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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3) - 기도의 담대함

요한일서 5:13-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2-12

말씀내용
확신이 기독교의 특징이라고?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 로마 카톨릭은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트렌트 공의회를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칭의와 관련해 선언한 문서(1547)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특별한 계시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셨음을 알 길이 없다.” 여기서 ‘특별한 계시’는 성경이 아닌 꿈이나 환상입니다. 또 16세기 말 가장 강력한 카톨릭 논객이었던 추기경 벨라르민은 개신교의 확신 교리를 ‘이단의 가장 큰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정직하게 읽는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확신을 가지는 것,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며 불가능하다고 반박할 수 있겠습니까? 추기경 벨라르민이 확신 교리를 개신교회가 가진 최고의 이단성이라고 말했다면, 오늘날 개신교회에 속한 많은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릅니다. 거짓된 가르침이나 반쪽의 진리가 신자에게 확신을 줄리는 만무합니다. 언제나 이단이나 사이비 혹은 반쪽의 진리만을 가진 자들의 가르침은 성도들의 확신을 무너뜨리고 붕괴시킵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를 온전하게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과 함께 ‘전체 성경’을 강조했습니다. 500년이 지난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배우고 아는 것은 기독교인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성경 전체를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목회의 근간이어야 한다고 믿고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다.

서신의 수신자들(13)?믿는 자들
오늘날 기독교회가 가진 위기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확신의 부재입니다.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를 쓰던 당시 그리스도인들도 확신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회는 영지주의 이단에 의해 교회 안에 큰 소용돌이가 일었고 교회는 크게 분열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확신을 잃어버렸고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사도는 확신을 잃어버린 참된 신자들에게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13절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이라고 쓴 말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이 서신을 누구에게 쓰고 있는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 서신의 수신자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서신의 목적(13)?확신과 기쁨
사도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을 가진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이 서신을 썼다고 밝힙니다.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13).” 이것은 점점 더 그리스도인의 확신에 도달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너희가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도가 이 서신을 쓰는 이유를 밝혔던 1:4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사도가 주고 싶어하는 확신은 그리스도인의 기쁨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측정하는 시금석은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주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약속하셨고 제자들이 누리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3).” 확신은 믿음의 충만함이고 믿음의 충만함은 기쁨의 충만함을 누리게 합니다. 이것이 담대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누릴 수 있는 복락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확신을 가진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흔들어 놓았던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거나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사람 편에서 믿음을 유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반드시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가 할 일은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뭔가를 재미있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고, 평생에 그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담대함(14~15)
14~15절은 담대한 그리스도인이 담대할 수 있는 영역인 기도를 소개합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은 기도에서의 담대함을 말합니다. 요한일서에는 모두 네 차례 ‘담대함’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두번은 마지막 심판날의 담대함을 묘사했고(2:28; 4:17), 두번은 기도에서의 담대함을 묘사한 것입니다(3:21; 5:14).
다시 한 번, 이 ‘담대함’이라는 그리스어의 원 뜻은 민주주의가 시작된 그리스의 관습에서 유래합니다. 시민회의가 열렸을 때,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기 견해를 자유롭고 담대하게 밝힐 수 있었는데, 이것이 담대함입니다. 말하자면 ‘발언의 자유’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이 단어가 기도에서 사용될 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자신이 하려는 말을 담대하게 그리고 자유롭게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자 앞에서나, 높은 사람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를 압니다. 하지만 만군의 주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신자들은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도 언급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여기서 ‘담대히’라는 말이 본문 14절에 사용된 ‘담대함’과 같은 말입니다.
좀 더 살펴보지요. 기도에서의 담대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기도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담대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입니다. 여기서 ‘들으심’이라는 말은 구하는 것을 주신다는 의미 보다 하나님께서 ‘경청하신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우리의 눈을 사랑스럽게 쳐다보시면서 귀를 기울여 우리가 하는 말을 경청하실 것에 대한 확신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린 자녀들이 부모에 대해서 가지는 확신과 비슷합니다. 동네 아저씨나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담대함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뭔가를 말씀드리는 것 조차 어려워하는 수줍음이 심한 아이라도 자기 부모에게는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전혀 쳐다보지 않고 하는 일을 계속 하면서 “말해봐!”라고 하는 직장 상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사람이 자기가 말하는 것을 경청해줄 거라는 담대함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이미 경청할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실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것이 되는대로 아무 것이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다 말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는 구절에서 담대함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수 있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구할 때 담대하다는 말입니다. 기도에서의 담대함을 언급한 3:21~22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기도에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음은,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한 복음서의 말씀들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7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기도 응답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요한복음 14:13~14; 15:16; 16:21~24,26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한 가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을 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담대함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구하고 그것을 얻어내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여 하나님을 굴복시키는 과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과정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 가장 유익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기도는 자기의 뜻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마치는 과정입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이것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사도는 15절에서 ‘안다’는 말을 두 번 쓰면서 신자가 기도에서 가지는 담대함의 근거를 좀 더 설명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경험적으로 아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아는 것이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 말씀에 비추어 아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는 것은 14절에서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이라는 말입니다. 두번째 담대함의 근거는,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는 말로 설명됩니다.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셨다는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얻은 줄을’이라는 말에서 ‘얻었다’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언젠가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구할 때 이미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내가 드리는 기도를 다 경청하실 뿐 아니라, 이미 제공해 주심으로 벌써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어떤 하나님의 자녀가 담대함을 가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얻은 줄을 안다’는 말을 조금 더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경청하여 들으셨다면, 그 말은 이미 응답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응답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장래의 어느 시점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다니엘의 경험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한 전쟁에 관한 이상을 깨닫고 슬퍼하며 금식하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주가 지났을 때,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그런데 바사 왕국의 군주가 이십일 일 동안 나를 막았으므로 내가 거기 바사 왕국의 왕들과 함께 머물러 있더니 가장 높은 군주 중 하나인 미가엘이 와서 나를 도와 주므로 이제 내가 마지막 날에 네 백성이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이는 이 환상이 오랜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단 10:12~14).” 하나님의 응답은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하던 첫 날부터 시작되었지만, 다니엘이 그것을 알게 된 것은 3주가 지난 뒤였습니다. 성도의 삶에서 모든 기도의 응답은 이와 같습니다. 사도는 “구한 그것을 (이미) 얻은 줄을 안다”고 말하면서,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때 가지는 담대함의 근거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1:42에서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기도하실 때, 이것이 바로 사도가 지금 말하고 있는 담대함입니다. 사도는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셨던 담대함이 이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여러분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면 바로 이런 담대함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가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를 언제나 하나님께서 경청하여 들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미 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도는 그것을 알게 하려고 이 서신을 쓴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확신입니다.

적용과 교훈: 나는 영생을 가졌는가?
이 모든 것의 관건은 13절에 쓴 대로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기도의 담대함으로 이끌어갑니다. 세상은 진정으로 우리 자신에게 귀를 기울여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말하지만, 남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은 심히 적습니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돈을 주고 시간을 사서 자기 말을 경청해줄 사람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누군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내 말을 경청해줄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그리스도인일지라도, 그는 정작 외롭지 않고 외로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아시고 그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 말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들리십니까? 우리는 요즘 욥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은 정작 욥의 말을 경청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의 말만 늘어놓고 욥의 상처에 소금을 뿌립니다. 욥은 친구들 때문에 외로움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말을 들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자기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습니다. 비록 이것이 욥의 실낱같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그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자기의 원망과 불평과 현실을 쏟아낼 수 있을 만큼 그를 용기 있게 합니다. 욥기의 결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욥의 말을 하나도 빠짐없이 경청해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욥이 구한 것을 다 허락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런 복된 특권을 누리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여 함이라(5:12~13).”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 그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들이 이 복된 특권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영생을 가진 사람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영생을 가진 사람임을 아십니까? 사도는 그것을 위해 지금까지 세 가지 테스트를 제시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살아가는가, 순종의 테스트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형제로 알고 그 형제들을 사랑하는가, 사랑의 테스트였습니다. 세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가를 묻는 믿음 혹은 교리 테스트였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내가 영생이 있는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만일 영생에 관한 물음에 관심을 갖는다면, 만일 그것을 지니지 못했다고 느낀다면, 그리고 만일 자기에게 영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라면, 여러분은 자신이 그것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이러한 바람을 갖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공허함을 느낀다면, 만일 나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면, 만일 내가 보잘것 없고 불쌍하며 눈이 멀었다고 느낀다면, 만일 죄악으로 향하는 성향을 미워하고 자기 혐오와 미움의 느낌을 갖는다면,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영혼 속에 들어가기 전에는 그 누구도 결코 그런 체험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에게 영생이 있음을 아십니까? 그렇다면 기도의 담대함을 가진 자임을 아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혹시 “아, 나는 영생을 가지지 못하였구나!”하고 탄식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영생을 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자신의 영혼을 인하여 탄식하기 시작한다면, 다시 한 번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에게는 소망이 있고 여러분은 이미 영생을 소유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복된 자리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요 6:37).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며,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하여 주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무한히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최상의 선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뻐하심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성 삼위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