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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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모하는 말씀 - (11).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영혼에게

시편 119:81-88, 로마서 4:18, 시편 123: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22-09-07

말씀내용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영혼에게’라는 제목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향하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설교의 제목을 언제 보셨습니까? 보통 주일에 주보를 받으실 때, 수요기도회 설교를 확인하시나요? 아니면 오늘 확인하시곤 하십니까? 아니면 지금 수요기도회를 시작하고 나서야 확인하십니까? 언제 확인했든지 여러분이 이 제목을 읽으셨을 때, “아, 나를 위한 설교이겠구나”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니면 그런 특별한 느낌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갔습니까? 여러분은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여러분은 위로가 필요합니까? 그 위로는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입니까? 위로가 필요한데 그 위로를 끊임 없이 사람들에게서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기대했던 위로를 얻지 못할 때 그들에게서 실망을 하곤 합니다. 사람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위로할 필요가 있고, 사람이 주는 위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줄 수 없는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위로가 있습니다. 신자는 이것을 경험하고 아는 사람입니다.

1. 시편 119편의 어두운 밤
오늘 본문을 마치면 시편 119편의 절반이 끝납니다. 전반부의 마지막인 11연은 119편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 본문을 ‘119편의 어두운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본문이 절망적이고 어두우며 심지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이유는, 시인이 혼미해질 정도로 지쳐 있는 이유가 단지 고난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기에 지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인의 영혼은 그 위로가 주어지지 않아서 지쳐 있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제대로 풀어서 쓴다면 이런 의미가 될 것입니다.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데 그 위로가 주어지지 않아서 지쳐 있는 영혼에게”
많은 시편에서처럼, 시인은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82),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84).” 하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단지 고대에 살던 한 신앙인의 고백을 넘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여기에는 하나님의 대답과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삼키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를 기다리다 지쳤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위로를 계속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존 칼빈은 1553년 4월 2일 이 본문으로 설교를 했는데, 설교를 이런 말로 시작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르게 기억한다면 그것으로 우리가 인내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하지만 어떤 악이 우리를 짓누를 때 낙담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위로가 필요할 때 성도가 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약속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칼빈의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칼빈의 삶이 얼마나 많은 고난으로 가득한 것이었는지를 안다면, 우리는 그가 이 말을 쉽게 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영혼이 주의 약속을 기억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인지 본문을 살펴봅시다.

2.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81-84; 시 123:2; 사 8:17; 시 130:5; 잠 13:12; 벧후 3:9; 합 2:3; 사 28:16; 롬 4:18; 욥 16:8; 30:30; 마 6:10)
먼저 81-82절입니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 나의 말이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실까 하면서 내 눈이 주의 말씀을 바라기에 피곤하니이다(시편 119:81–82).”
본문의 여덟 절은 모두 히브리어 알파벳 카프(כ)로 시작하는데, 이 두 절은 모두 시인의 심정을 드러내는 ‘바란다’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 두 구절에서 시인이 바라는 것은 ‘주의 말씀’입니다. 주의 위로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시인이 바라는 것은 주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주목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이 본문에서 배우는 첫번째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개로 주어지는 특별한 체험을 바라지만, 이것은 성경적 방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신앙은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으로 예언된 메시아를 기다렸고, 신약의 성도들은 다시 오시겠다고 친히 말씀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바라보고 기다리는 성도의 마음을 잘 표현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편 123:2).” 심지어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야곱의 집에 대하여 얼굴을 가리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이사야 8:17).” 자기 백성을 향해 얼굴을 가리시는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바라보겠다고 말하는 선지자야말로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영혼이 아닙니까? 그의 믿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의 기자들이나 이사야 선지자 등,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자기를 위로할 수 없는 상황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시편 130:5도 보십시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시편 130:5).”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미쁘심의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모든 속성이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랐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신실한 성도라도 소망이 더디 이루어진다면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잠언의 이 말씀은 연약한 우리를 얼마나 위로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언 13:12).”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진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로 행하시기에 분명히 선한 이유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당신의 때에 반드시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하박국 2:3).” 이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28:16).” 우리가 다급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다급한 상황을 만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렵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들은 그런 일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십니다.
하지만, 지금 여전히 피곤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시인은 눈이 피곤하고 눈물이 마를 새가 없으며 슬픔으로 침침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의지하고 바라고 붙잡을 것은 주의 말씀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칼빈은 81-82절에 기록된 이 시인의 고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 내가 지쳐있습니다. 비록 내가 당한 재앙이 크다 해도, 그것들이 오래 지속되어 그 끝과 출구를 볼 수 없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당신의 지지와 도움을 받을 것을 언제나 바라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면서 지쳤나이다. 나를 언제 위로하시렵니까?” 시인은 주의 말씀 때문에 지친 것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 시인의 바람은 한 마디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것’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은 주의 말씀에 대한 이 시인의 바람과 기다림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로마서 4:18).”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 얻는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지각과 모든 상상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자신은 지치고 피곤하여 고갈되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시인은 자신의 믿음의 참됨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83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연기 속의 가죽 부대’로 묘사합니다. 연기 속에서 가죽 부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뜨거운 열기에 노출되어 검게 그을리고 수축되어 볼품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마치 욥이 시들어 창백하고 파리해졌고(욥 16:8) 살갗은 시커멓게 변해 몸에서 툭툭 떨어져 나가는 상태(욥 30:30), 고통으로 녹초가 되어 쇠약해진 모습을 연상하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고백합니다. “주의 율례들을 잊지 아니하나이다.” 연기 속의 가죽 부대처럼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그는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심연에서 성도가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심연에 들어간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고난 중에 있는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십니다. 찰스 브리지스는 이런 시인의 태도를 통해 이렇게 책망하며 도전합니다. “다윗보다 더 광범위한 성경으로 복을 받은 우리가 다윗이 누린 영적 지원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믿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겸손하게 성경을 연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고 단순하게 상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면 지원을 말씀 속에서 끌어낼 도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실로 두려운 책망이 아닙니까?
시인의 첫번째 질문이 “주께서 언제 나를 안위하실까”였다면(82) 두번째 질문이 나옵니다. “주의 종의 날이 얼마나 되나이까 나를 핍박하는 자들을 주께서 언제나 심판하시리이까(84)?” 하나님의 심판은 이중적 측면을 가집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들의 심판을 촉구하는 것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달라는 간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판에 대한 이 간구는 결국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간구, “나라가 임하시오며”와 같은 간구입니다(마 6:10).

3.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85-88)
이제 우리는 85-87절에서 시인을 박해하는 박해자들의 정체를 조금 더 보게 됩니다. 85절에 따르면, 그들은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는 교만한 자들’입니다. 그들의 첫번째 특성은 ‘주의 법을 따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모든 악함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들이 왜 그토록 악하여져서 시인을 해치려고 웅덩이를 팠습니까? 주의 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남(하나님의 사람들)을 해하려고 웅덩이를 파는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증오합니다. 사탄의 앞잡이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데 열을 올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호시탐탐 노립니다. 눈엣가시처럼 싫어하는 유일한 이는 참된 성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악에서 떠난 정직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참된 성도를 핍박하는데는 86절에서 말하는 대로,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성도이기 때문이고 그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기 때문이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그 속에서도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습니다. 왜 시인은 그토록 주의 말씀, 주의 계명에 목을 매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주의 모든 계명들은 신실하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단지 배운 대로 암송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가 이 고통 속에서도 주의 말씀을 기다리고 바라며 그 말씀을 놓지 않는 것은 그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서 알기 때문입니다. 주의 말씀은 죄인을 구원하는 능력이고 주의 말씀에는 성도들을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며 확실하고 변치 않는 반석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이들 앞에서, 주의 말씀을 기다리고 바라면서 그 말씀을 붙들고 죽음을 선택했던 믿음의 선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주의 말씀의 능력과 그 가치를 경험했고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브리지스는 말합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광대한 풍성함의 본질을 깨닫고 능력과 기쁨의 실재를 온전히 느끼기만 한다면, 그 보화를 빼앗기기 않으려고 교만한 자들의 악한 핍박 앞에 담대히 나아가 목숨마저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87절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그들이 나를 세상에서 거의 멸하였으나 나는 주의 법도들을 버리지 아니하였사오니.” 원수들은 성도가 소유한 모든 것과 심지어 그의 생명도 빼앗을 수 있지만, 성도들은 원수가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영원한 분깃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버릴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거의 죽게 되었다고 말하는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88). 이 절망적이고 어두운 시편의 내용 속에서 끝까지 시인이 붙드는 것은 주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주께서 자기를 살려 내시면 자기는 다시 주의 입의 교훈들을 지키겠노라고 말합니다. 시편 119편의 11번째 연은 주의 말씀을 기다리는 바람으로 시작하여, 주의 말씀을 지키고 싶은 시인의 마음으로 마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인의 고백이, 원수들이 핍박하는 고난의 한 가운데서 한 고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매일 영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얼마나 원수의 공격과 유혹이 심한지, 잠시라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달콤함의 맛을 놓쳐버리면 헛되고 거짓된 세상의 것들의 달콤함에 취하기가 너무 쉽지 않습니까? 매일 아침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새롭게 맛보아야만 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인이 기도한 내용입니다.

4. 교훈과 적용 (롬 10:2-3; 8:23)
여러분에게 오늘 이 본문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여러분과 깊이 만나는 접점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삶 속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위로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기도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 삶이 괜찮습니까? 그렇다면 저는 여러분의 영혼이 위험한 자리에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님의 위로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맛을 매일 새롭게 보지 않고서도 세상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법도에서 이탈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면 살수록 자기 의로 가득해지고 의로운 자들을 모해하는 길입니다. 본문에서 시인을 이유 없이 박해하는 원수들은 분명히 멀쩡한 사람들이고 심지어 자신이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과 교회 역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바울 사도는 당대의 스스로 경건하다고 여기는 유대인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그러나 이와는 다른 두번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의 위로를 기다리는 길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들은 자기 편이 필요하지, 주의 위로를 기다리고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필요로 한다면, 그 목적은 단지 자기 의를 확증 받기 위함 입니다. 그러나 설명할 수 없는 고난 속에 있는 영혼들은 주의 위로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시인은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소망을 놓지 않으며 자기 운명과 명예를 하나님의 말씀에 맡깁니다. 그 깊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시인은 주의 말씀이 신실하다고 고백합니다.
주의 말씀이 정말 신실합니까? 고난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붙잡을 만큼 주의 말씀은 믿을 만 하고 위로를 줍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12연(89-96절)이 대답할 것입니다. 11연이 시편 119편에서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본문이었다면, 시편 119편에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본문은 가장 어두운 밤에서 바로 이어지는 12연입니다.
성도가 고난 속에서 주의 위로를 기다리며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은, 사람이 줄 수 있는 위로의 한계를 알기 때문이고 결국 사람이 위로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는 성도의 삶에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언약의 말씀과 약속에 기대어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의 인생에서 고난은 현실입니다. 성도는 신음하고 탄식하며 몸의 구속의 날을 기다립니다(롬 8:23). 그리고 성도는 주의 말씀 안에 참된 위로가 있음을 압니다. 그래서 주의 말씀을 바라고 기다립니다.
우리가 찬송가 393장을 부를 텐데, 부르기 전에 그 후렴가사를 조금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말로 “날마다 자비를 베푸시며”라고 된 부분의 원래 가사는 이렇습니다. “아침마다 새로운 자비하심을 제가 봅니다(Morning by morning new mercies I see).” 우리로 하여금 기어이 이 고백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함께 찬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