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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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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서신 강해 (39/최종) - 사귐과 기쁨

요한이서 1:12-13, 요한삼서 1:1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3-26

말씀내용
오늘 우리는 요한이서와 삼서의 마지막 인사에 해당하는 본문을 상고하려고 합니다. 오늘로써 총 39번에 걸친 요한서신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요한일서가 마지막 인사 없이 끝난 것과 달리, 요한이서와 삼서는 흡사한 내용의 인삿말로 마무리됩니다. 제가 이 두 서신의 짧은 마지막 인사를 본문을 상고하려고 하는 것은, 두 본문 안에는 세 편의 요한 서신의 핵심 주제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개략적으로 두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유사점
두 본문은 매우 흡사합니다. 이것은 당시 서간문에 익숙한 형식이기도 했지만, 두 본문의 유사점은 두 서신의 저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입증해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먼저 사도는 “너희에게 쓸 것이 많다”고 말합니다(요이 12, 요삼 13). 요한삼서는 가이오라는 개인에게 쓰여진 서신이기에 단수로 ‘네게’라고 썼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썼을 때도 이와 비슷한 표현을 했었습니다. 그 두 구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요 20:30).”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사도는 복음서를 쓸 때에도 써야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았습니다. 하지만 ‘종이와 먹으로’ 혹은 ‘먹과 붓으로’ 다 쓸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이 짧은 서신에서도 비록 자신이 쓰고 싶은 말은 많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 대면하여 말하고 싶은 심정을 피력합니다.
‘대면하여’ 말한다는 것이 두 인사말에 등장합니다. 요한이서에서는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라고 했고(요이 12), 요한삼서에서는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대면하여 말하리라”고 했습니다(요이 14). ‘대면한다’는 헬라어 표현은 직역하면 ‘얼굴과 얼굴로’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입니다. 사도의 이런 마음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저는 미국에 사는 아들과 카톡으로 문자로 소통하다가,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하고 싶어 화상통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아들이 허락할 때 말이지요. 어쩌면 사도의 마음이 이런 마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요한삼서 14절의 ‘속히’라는 말에서 가이오를 만나 얼굴을 보면서 그를 위로하고 싶어하는 사도의 마음을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또 하나, 다른 사람들의 안부를 전하는 것도 두 서신이 같습니다. 요한이서에서는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요이 13)”고 했고, 요한삼서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요삼 15)”고 썼습니다. 이미 살펴본대로, 요한이서의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은 1절과 같이 교회 곧 사도가 지금 속해있는 공동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에서는 특별히 가이오에게 평강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은 가이오의 형편이 매우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 친구’가 가이오에게 문안한다고 했는데 이들은 아마 가이오를 알고 있거나 가이오를 위해 기도하는 형제들일 것입니다. 또한 사도는 가이오와 함께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도 한 사람 한 사람 문안해주길 부탁합니다.

사도의 간절한 바램, 기쁨을 충만하게 (요이 12)
이제 우리가 주목하려고 하는 요한이 12절 하반절로 가겠습니다.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하는 말은 편지로만이 아니라 너희를 직접 만나 대면하여 교제함으로써 그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미 요한일서를 시작하면서, 자신이 왜 이 편지를 쓰는지 그 목적을 밝혔었습니다. 다시 보지요. 요한일서 1:3~4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는 요한일서를 쓰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사귐이라고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 사귐을 위해, 자신이 사도로서 보고 들은 바를 이 서신을 통해 쓴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편지를 쓰는 대상인 형제들과의 사귐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4절 하반절에서 다시 말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가 ‘우리의 기쁨’이라고 할 때 이것은 요한이서에서 쓴, ‘너희 기쁨’과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사귐이 가져오는 기쁨이며, 사귐이 가져오는 기쁨은 어떤 한 편만의 기쁨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이서의 어떤 사본에는 ‘우리 기쁨’이라고 되어 있다는 것을 개역개정역은 각주에 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요한일서를 쓴 목적은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요한이서에서도 이것을 말합니다. 또 요함삼서에서는 이것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랑하는 가이오를 속히 만나 보기를 바라는 사도의 마음에서 편지의 목적을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형제들과의 사귐에서 오는 기쁨을 충만하게 누리고 싶어하고, 동시에 사도와 교제를 누리는 모든 형제들이 비록 삶의 형편은 녹녹치 않고 복잡하지만 이 기쁨을 충만히 누림으로써 믿음으로 모든 상황을 넉넉히 이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질 질문이 있습니다. 사도는 도대체 왜 이토록 기쁨을 원하는 것일까요? 사도와 우리 자신을 한 번 비교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사도가 갈망한 기쁨을 원하십니까? 사도가 원했던 것만큼 그것을 원하십니까? 그 기쁨을 얻기 위해 여러분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갈망하십니까? 도대체 이 사귐의 기쁨이 무엇이길래, 사도는 이토록 기쁨을 원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요?

기쁨의 본질
먼저 사도가 말하는 기쁨의 본질을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기쁨이 과연 우리가 알고 있고 우리가 바라는 그런 기쁨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1:4에서 사도는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은 사도가 말씀하는 사귐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이 사귐은 단지 마음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밥 먹는게 아닙니다. 사귐의 본질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안 계시다면, 아무리 즐겁고 유쾌해도, 설령 교회 안의 모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영적 사귐이 아닙니다.
사귐의 본질에 대한 사도의 설명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그 밤에 성부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영생은 단순히 삶의 시간이 무한정 늘어나는 개념이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질로 설명됩니다. 즉, 영생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이 의미는 시편 133편에서 잘 드러납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이 시편에서 제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복이 ‘영생’인가? 다른 개념들이 얼마든지 여기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이 시편은 하나님께서 형제들의 연합과 동거의 사귐을 기뻐하셔서 축복하셨는데 그 축복의 본질이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시편의 의미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3에서 기도하실 때 영생을 정의하신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사귀는 삶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형제들과의 더불어 사귀는 삶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요한일서를 시작하면서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는 말로 이것을 표현했습니다(요일 1:4).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기쁨의 본질은 성도의 영적 사귐에서 나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사귐
이제 잠시 우리 눈을 우리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어떻게 존재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외로우셨다거나 심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성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으로 계시다는 것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신격의 통일성 안에 동일한 본질과 능력과 영원성을 가진 세분,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2.3).”
어떤 학자는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영원토록 서로를 영화롭게 하시는 관계로 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표현하신 그대로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1,5).” 성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어떤 이견도, 틈도 존재할 수도 없었고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잠언 8:30~31에서는 이 말씀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영화롭게 하는 것은 그를 참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성 삼위 하나님의 사귐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사귐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후서 13:13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사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령님은 사귐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교제는 그 원형을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교제, 즉 성령의 교제에서 발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는 그 사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넘치는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 삼위 하나님 외의 존재에게 그 기쁨을 흘려보내주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동력은 기쁨의 흘러넘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삼위 하나님의 사귐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창조의 시점으로 가보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으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시고 하와를 만들어주심으로써, 인간을 공동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귐의 공동체로 거하시듯이, 인간을 그렇게 창조해주신 것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의 사귐의 기쁨을 인간들이 누리게 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인간이 누리는 모든 사귐을 깨뜨렸습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과의 사귐이 끊어졌다는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숨는 아담의 모습에서 보여줍니다(창 3:8~10).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귐도 깨어졌다는 것을 우리는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모습과(창 3:12)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주신 말씀에서(창 3:16)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친밀한 부부관계가 무너졌고 이어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에서는 형제관계도 무너졌습니다. 기쁨을 주어야 할 사귐이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긴 세월이 지나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 죄로 말미암아 무너진 관계?하나님과,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를 회복하시는 일을 세상 안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며, 원수되었고 소외된 관계에 있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회복된 형제사랑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표라고 제시를 했습니다. 요한이서와 삼서도 그런 견지에서 쓰여졌습니다. 구원은 사귐의 회복이고, 영생은 그 사귐을 누리는 삶입니다.

사귐과 기쁨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귐과 기쁨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라는 질문에 대답할 차례입니다. 사도 요한이 사귐의 기쁨이 충만하기를 그토록 갈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앞에서 살펴본대로, 성 삼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동기가 성 삼위 하나님 안에서 누리시는 사귐의 넘치고 충만한 기쁨이었다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사귐의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 이 사귐의 기쁨이 충만해진다면 이 기쁨은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감당할 진정한 힘이고 연료이며 동력이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형제의 사귐이 깊어지고 충만해지면 거기서 기쁨이 흘러나올 것이고, 이 기쁨은 다시 교회의 동력과 연료가 될 것입니다. 이 사귐의 기쁨은 교회가 가진 은행잔고 보다 값지고, 영향력 있는 어떤 개개인 그리스도들의 존재 보다 더 영향력이 있고, 전도의 어떤 장애물도 넘어갈 수 있는 힘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마치면서 ‘성령의 교제’가 그들 모두와 함께 하기를 축복했던 의도일 것입니다. 저는 벧샬롬교회의 목사로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복음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교제가 깊어지고 넓어져서 그 사귐의 기쁨이 온 교회에 충만하게 하옵소서!”

교흔과 적용
이런 논지에 근거해서 오늘날 우리 자신의 삶을 비추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기쁨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일이 드문 것일까요? 때로는 우리가 어떤 가족이나 공동체를 방문할 때, 그들의 얼굴 모습에서 얻게 되는 인상이나 분위기가 있습니다. 언제나 정확할 수는 없더라도, 대개 그 인상을 통해서 우리는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을 어떤 목사님은 ‘밝지 않다’로 말하면서, 어떤 한국교회를 방문했을 때, 사람들이 밝게 인사하는 걸 보고 “미국교회같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서신강해의 마지막 설교를 마치면서 아주 실제적인 두 가지 적용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형제의 사귐에 헌신하십시오.
먼저 여러분이 정말 신앙생활을 잘 하시려고 하신다면, 형제 사귐에 헌신하시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도록 되어있지 않습니다. 며칠 전 서울의 한 신학교 사경회에서 말씀을 전한 유명 목사님께서 “성경은 개인주의를 지향한다”고 말씀을 하셔서 문제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요한서신에서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란 무엇입니까? 교회가 단순히 주일에 한 번 나와 예배를 드리거나 설교를 듣는 자리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사귐입니다. 교회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토록 갈망했던 그 사귐, 성령의 교제를 회복해야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귐의 기쁨을 충만하게 누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금은보화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귐에 헌신하십시오. 교회의 장년 코이노니아 그룹은 곧 개편을 앞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사귐이 코이노니아라는 작은 그룹에 제한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 주일에는 교회 주소록을 업데이트하여 나눠드릴 것입니다. 연락하시고 만나십시오. 두 세 사람의 사귐을 가지십시오. 이 일에 시간과 물질을 드리십시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사귐의 영을 충만히 경험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

개인기도 보다 인사와 사귐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두번째 적용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예배당에 들어오시면 무엇을 제일 먼저 하시고 또 계속하십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예배당에 가면 조용히 기도하면서 예배를 준비하라고 배웠습니다. 오래 믿은 분들에게는 아마 이런 개념이 우리에게 뿌리깊게 박혀 있을 것입니다. 자기 옆에 와서 앉는 사람이 아니면, 거의 인사할 틈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번 바꿔 보십시오. 예배가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서 오는게 아니라, 한 30분 일찍 오셔서 짧게 기도한 후에는, 두리번거리면서 처음 보는 사람, 오래 보았지만 이름을 모르거나 말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웃으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말을 나눠보십시오. 저는 교회당 안에서 예배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짧은 서신에서 몇 절의 인사를 한 것처럼, 인사가 풍성한 교회, 사귐이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개인적인 기도는 매일 혼자만의 시간에 하시면 됩니다. 주일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사귐을 갖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때로는 개인기도보다 인사와 사귐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예배를 마쳤을 때에도, 두리번 거리면서 처음 오셨거나 방문하신 분들을 확인하고 다가가 인사를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점심도 함께 드십시오. 처음 오신 분 앞에 줄을 서서 자신을 소개하고 환영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필시 그 교회는 밝은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귐은 보다 풍성해지고 깊어지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충만해지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벧샬롬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귐에 헌신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세우는 복된 은혜 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