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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4) -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요한일서 5:16-17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2-19

말씀내용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은 얼마 전에 우리가 살펴본 5:6의 ‘물과 피’에 대한 해석과 함께 요한일서에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문제는 사도 요한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할 때 그가 무엇을 가리켜 이런 표현을 사용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자는 형제?신자?인가, 아니면 불신자 이웃을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도 그 해석과 맞물려 있습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쓸 때, 서신을 받아본 회중들은 사도가 의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지만,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는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두 구절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의 의미를 성령의 조명하심을 통하여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신자인 우리 모두의 당연한 태도입니다.

문맥: “신자가 누리는 기도의 (담대함)”
무엇보다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시 문맥입니다. 14~15절에서 사도는 신자가 누리는 담대함이 기도의 영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신자가 누리는 기도의 담대함은 이제 조금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기도에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담대함과 기도는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두 개념입니다.

확신은 자신이 아닌 (형제)를 바라보게 한다.
사도 요한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인 영생은 필연적으로 형제들과의 사귐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 그 확신은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그러면 사도가 말하는 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약 1:15).
성경이 죄와 관련해서 밝히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는 말씀입니다(롬 6:23). 그런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말하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죄가 사망에 이르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한 것은 어떤 특정죄만을 말한 것입니까? 야고보서 1:15에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말씀은 또 어떻습니까? 이것은 과연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
먼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한 부분보다 조금 쉬워보입니다. 사도는 이 경우에 대해서 말하기를,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사망에 이르는 죄라면 그를 위해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를 통해서 그 사람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한 해석을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용서받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특정 죄들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율법에서 안식일을 범한다든가 하는 특정한 죄들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하는 죄들이 있듯이(레 20:1~27; 24:15~16; 민 18:22; 신 22:26; 롬 1:32) 그런 죄들을 언급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의 정황으로 확장해서 말하게 되면,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과 같은 사건이나 고린도교회에서 범죄함으로 육체적인 죽음에 이른 사람들의 경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행 5; 고전 11:30). 하지만 이것은 요한일서의 맥락에는 맞지 않아 보입니다.
둘째, 배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침륜에 빠지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배교의 경우입니다. 성도의 견인교리에 비추어보면, 참된 성도는 완전한 배교에 이르지 않습니다. 배교를 하는 자들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던 사람들입니다(요일 2:19). 가령, 죄를 떨쳐내는 것,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 세속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 그리고 믿음을 지키는 것, 이런 것을 이행하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생명과 빛의 정반대로 이끌어가고 이것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식적인 죄는 필연적으로 배교와 교회로부터의 이탈로 귀결되고, 적그리스도의 영의 증거가 됩니다(2:18~19; 4:2~5).
셋째, 성령을 모독하는 것과 같이 대놓고 진리를 거부하는 신성모독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는 것입니다(마 12:31~32).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 진리를 대적하고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불신의 상태에 남아있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일서의 정황상 어떤 것이 가장 합당한 설명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사도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정황을 볼 때,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사람들은 분리주의자들, 거짓 교사들과 그들을 추종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교회로부터 나간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2:19에 쓴대로입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그들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에게 속했던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은 형제인가?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고, 또 이 죄를 범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할 때, 이 죄를 범하는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입니까?
여기서 논란이 정말 많습니다. 사도는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썼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형제’라고 사도는 쓰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사람은 형제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죄 범하는 것을 보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18절에서도 쓰고 있고 이미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라고 썼던 3:6에 비추어볼 때, 형제가 죄를 범한다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3:6에서 설명드렸듯이, 신자는 죄를 한 번도 짓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짓지만 그 안에 머물러 살듯이 죄를 반복해서 짓는 삶 가운데 있지 않다는 것을 사도는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2:16에서도 동일한 의미에서 현재 시제를 사용해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고 또 범하는 삶을 사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형제’라고 했을 때, 이 사람은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형제라고 사도는 썼을까요? 지금까지 사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로 형제 사랑을 말해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맥락에서 형제를 불신자가 아닌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의미로 써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어려움 때문에, 존 스토트는 여기서 ‘형제’는 넓은 의미에서 이웃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게 낫다고 제안합니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데에는 또 하나의 근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을 잃었다가 다시 얻거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거듭날 때 인간의 영혼 안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생명은 그가 죄를 범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를 떠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입니다(요일 3:14; 요 5:24). “생명을 주시리라”는 표현은 구원을 받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무입니다.
이런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사망에 이르는 죄나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자는 모두 불신자를 가리킨다고 보게 됩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죄를 범한 자들은 거짓 교사들과 그 추종자들인 배교자들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가짜였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을 외적으로는 고백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난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사망에 이르게 하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할 대상은 아직은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도 여전히 난점을 가집니다. 사도가 명백하게 ‘형제’라고 쓸 때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가리켜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설명이 없이 그 의미를 바꾸어 사용했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릅니다.

신자의 죄와 불신자의 죄
잠깐 이런 난점들을 잠시 남겨두고, 우리는 성경이 죄에 대해서 가르치는 어떤 점을 주목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신자의 죄와 불신자의 죄를 구분해서 이해하고 설명합니다. 신자의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닙니다. 신자의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을 때, 그와 함께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형벌과 저주를 받은 죄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도 넘어지고 범죄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8~9)”라고 썼습니다. 성도가 범죄할 때, 구원이 취소되지 않습니다. 17절에 쓴대로,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습니다.” 신자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죄입니다. 하지만 불신자의 죄는 다릅니다. 불신자의 죄는 크든지 작든지 모두 죽음과 지옥의 형벌을 가져오는 죄입니다. 이들에게는 모든 죄가 다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지금 제가 설명드린 것은 신자의 죄와 불신자의 죄가 본질적으로 다른 성질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 설명에 비추어 본문을 이해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여전히 난점은 남겠지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이라는 말은 맞습니다. 신자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범죄하는 형제들을 보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서 그 영혼을 회복시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시리라’는 말씀을 형제의 영혼이 다시 하나님과 성도들과 더불어 생명력있는 영적 교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기도에 대해서 가지는 담대함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일서의 전체 맥락에 잘 맞는 설명입니다.

적용: 공동체가 죄를 다루는 방식은 기도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이 속한 작은 맥락은 성도가 기도에 있어서 담대함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큰 맥락은 성도의 확신은 자기 자신에 머물게 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형제 사랑이 묶입니다. 범죄하는 형제를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하는 어떤 잔소리보다 더 힘이 있는 것이 기도라는 확신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고 그 영혼이 회복되게 하는 것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가지는 담대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기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를 하나도 흘리지 않으시고 경청하시고 구한 것을 주신다는 확신이 있는 것입니다. ‘구하라’는 동사와 ‘(생명을) 주시리라’는 동사는 모두 미래시제입니다.
‘구하라’가 미래시제로 사용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완곡한 명령입니다. 범죄하는 형제를 보면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미래시제는 또 다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미래시제 그대로 범죄하는 형제를 보게 되면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이 두 번째 의미가 요한일서의 전체 맥락에 잘 맞아보입니다. 참된 성도는 다른 성도가 죄짓는 것을 볼 때, 결코 무관심한 채 등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 아파하면서 그 형제를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거듭난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고 형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전에는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형제들이 범죄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하나님께 그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정상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으로부터 한 가지 중요한 적용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죄를 다루는 방식은 기도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범죄가 일어납니다. 성도들도 넘어집니다. 그때 교회는 여러 가지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치리할 수 있습니다. 범죄를 알게 된 사람이 권면할 수 있고, 듣지 않으면 두 세사람이 함께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장로를 청하여 함께 가서 교회의 공적 권위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를 교회에서 내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본문이 강조하는 ‘기도’라는 맥락에서 행해져야만 합니다. 공동체가 죄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기도가 배제된 치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한 모든 형제를 위해 교회가 할 일은 간절히, 힘을 다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회복시킬 수 있다는 복된 확신을 가지고서 말입니다.
이것을 조금만 더 확장해서 말한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 있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저들은 교회를 흔들고 교회로부터 나간 배교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마땅한 교회의 책임입니다.
기도는 교회가 존재하는 맥락입니다. 분주한 섬김과 헌신이 기도를 대치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기도라는 맥락에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복된 은혜를 우리가 벧샬롬교회 안에서 풍성하고 깊게 경험하게 하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