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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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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강해 (3) - 두려움을 넘어 기쁨으로

하박국 3:1-19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8-04-06

말씀내용
1. 깊은 계곡 아래에서 높은 산봉우리로: 영적 진보가 어떻게 일어나는가?
2. 기쁨에 대한 만연한 오해
A. 예수믿고 복받아서 기뻐함이 아니다.
B. 물질/성공이 주는 기쁨이 아니다.
C. 그렇다고 이런 것과 정반대되는 기쁨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하박국의 이전 삶에도 이런 기쁨들이 있었을 것이다.
D. 그러나 이것이 다인가? 하박국의 신앙생활에서 경험했던 것이 전부인가?
E. 아니다. 이제 하박국은 새로운 차원의 신앙의 자리로 초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하는 주제, <두려움을 넘어 기쁨으로>라는 것이다.
3. 하박국의 기도(1~2)
3장은 성경에 나오는 가장 위대한 기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기도문이다. 하박국의 기도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A. 겸손
처음 1장에서 나온 하박국의 기도는 거의 불평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금 하박국이 하는 기도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이 이렇게 그의 기도의 태도를 변화시켰는가? 그것이 바로 2장에서 하나님이 하박국에게 말씀하신 대답 때문이다.
i. 유다와 바벨론에서 초점을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옮기고 있다.
1장에서 하박국은 온통 자기 마음을 유다의 타락한 상태 그리고 바벨론의 잔인하고 악함에 빼앗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은 하나님께 집중하고 있다. 그 하나님은 역사의 종국에는 영광의 나라를 완성하실 분이시고, 지금도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분이신 그 하나님이시다. 하박국은 유다의 상대적 선함과 바벨론의 상대적 악함의 차이라는 인간적 차원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한 번 본 후에는 그는 하나님의 의를 보았고 자기가 예배하는 영원하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했다. 그때 자기가 중요하게 여겼던 유다와 바벨론의 차이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다. 하박국은 자기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다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문제는 문제를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보려고 하지 않고 문제 자체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절대 신앙적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박국의 기도의 태도 변화는 절대적으로 그가 하나님을 뵈온 것에 기초한다. 그는 자기의 초점을 유다와 바벨론에서 하나님께로 돌렸다.

이제 하박국의 마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만 있을 뿐이다.

B. 경배와 경외
하박국은 ‘놀랐다’고 고백한다(2). 이 놀라움은 경외감을 의미한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명성을 다시 한 번 새기면서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다. 그의 기도는 예배가 되었다. 예배는 하나님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이 발생하였다.

우리도 그렇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일하심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고, 우리의 마음을 빼앗긴다면 우리의 기도 역시 예배와 경외함이 될 것이다.

C. 간구
드디어 하박국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한 간구가 되었다.
i. 나의 일에서 하나님의 일로 초점이 이동하였다.
나의 일, 나의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 ‘주의 일’이 주제가 되었다. 더 이상 하박국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다. 구원과 안락을 구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어달라고 씨름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가 하박국의 기도가 되었다.

ii. “고통 중에서라도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이 기도는 고통 중에서라도,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라는 간구이다. 하나님의 일이 제대로 성취되고 이루어질 수 있다면 우리가 고난을 당해도 상관이 없습니다라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제 선지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어떻게 해도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뿐이다. 이것이 여기서 선지자가 의미하는 부흥이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구하는 부흥이 얼마나 많은가?

부흥은 가장 암울한 때, 모든 소망이 다 끊어져버린 것 같을 때 주시는 은혜이다.
사 44:3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

iii. 환난이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진노 중에 긍휼’을 구한다.
하박국의 마지막 간구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달라는 것이었다. 설령 환난이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서도 우리는 교회로서 교회의 본연의 임무와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이다.

하박국의 기도는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삶의 태도를 의미하는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이다.

4. 과거와 미래의 교차(3~15)
A. 과거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3~15).
v.3 데만, 바란산은 남쪽에 있는 시내 반도와 접경에 있는 산맥을 가리킨다. 즉, 과거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십계명을 주셨던 산, 시내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박국은 과거 자기 백성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던 그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님께서 다시 자기 백성에게 처음과 같이 나타나시기 위하여 오신다고 하는 예언적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2절에서 기도했던 ‘부흥’인 것이다. 그러니, ‘그 영광이 하늘을 덮었고 그 찬송이 세계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는 데만과 바란산에 대한 해석에서 이 두 지명이 모두 광야 생활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서, 광야에서 함께 하사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그 하나님의 도래를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오심 앞에서 열국이 진동하며 떨 것이다.

5-6절에서는 애굽의 열 재앙에 대한 묘사를 하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이스라엘로 가나안까지 정복하게 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8-10절은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신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다.
11-12절은 여호수아가 기브온에서 아모리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에 해가 중천에 멈추었던 기적을 기억하는 것이다(수 10:14).

이 모든 일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들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박국은 지금 그의 기도 속에서 회상하고 있다. 그렇게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그는 회상하면서 이제도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하박국은 예언자적 과거형을 사용하면서, 그 미래의 확신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주는 열국을 밟으셨고(v.12), 악인의 집머리를 치셨고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다(v.13). 주는 그들 전사의 머리를 그들의 창으로 찌르셨고(v.14), 승리자로서 말을 타시고 바다의 파도를 밟으셨다(v.15).
13절에서 ‘기름받은 자’가 의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택하신 언약 백성 전체를 의미할 수 있다.
결국, 바벨론은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다(계11:15).
계 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5. 두려움에서 기쁨으로(16~19): 하박국의 개인적인 하나님
A. 두려움(16)
그런데 이 기도는 여전히 하박국의 두려움?전쟁과 심판에 대한?을 감소시키지 못한 것 같다. 이것이 16절의 고백이다. 하박국에게 중요한 것은 철학적이거나 역사적이거나 그런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냥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떨게 하는 평범한 한 사람임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의 두려움에 대한 이 고백을 다시 한 번 하는 것은 하박국 전체의 주제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두려움을 넘어 믿음으로!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라.

B. 믿음의 기쁨(17~18)
i. 17절. 인간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양식이 끊어진 것을 의미하고 징계와 저주의 극한 상태를 가리킨다. 인간적으로 생존의 조건이 모두 끊어진 상태이다.
ii. 18절. 여기에 비밀이 있다. 그는 생존의 조건이 만족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자기의 구원의 하나님, 거룩하신 자, 반석이신 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다. 그의 기쁨의 조건은 하나님 외에는 있을 수 없었다.
iii. 기쁨에 대한 오해를 넘어서 성경이 말하는 기쁨
1. 팔복(마5): ‘복이 있나니’?깊은 행복감의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 상황이 어떤 상황인가?
A. 심령이 가난해서 자기 홀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마음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채우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B. 우는 자가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를 얻었다.
C. 온유한 자는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누르는 자가 아니다. 그는 행복하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는 실로 땅을 얻는 사람이다.
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행복하다. 왜냐하면 자기의로 배부르지 않기에,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의를 받아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E. 긍휼히 여기는 자는 손해보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로 행복한 자이다. 그도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F. 마음이 청결한 자가 행복하다. 그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G. 화평케 하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그로써 하나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H.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불행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다. 하나님이 저에게 천국을 주시기 때문이다.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 당하고 거짓으로 사람들이 누명을 씌우고 악한 말을 할 때 그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에서 저희가 받을 상이 크기 때문이다.
2. 시편1편의 ‘복있는 사람’(1~2)
Oh, the joys of those who do not follow the advice of the wicked, or stand around with sinners, or join in with scoffers. But they delight in doing everything the Lord wants; day and night they think about his law.
3. 완전한 기쁨
“나는 어디에 완전한 기쁨이 있느냐고 물어온 레오 형제와 그분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완전한 기쁨은 여러가지를 아는데 있습니까?’라고 레오가 묻자 프랜시스는 이것을 부인했습니다. 레오가 다시 물었습니다.
‘선지자가 되어 하나님에 관한 모든 신비를 다 아는데 있습니까?’
프랜시스는 그 형제가 핵심을 찌르지 못했다는 표시로 말없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완전한 기쁨이겠군요.’
라고 다시 물었으나 여전히 대답은 ‘아니요’였습니다.
레오는 한참 생각한 후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기적까지도 일으킬 수 있는 성결함이 완전한 기쁨이겠군요.’
그러자 프랜시스가 대답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도 완전한 기쁨을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흠뻑 비에 젖고, 굶주린 배로 추위에 벌벌 떨면서, 거지나 부랑아처럼 문지기에게 조롱을 당하며 문밖으로 쫓겨난 성녀 마리아의 지경에 도달할 때에만 그런 기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쏟아지는 비를 진창 속에서 맞으며 수도원 담 밖으로 쫓겨나서 배고픔을 당하면서도, 이런 고통을 기쁨과 인내와 감사로 견디어낼 때에만 완전한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완전한 기쁨의 꽃이 자랄 수 있는 나무입니다.’”(119~120)

“나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뻐하기로 작정하고 춤을 추었습니다. 나는 정신이 완전한 백지 상태가 될 때까지 뱅글 뱅글 돌았습니다. 내가 두 뺨에 눈물을 줄줄 흘리며 침대 위에 나가 넘어졌을 때, 나의 온 몸은 땀에 젖어있었고, 이런 모습을 문에 있는 감시 구멍으로 들여다보던 간수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121).?리차드 범브란트

C. 어떻게 이런 믿음의 기쁨이 하박국의 가슴에서 고백될 수 있었는가?
i. 그에게는 깊은 슬픔과 정직한 고민이 있었다.
ii. 하나님께 그것을 가지고 나아갔다. 그리고 기다렸다.
iii.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하박국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iv.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견디겠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의 열쇠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배고픔이다. 주권적인 은혜와 최상의 기쁨을 일깨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과 배고픔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자유는 선과 악 사이를 절대적인 평형을 이루는 자율적인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영적으로 뚜렷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므로 하나님과 다른 대체 선택 대상 사이에서 결코 저울질하지 않는 것이다. 이상적인 자유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최상의 기쁨에 심취해 살며 선택을 초월한다.

D. 높은 봉우리 위로 뛰어 오르는 사슴처럼(18)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 말은 갈대아 사람들을 묘사한 두 구절의 표현과 대조를 이룬다. 1:11의 ‘그들은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은 자라’와 1:16의 ‘그물에 제사하며 초망 앞에 분향하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식물이 풍성케 됨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힘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나의 높은 곳’은 승리자의 서는 곳이며, 세상을 내려다 보는 위치이다. 세상의 역사 속에 살면서도 역사를 초월하여 내려다 보는 차원높은 세계관을 의미함이요, 또는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의 고통을 극복하는, 신앙의 높은 차원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