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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삼서 강해 (1) -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

요한삼서 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3-19

말씀내용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가?
요한삼서는 요한이서와 마찬가지로, 순회교사들이 교회를 방문하여 가르치던 상황을 배경으로 쓰여진 서신입니다. 하지만 요한이서가 주목하는 영지주의 이단의 문제와 조금 다르게 접근을 합니다. 요한삼서는 두 인물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대조시키고 비교함으로써 그리고 서신의 수신자인 가이오의 신앙의 됨됨이를 함께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 사람의 신앙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가진 직분이 그 사람의 신앙을 보증합니까? 또는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 신앙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열매를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열매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까?

요한삼서의 저자와 수신자
저자는 자신을 ‘장로’라고 밝힙니다(1). 우리가 요한이서에서 살펴보았듯이, 장로는 사도 요한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요한삼서라고 불립니다. 요한삼서는 앞의 두 서신과 달리, 한 개인에게 보내진 편지라는 점에서 바울 사도의 빌레몬서와 같습니다. 요한삼서의 수신자는 가이오입니다. 가이오는 당시에 아주 흔한 로마식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도 몇 사람의 가이오가 나오지만 그 어떤 사람도 이 서신의 수신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를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이오에 대한 정보를 요한삼서 안에서 찾는 것이 좋습니다. 가이오가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본문을 살피면서 가이오와 함께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라는 인물들에 관해서도 알아 가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 인물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가이오(1~8)
먼저 편지의 수신인인 가이오에 대한 내용을 우리는 1~8절에서 봅니다. 사도는 단순히 가이오의 이름을 쓰는 대신,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고 씁니다. 사도는 가이오를 향한 자신의 특별한 애정을 표현합니다. 그는 또 이 짧은 서신에서 세 번이나 가이오를 “사랑하는 자여”라고 부릅니다(2,5,11). 이 개인적인 서신은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편지입니다. 이 사랑은 그저 감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끈으로 묶여있는 사랑입니다. 사도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라고 쓸 때, ‘참으로’라는 말을 풀면, ‘진리 안에서’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한이서 1절에서 설명드린대로, 관사가 없으면 ‘참으로’라는 부사절로 이해할 수 있지만, 한편 이 표현은 사도 요한과 가이오를 사랑으로 묶어주는 요소는 진리라는 뉘앙스를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은 결코 진리를 떠난 사랑이 아니며 그 진리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고 사랑하게 하는 끈이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가이오를 향해 이런 특별한 애정을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가이오가 지금 교회에서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가이오는 교회의 세력을 잡고 있는 디오드레베에 맞서 진리의 편에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을 아는 사도는 가이오를 격려하려는 것입니다.
사도는 가이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를 위한 기도로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2).” 이것은 번영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겨 읽는 구절이지만 사실 번영신학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사도는 단순히 자기가 사랑하는 가이오의 영혼과 육신이 모두 강건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사도가 가이오의 영혼 보다 육신을 위해서 간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가이오의 영혼이 이미 좋은 상태임을 아는 사도는 그의 육신도 강건하길 바라며 범사가 잘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기도의 내용은, 가이오의 건강이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위장 때문에 고생하던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는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쓴 것과 비슷합니다(딤전 5:23). 본문은 영혼은 귀하고 육신은 악하다는 식의 이원론을 전혀 지지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사람(3~4)
사도는 형제들을 통해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3). 요한이서에서도 주의 자녀들이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 심히 기쁘다고 썼던(요이 1:4) 사도는 여기서 다시 말합니다.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3b~4).” 가이오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소식을 전해준 형제들은 아마 가이오가 속해있던 교회에 사도의 이전 편지를 전달했던 사람들일 것입니다. 9절에서 사도는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라고 말하는 이 편지는 요한이서가 아니라 유실된 편지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편지가 교회에 전달되었을 때, 교회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는 디오드레베였습니다. 그는 사도의 편지를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이 9절에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라는 말의 의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소수에 속했을 가이오는 진리의 편에 서서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디오드레베에게 맞섰기 때문에 핍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이오는 자신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라고 믿는대로 순종하여 행했습니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그리고 가이오는 자신의 신앙과 고백에 합당한 태도를 보여주고 그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참된 신앙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은 고백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삶입니다. 형제들은 가이오 안에 있는 진리를 사도에게 증언해 주었습니다. 가이오는 진리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의 사람(5~8)
형제들의 증언은 중요합니다. 사도는 6절에서 다시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가이오의 두번째 특징은 그가 사랑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가이오의 어떤 모습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그 내용이 5~6절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가이오는 형제 곧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7절은 사도가 말하는 ‘형제 곧 나그네’는 주로 순회교사들이거나 순회전도자들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7).
손대접은 초대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이오는 이점에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오가 형제 곧 나그네된 자들을 환대한 일을 가리켜 사도는 ‘신실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실한 일은 진리와 사랑에 기초하여 행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이오의 행위는 그저 한 두 번 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가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이오가 순회교사와 전도자들을 환대하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7~8).” 사도가 볼 때 순회교사와 전도자들을 영접하여 환대하는 것은 잘 하는 일일 뿐 아니라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지금 사도가 순회교사 보다 순회 복음전도자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이방인에게 보냄을 받은 자들이었고,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요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교회가 이들을 책임져 주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교회가 이들을 영접하고 합당하게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전도자들이 교회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 9:14).” 교회가 이런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보내줌으로써, 교회는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로 자신을 입증하게 됩니다(8). 교회가 진리를 위해 일하는 자라고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전송함으로써 교회는 자신을 진리를 위한 존재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요한이서와 비교해보십시오. 요한이서에서 사도는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오는 거짓교사들을 분별하여 사랑으로 환대하라고 말했습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별하여 환대하라는 말은 자칫 사람들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삼서에서 사도는 참된 복음전도자들을 환대하고 전송할 것을 격려합니다.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것이 복음전도자와 선교사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간단하게 이 말씀을 적용해본다면, 주로 선교사님들을 영접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들을 환대해야 하고 전송해야 합니다. 전송한다는 말은 ‘파송한다’는 말도 됩니다. 물론 참된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선교사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디오드레베(9~10)
두번째로 우리가 살펴볼 인물은 디오드레베입니다. 사도는 그 인물을 한 마디로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9)!” 그는 사도가 먼저 보냈던 편지를 거절함으로써 사도 자신을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권을 장악하고 사도 요한을 비방하였습니다(10). 사도는 디오드레베에 관한 소식도 이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온 형제들을 통해서 들었을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초대교회를 괴롭히던 영지주의 이단의 괴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다만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개인적 야망은 초대교회에서는 하나의 실패로 간주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 9:35).” 디오드레베는 교회 안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을 것입니다. 한편 그와 맞서 진리의 편에 선 가이오와 소수의 성도들은 디오드레베의 세력으로부터 박해와 곤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디오드레베가 한 일을 네 가지로 정리합니다.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10).” 첫째는 그가 악한 말로 사도와 사도에게 속한 사람들을 비방한 일입니다. 둘째는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않은 일입니다. 가이오는 순회전도자들을 환대하였으나 디오드레베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맞아들였다는 표현은 교회가 공적으로 그들이 말씀을 전하도록 영접했다는 의미보다, 개인적으로 그들을 자신들의 집으로 영접했다는 의미가 더 강해보입니다. 세번째로 디오드레베는 순회전도자들을 환대하는 성도들이 그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자기가 안 할 뿐 아니라 남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디오드레베는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이들을 영접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내쫓았습니다. 여기에 가이오가 당한 어려움이 충분히 암시됩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를 망치고 허무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디오드레베 때문에 그 본질과 하나됨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모든 시대의 교회에는 디오드레베처럼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교회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실,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신의 동기로써 자기 신앙의 거짓됨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는 디오드레베가 ‘행한 일’을 잊지 않고 가서 심판하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행한 일’, 그리고 디오드레베가 한 네 가지 일 모두에서 동사는 현재시제로 쓰였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가 한 일은 한 두 번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울 사도가 ‘매를 가지고 나아가랴’고 말했던 것과 비슷한 경고를 하는 셈입니다(고전 4:21).
디오드레베는 교회의 직분을 가졌고, 영향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였지만, 신앙은 없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한 마디 평가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동기를 가진 사람은 결국 교회를 허무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메드리오(11~12)
사도는 다시 한 번 가이오를 향해 ‘사랑하는 자’라고 부르면서, 디오드레베와 같이 악한 것을 행하는 자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11). 디오드레베와 같은 자는 하나님을 뵐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비록 디오드레베가 영지주의 이단의 교리를 믿고 가르치는 자가 아닌 정상적인 교회의 지도자였음에도 말입니다. 이것은 정통교리를 믿고 가르친다고 말하는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성향’을 향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제 사도는 세 번째 인물을 소개합니다. 그는 데메드리오입니다(12). 많은 성경학자는 데메드리오가 유실된 앞의 편지와(9) 요한삼서를 전달해준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데메드리오는 그리스 여신 데메트르(Demeter)에서 온 이름으로서, 그가 이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임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더욱 데메드리오가 교리적으로나 삶에서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공적으로 증명해줄 필요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사도는 데메드리오가 삼중의 증거를 받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먼저 뭇 사람의 증거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도가 뭇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가리켜 하는 말입니다. 디오드레베와 그에게 속한 자들은 결코 데메드리오를 칭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눅 6:26).” 두번째로 그는 진리의 증거를 받는 자입니다. 이 말은 그의 삶이 그리스도의 진리에 부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데메드리오의 모든 행동은 진리를 빛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삶입니다(딛 2:10). 데메드리오에 대한 세번째 증거는 사도 자신의 증거입니다. 사도는 “우리도 증언하노니…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데메드리오는 삼중의 증거를 통해 그 선함과 참됨을 증명합니다.

온전한 신자의 영적 특징: 진리와 사랑
사도는 가이오에게 편지를 쓰면서, 두 사람 디오드레베와 데메드리오를 대조시킴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믿음과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성품과 신앙이 함께 가는 것입니다. 디오드레베는 자기가 으뜸이 되려고 하는 동기와 그 악한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이 거짓임을 드러냅니다. 반면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성도)의 증거와 진리의 증거 그리고 사도의 증거를 통하여 신앙의 참됨과 삶의 온전함을 드러냅니다. 비록 데메드리오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그것은 이미 사도가 가이오에게서 보고 증거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와 사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3~4절에서 가이오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로 사도의 기쁨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어 5~8절에서는 가이오가 순회전도자들을 영접하고 전송함으로써 그의 사랑을 증거했다고 합니다. 진리와 사랑, 사랑과 진리는 한 사람의 신자 안에서 분리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사랑 안에서 표현되고 사랑은 진리 안에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이런 성품과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품과 분리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님을 디오드레베가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앞에 두 길이 놓여있습니다. 악한 것을 본받는 길 그리고 선한 것을 본받는 길입니다. 하나는 디오드레베가 걸었던 길이고 또 하나는 데메드리오가 간 길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교회를 허무는 인생이었고 데메드리오는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길에 서 있습니까? 어떤 인생을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사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데메드리오가 걸었던 길, 선한 일을 본받는 길을 걷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