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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5) - 세 가지 지식과 우상 제거

요한일서 5:18-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2-26

말씀내용
1. 양보할 수 없는 단호한 주장
우리는 어려서부터 양보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웁니다. 인생은 혼자 사는게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에 양보는 미덕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을 양보하면서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일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요한일서를 지금까지 살펴보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혼자 사는게 아니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들어왔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우리의 형제들과의 사귐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신념을 가진 삶과는 다릅니다. 신앙은 그저 관념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귐의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에 양보가 없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일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사도가 단호하게 양보할 수 없는 결론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봅니다. 사도는 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이 있다고 말합니다. 양보를 잘 하는 사람은 때때로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처럼 오해를 받곤 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점에서 손해를 보고 양보를 할 수 있지만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주장을 할 때가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 그리스도인이 단호하게 양보할 수 없는 주장은 세 가지이고 각각에는 ‘안다’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첫째는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로 19절에 신자는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이고, 셋째로 20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양보할 수 없는 지식에 대한 주장입니다.

2. 그리스도인이 가진 세 가지 지식
14~17절에서 신자가 기도 안에서 가지는 담대함을 말한 사도는 18~20절에서 신자가 가지는 영적 지식의 담대함을 말함으로써 서신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권면이 21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가. 그리스도인은 범죄하지 않는다(18).
먼저 그리스도인이 양보할 수 없는 세 가지 지식 중 첫번째를 보겠습니다. 18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그리스도인은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가 주장하는 첫번째 주장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처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미 3:6,9에서 썼던 내용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미 살폈듯이, 사도는 신자가 죄를 전혀 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아무도 죄 가운데 둥지를 틀고 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자는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 살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의 설명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 즉 하나님의 자녀와 죄는 어울리지 않는 짝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때때로 죄를 만나지만, 죄와 화목하게 살 수 없다.” 그러니까 이 구절이 말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죄라기 보다 계속 진행중인 상태를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이렇게 강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당시 교회를 어지럽히던 이단들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거나(요일1:8) 죄를 완전히 무시하던 경향(요일1:6)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유사한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 γεγεννημ?νο? ?κ το? θεο?) 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 γεννηθε?? ?κ το? θεο?)라는 표현입니다. 이 두 말은 다만 시제에만 차이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완료형으로, 그 태어남의 결과가 지속적임을 함축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하나님의 자녀는 일시적인 변화가 아니라 영구적인 특권과 신분을 얻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시제만 부정과거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역사 속의 한 사건으로써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킵니다. 이런 근거에서 후자는 예수님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말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라고 번역한 것은 이가 예수님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전제로 헬라어에 없는 ’경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개역개정역에는 ‘나신 자’에 각주 1이 있고 거기에 ‘난 자가 자기를 지키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를 예수님이 아닌 신자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18절의 내용은 크게 달라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신자 자신?가 자기를 지키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는 뜻이 됩니다. 고대 사본들에는 이 두 가지 본문이 다 나오는데, 어떤 것이 사도가 원래 썼던 요한일서의 원문에 더 가까운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는 본문의 문맥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성도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말씀하는 것은 성도의 견인 교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물론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안전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는 우리 말 번역 그대로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많은 내용과도 합치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 성도가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않고, 또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 않는 것은 성도 자신이 자기를 잘 지키기 때문이라기 보다 주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성도를 만지지도 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만진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는 ‘해친다’는 뉘앙스를 전달합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우되 절망감이나 패배감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확신을 가지고 싸울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탄 보다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너무나 완전해서 비록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시험과 시련, 낙심과 비참을 경험할 수는 있지만, 사탄의 수중에 빠져들어가 그와 함께 죄를 먹고 사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는 이것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의미에서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 회중 가운데 거듭난 여러분은, 여러분이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으며,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에 결코 사탄이 여러분을 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다(19).
두번째로 사도가 단언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진 지식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전존재가 이제와 영원히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사도는 18절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3인칭 단수로 표현한 것을 19절에서는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로 표현함으로써, 사도를 포함하여 모든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일부 신앙이 성숙한 신자들만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다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신자인 ‘우리’와 구별하여 ‘세상’을 언급합니다.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전체가 악한 자의 손아귀 안에 처해 있습니다. 여기서 온 세상이 사탄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대신 ‘처했다’고 말한 것은 세상이 비록 사탄의 영향 하에 있다고 할지라도 사탄의 소유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속한’이라는 말은 소유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사도는 지금 모든 참된 신자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기에, ‘우리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너무나 중요한 지식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 속한 자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시종일관 가졌던 태도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나라에 속했다. 나는 그 나라를 기다리고 있고 그 나라를 향해 가는 순례자요, 나그네다.” 자기 정체성과 자기 주소를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렇습니까?
세상은 하나님 없이 세워진 삶과 그 체계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배제한 관점과 정신 상태입니다. 이런 세상이 아무리 최상의 상태에 이른다고 할지라도, 그 세상은 하나님이 없는 상태이기에 악하다는 것이 성경이 세상에 대해서 견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앞에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요일 2:15~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교회의 경계가 모호해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착하거나 도덕적이거나 교양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세상과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각을 주셨다(20).
이제 우리는 세번째로 사도가 주장하는 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지식을 20절에서 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세번째 앎은 신자가 가지는 세 가지 지식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지식이고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의 신학적 뿌리를 뒤흔드는 기독론에 관련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은 바로 이 지각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눈이 떠졌느냐, 여전히 소경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이 지각은 참된 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하는 지각입니다. 또 이 지각으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적이고 지적인 능력입니다. 또 이 지각은 앞에서 언급했던 ‘기름 부음’과 다르지 않은 개념입니다(2:20,27).
비록 온 세상이 악한 자 안에 처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주셨다’는 동사도 한 번 발생한 사건의 결과가 현재까지 계속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하는 완료형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각을 주심으로 우리가 참된 자이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은혜를 지금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지각이 지금도 계속해서 신자들 안에 주어져서 신자들로 하여금 믿음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지각은 어느 순간에 어디론가 사러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교회를 어지럽히던 영지주의를 의식한 사도는 정교하게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라고 말한 것처럼 역사적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또 기독교 신앙은 그가 주신 ‘지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경험적 신앙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면은 어느 것 하나만 없어도 온전한 기독교 신앙일 수 없게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이 지각을 통하여 참된 자를 알게 하셨다고 하는데, 이것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진리가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인이 아는 세 가지 지식을 말할 때, ‘안다’는 동사를 죽 써왔습니다. 18절에서 ‘우리가 아노라,’ 19절과 20절에서 ‘또 아는 것은’이라고 말할 때 ‘안다’는 의미로 사용된 ‘oida’라는 헬라어 단어는 어떤 사실을 직관적으로 인지한다는 의미가 강하다면, 20절에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할 때 ‘안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ginosko’라는 단어는 경험적으로, 인격적으로 안다는 의미를 더 강하게 함축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지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은 인격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지각은 하나님을 알게 할 뿐 아니라, 우리가 참된 자 안에 있고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고 또한 영생이신 분입니다. 이 말은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실 때 언급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이것은 정확히 20절과 같은 말씀입니다. 다시 한 번,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써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에게 확신을 더해주고 싶어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결코 참되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지각은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주어진 것입니다(고전 2:8,10).
그렇다면 정말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그 지각을 주 예수님으로부터 받으셨습니까? 참되신 하나님을 아는 지각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성령을 달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눅 11:13). 이보다 중요한 일이 여러분의 인생에 없습니다. 이것은 금생과 내세에 영원히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지각을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3. 마지막 권면: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21).
이제 사도는 매우 특이한 권고로 서신을 마칩니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21).” 이 권고는 지금 사도가 말한 세 가지 지식에 토대를 둔 권고입니다. 신자는 죄 가운데 사는 자가 아니며, 신자는 하나님께 속해 있고,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기에,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 해야합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우상숭배는 단순히 행위의 문제일 뿐 아니라 관점, 태도의 문제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상은 성도의 영적인 삶을 방해하는 최고의 적이고 거짓 신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우상을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본문과 관련해서 두 가지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가. 우상은 신자의 기쁨, 만족, 확신의 대상인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첫째로 우상은 신자의 기쁨, 만족 그리고 확신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모든 것입니다. 사도는 참된 성도들에게 기독교 신앙 안에 있는 확신을 주려고 이 서신을 썼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하는 사귐은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 안에 기쁨과 만족 그리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데서 그것을 얻으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사도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지만,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최고로 만족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확신을 얻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우상이고,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지켜 그 우상에게서 멀리해야 합니다.
우상은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 관심과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대적입니다. 우상은 여러분을 정복하고 다스리기까지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대신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을 물리치십시오. 그것들이 바로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나. 우상은 신자의 영적 사귐을 방해하는 여우다(아 2:15).
두번째로 우상은 신자의 영적 사귐을 방해하는 여우입니다. 아가서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아 2:15).” 여기서 여우는 두 연인의 사귐을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의 삶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주안의 모든 형제들과의 사귐의 삶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영적 사귐을 방해하는 존재는 여우입니다. 사도가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 하라”는 말씀은 이 여우를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신자로서 여러분의 삶에 확신이 있습니까? 그리고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적 삶을 허무는 여우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영적 사귐의 삶을 방해합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기도를 방해합니까? 형제의 사귐을 방해하는 여러분의 여우가 무엇입니까? 그 여우를 잡으십시오. 왜 사도가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 하라는 권고로 이 서신을 마감하는지, 이것이 우리의 영적 삶에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심령에 은혜를 베푸사 믿음의 확신과 사귐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는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