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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강해 (1) - 사랑과 진리

요한이서 1: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3-05

말씀내용
1. 초대교회의 정황과 문제
사도 요한의 서신들이 쓰여지던 당시의 교회가 경험하게 된 위기는 소위 순회교사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별하고 접대하며 가르침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 2세기까지 교회는 주로 순회교사들의 가르침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이런 순회교사들을 잘 접대하고 그들을 다음 행선지로 가도록 후원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롬 15:24 참조).
특별히 1세기를 지나고 2세기를 향할 무렵이 되자, 사도들은 이미 다 죽었고 생존한 사도는 요한 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도들의 천거서를 통해서 순회교사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점점 그런 확실한 증명서도 요구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복음을 전합답시고 돌아다니면서 교회와 성도들의 돈을 탈취하는 소위 그리스도 장사꾼(Christemporos)이라고 불리는 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순회교사들을 잘 분별하여 대하는 것은 초대교회에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요한이서와 요한삼서에는 이런 초대교회의 정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요한이서와 삼서는 그 기준을 토대 위에서 적용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2. 발신자와 수신자(1)
1절은 이 편지의 발신인과 수신인이 편지의 형식 속에 담고 있습니다. 만일 정확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사람의 이름을 썼다면 문제가 없었겠습니다마는, 이 구절만으로는 몇 가지 밝혀야만 할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발신인을 보면, ‘장로인 나는’이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장로’라는 말은 본래 존경받는 연로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초대교회의 중요한 직분의 명칭이기도 했습니다. 이 ‘장로’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은 설명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장로가 사도 요한임을 부인하는 설명들도 있지만, 초대교회로부터 요한이서를 쓴 장로가 사도 요한이라는 것은 거의 의심 없이 받아들여져왔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사도가 왜 자신을 장로라고 쓰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교회의 감독과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말함과 동시에 자신을 이제 교회의 지도자들로 세워진 장로들과 의도적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썼다는 것입니다. 키스트매커(Simon Kistemaker)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이서와 삼서에서 사도성은 이슈가 아니다. 그의 독자들은 그(저자)가 사도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1세기 말에 사람들은 요한이 마지막 생존하는 사도라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한은 영예로운 장로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즉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쓸 때, 독자들은 이 ‘장로’가 사도 요한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굳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라거나 기타 다른 용어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편지의 수신자입니다. 1절은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에게 편지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부녀’가 누구냐 하는 문제는 앞에서 살펴본 ‘장로’가 누구냐를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먼저 ‘택하심을 받은 부녀’는 초대교회의 한 여인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부녀’를 의미하는 헬라어 ‘키리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키리오스’의 여성형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 서신의 수신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더더욱 교회의 성격을 보여주는 ‘택함받은’이라는 말은 이 해석을 지지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요한이서의 내용이 공동체와 공동체의 문제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서신이 한 개인 보다는 교회에 보내진 서신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 이 서신에서 종종 2인칭 복수 대명사가 사용된 것도 요한이서가 교회를 향해 쓰여진 서신이라는 견해를 지지하는 증거입니다(6,8,10,12).
그렇다면 굳이 왜 사도는 이런 은유적 방식으로 발신자와 수신자를 표현했을까요? 그 이유는 요한계시록을 쓸 때의 이유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정권 하에서 기독교 서신의 발신인이나 수신인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것은 혹시라도 후일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편지를 쓰는 자신이나 받는 사람들을 은유적으로 표기한 것 같습니다.

3. 진리 때문에 사랑한다(1하~2)
1절 하반절과 2절에서 사도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 ‘택함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을 좀 더 설명합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택함받은 부녀와 그 자녀들을 교회로 보는 견지에서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사도는 교회를 ‘참으로 사랑한다’ 고 말합니다. 여기서 ‘참으로 사랑한다’ 는 말은 ‘진리 안에서 사랑한다’는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지만, ‘진리’ 라는 말에 정관사가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사적 의미로 ‘참으로 사랑한다’ 고 읽는 것입니다.

A. 성도는 진리를 아는 사람이다.
교회는 사도가 참으로 사랑하는 대상일 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 가 참으로 사랑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는 누구입니까? 사도는 특별히 많은 거짓 순회교사들과 이단들을 의식하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로써 사도는 자신과 교회가 진리를 향한 사랑이 없는 이단들과는 차별화된 존재라는 것을 밝힙니다. 교회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 입니다. 이들이 참된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런 견지에서 오늘날의 교인들을 가리켜 말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사도는 참 성도들은 교회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것은 요한일서에서 사도가 죽 말해왔던 것이 아닙니까? 형제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임을 입증합니다. 형제는 형제를 알아봅니다. 그 하나의 특징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리를 아는 ‘모든’ 자라고 말합니다.

B. 진리는 복음의 내용이자 하나님 자신이시다(요일 1:8; 3:19)
자, 이제 우리는 진리를 설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진리입니다. 사도가 진리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추상적 개념이거나 이론적 지식이 아닙니다. 물론 진리는 기독교 복음의 내용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도에게 있어서 진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자신과 기독교적 선포를 통해 하나님의 실재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요일 1:8; 2:21; 3:19; 5:20).
사도는 2절에서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는 인격적인 요소를 가집니다. 진리의 성령 그리고 그 성령을 통하여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요 15:4~5).
그러므로 본문에서 진리는 그 자체로는 복음의 내용을 가리키면서도 그것을 넘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리를 알아야 하고(요일 2:21)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합니다(요일 5:20; 요 14:6). 진리는 성도 안에 지금도 거하고, 또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할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서로 사랑도 진리가 성도를 떠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C. 진리와 사랑은 함께 간다
사랑이 진리와 함께 갑니다. 사랑이 진리에 의해서, 그리고 진리 때문에 가능합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가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들’인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오직 ‘진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진리 때문에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어떤 끌림의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 우리의 형제 사랑은 나와 비슷한 기질이나 성향을 가졌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성도의 형제 사랑은 오직 진리 때문에 가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3절에서 문안을 하면서,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합니다(3). 본문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사랑이라는 단어와 함께 짝을 이루어 쓰여지는 점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1절에 ‘참으로 사랑하는 자’, 2절에 ‘(사랑하는 것은) 진리로 말미암음이로다’, 3절에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4절에 ‘진리를 행하는 자를 보니 심히 기쁘도다’, 6절에 ‘사랑은..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라는 구절들입니다. 말하자면 진리는 형제 사랑의 범주이고 바운더리(boundary)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사랑은 이단의 거짓된 교리에 대항하여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형제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D. 진리와 사랑을 분리하려는 경향
진리는 기독교의 형제 사랑의 기초일 뿐 아니라 동기이며 연료이고 정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언제나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진리와 사랑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과 말씀을 분리시키려는 시도와 맥을 같이 합니다. 성령 없는 말씀은 문자일 뿐입니다. 말씀 없는 성령은 근거 없는 신비주의일 뿐입니다. 말씀과 성령, 성령과 말씀은 언제나 함께 가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곧 말씀의 충만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슴과 지성을, 또 체험과 교리를 분리시키려는 모든 경향은 사실 성경의 지지를 얻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점에서 매우 균형을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것처럼, 사랑과 진리, 진리와 사랑은 결코 나누일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의 말처럼, 교회는 진리 안에서 피차 사랑하고 또한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4. 사도의 기쁨(4)
4절에서 사도는 자신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의해서 흔들려서 그들에게로 갔지만, 여전히 일부 사람들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을 보는 사도의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조금 전에 성도는 진리를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사도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도는 진리를 알 뿐 아니라, 그 진리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아는 것에서 진리를 행하는데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4절에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요한일서 3:23을 참고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무엇이 일관되게 나타납니까? 진리를 믿는 것, 서로 사랑하는 것, 진리와 사랑이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입니다. 사도는 교인들이 진리를 붙잡고 서로 사랑함으로 행하는 모습을 볼 때 심히 기쁘다고 말합니다.
본문은 신앙이 가지는 윤리적 성격을 보여줍니다. 보통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교회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약점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배우는데 열심을 내지만 정작 그 진리를 따라서 살아가는 면에서 현저하게 약한 것입니다. 앉아서는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일어서면 신앙의 힘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사도는 진리를 열심히 배우는 사람들을 보면서 심히 기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심히 기쁘다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 기쁨은 또한 하나님의 기쁨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5. 사랑은 그 계명을 행하는 것이다(5~6).
사도는 명령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구한다’고 말합니다(5). 그는 서로 사랑하자고 권합니다. 사도가 지금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는 것은 결코 처음 들어보는 계명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에서 이미 가르치고 있는 옛 계명입니다. 다만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완전하고도 극적으로 보이심으로써 제자들에게 형제 사랑의 새로운 차원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새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형제 사랑은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서로 사랑은 세상으로 하여금 이들이 십자가에서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시고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표가 될 것입니다.
사도는 6절에서 말합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오늘 본문 4~6절에는 계명이라는 말이 4번 나오는데 오직 여기에서만 복수로 나옵니다.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들)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 계명을 복수로 쓴 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의 핵심이 사랑하라는 것이며 많은 계명들은 사랑하라는 계명을 풀어서 쓴 것들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서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도 ‘그 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씀은 영어성경 NIV나 RSV가 번역했듯이 사랑 안에서 행하라는 의미라고 보아야 합니다.

6. 우리의 사랑은 진리로 말미암고 있는가?
사도는 요한이서로 알려진 이 편지에서 사랑과 진리, 진리와 사랑이 결코 별개로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진리가 감소하면 사랑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사랑이 미약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진리의 미약함을 드러내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비추어봅시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까? 사랑한다면 그것은 출신 학교가 같거나 수준이 같거나 고향이 같거나 기질이 같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진리 때문입니까? 그 사람 안에 진리가 거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사랑합니까? 그 사람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를 사랑합니까?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의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교회는 모인 구성원들의 기질과 성격과 배경이 달라도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진리를 알고 진리를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모든 차이들을 능가할 만큼 큰 것입니까? 복음의 진리는 그렇게 여러분에게 큰 것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를 향해서 사도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축복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 뿐 아니라 행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사랑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하는 것이기에 사랑 안에서 행하는 사람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교회에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함께 있을 것이라고 교회를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