, 우리가 찬송가를 부를 때 결단하는 가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찬송의 가사를 따라 부를 때마다 우리는 은혜를 구하는 심정으로 그 결단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가령, 321장(날 대속하신 구주께)의 후렴은 이렇습니다.
나 구주 위해 살리라
내 기쁨 한량 없으리
내 갈길 인도 하소서
내 구주 예수여
“나 구주 위해 살리라”는 결심입니다. 그러나 이어서 “내 갈 길 인도하소서”라고 은혜를 구합니다. 성도의 결심은 언제나 이런 방식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신실함에 근거하여 결심하지 않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기반으로 결심합니다. 복음서는 베드로가 얼마나 자주 자신의 신실함을 믿고 결심을 했다가 실패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마 여러분은 베드로처럼 결심을 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실패의 경험은 결심에 대한 냉소적, 자조적 관점을 낳기도 합니다. 자신을 의존하는 결심은 낙담을 낳고 때로는 더 깊은 죄에 빠지게 합니다.
입다를 생각해보십시오(삿 11). 그는 얼마나 경솔한 서원을 했습니까? 그 경솔한 서원은 결국 낙담을 넘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인신제사로 범죄하는 자리에까지 인도하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이런 경솔한 결심을 칭송하지 않습니다(민 30:6,8). 그러나 결심은 중요합니다. 결심을 하는 사람은 날마다 자신의 실패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스도의 피뿌림과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 그 말씀에 의존하여 거룩한 결심을 할 때, 우리는 그 결심과 은혜로 인하여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시인이 107절에서 말하는 고난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결심을 이행하여 살 수 없는 환경을 포함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주의 말씀대로 자기를 살아나게 해달라는 간구는 다시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도록 살려 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단지 살고 죽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루를 살아도 주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기도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살아나게 하실 하나님께 찬송의 자원제물을 드린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이 드리는 자원제물을 받으시고 주의 공의를 내게 가르치소서(108).” 자원제물은 속죄 때문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이고, 무엇보다 ‘내 입이 드리는’이라는 말은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107절과 109절이 고난의 상황을 그리고 있는데, 이 찬송의 자원제물이 드려지는 상황은 그 고난에 둘러 쌓인 상황임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여전히 고난 중에 있지만,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를 이 찬송의 자원제물로써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위험을 무릅쓰는 삶 (109-110; 요 15:18-19; 눅 21:16,18; 롬 8:35,37)
우리는 109절에서 다시 107절의 고난의 상황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109).”
시인이 위기에 빠진 것은 신앙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인생의 여정을 세상의 지혜가 아닌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험이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하면 다치거나 상하지 않고 안전하고 무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의 위험에 대해서 주님은 여러 차례 말씀하셨고 신약성경 전체가 그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고 하셨고(요 15:18-19), 대적들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1:16). 그러나 주님은 동시에 우리가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눅 21:18). 당연히 이 말씀은 우리가 물리적 위협을 받을지라도(심지어 죽임을 당할지라도) 우리 영혼은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도록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자녀들을 눈동자 같이 보호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멋지게 표현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로마서 8:35,37).”
성도가 어떻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이깁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길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나의 생명이 항상 위기에 있사오나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나이다”라고 고백한 이유가 그것입니다(109). 여러분도 그런 위기의 한 가운데서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경험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경험은 110절의 고백으로 여러분을 인도할 것입니다. “악인들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110).” 성도의 여정에는 악인들이 해하려고 파 놓은 함정과 올무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여정을 걸어가기 위해서, 성도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위험은 세상의 지혜로 식별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의 지혜는 도리어 성도들의 올무가 되곤 합니다. 시인이 ‘주의 법도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자신을 악인들이 쳐 놓은 올무를 피하도록 지켜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과거의 은혜로부터 경험했기에,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늘 위험을 무릅쓰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하나님의 말씀 없이 그 위험천만한 여정을 걸어가는 신자 보다 더 무모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4. 즐거움이 되는 말씀 (111-112; 히 11:16)
시인은 단순히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해주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지키고 그 말씀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그 말씀이 자신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증거들로 내가 영원히 나의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111).”
여기서 ‘기업’은 유산을 의미하는데 시인이 말하는 유산은 이 땅에서 받아 누릴 유산이 아니라, 새하늘과 새땅에서 받아 누리게 될 선물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그날을 바라봅니다. 그가 누릴 유산은 새하늘과 새땅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에게 ‘주의 증거들’은 새 창조세계에서 누릴 유업을 보장해주는 권리증서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장래의 은혜를 확인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주의 말씀과 그 약속에서 장래의 유업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브리서 11:16).”
여러분은 주의 말씀에서 장래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보장해주신 유산을 확인하십니까? 비록 지금 우리의 인생 여정이 높은 산을 넘어야 하고 험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주의 말씀에서 이 소망과 확신을 발견하는 성도들은 주의 말씀이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내 마음을 기울였나이다(112).” 다시 한 번, 시인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율례들을 행하겠다고 자신의 거룩한 결심을 표명합니다. 시인에게 주의 증거들이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기에 그 주의 율례들을 행하는 일에 마음을 온전히 기울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랑과 마음이 그의 순종과 헌신을 사랑 없는 순종의 율법주의로부터 지켜줄 것입니다. 그가 걸어가는 여정은 기쁨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비록 고난이 매우 심하고(107) 생명이 항상 위기 가운데 있을지라도 말입니다(109).


5. 말씀에 의존하는 삶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지뢰밭과 같은 인생길의 여정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안전하게 이 여정을 마치고 우리의 목적지인 천성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장래에 여러분에게 보장해주신 하나님의 약속된 유산에 이를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과연 장래의 유업을 바라보는 소망이 이 여정에서 여러분을 유혹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어떻게 여러분을 지켜주고 있습니까?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역할을 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의 지혜와 지식, 우리가 가진 물질, 우리가 가진 인간관계들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전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주어집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그 말씀에 의존하여 이 여정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읽고 배우고 묵상해야 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말씀이 내 마음의 즐거움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말씀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결심입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그 거룩한 결심을 하십시오. 주의 말씀을 의존하여 살겠다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삶의 자리에서 주의 말씀을 의존하여 살아가는 은혜를 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