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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2) - 세 증인

요한일서 5:6-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2-05

말씀내용
신앙의 본질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1) 하나님의 아들이심을(5) 믿는 것이고, 둘째로 하나님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며(1~2), 세번째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2~3)이 앞에서 보여준 사도의 논지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대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히 11:38).
사도는 여기서 좀 더 나아갑니다. 6~17절에서 사도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는가”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도는 그 믿음에는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6~9절에서는 증인들의 증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10~12절에서는 그 증거의 결과를, 마지막으로 13~17절에서 사도는 그 증거로 말미암아 신자가 누리는 확신에 대해서 말합니다. 모든 성경이 그렇지만,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지 못했을지라도 믿음을 소유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지라도 믿음만은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 안에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세기 말에 쓰여진 이 서신을 통해서 21세기 광주에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증거
사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구름 위에 뜬 허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 증거도 없이 뭔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을 보면서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기독교 신자를 그렇게 바라봅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수학이나 논증으로 이성에 부합하도록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도는 기독교 신앙이 아무 근거나 논리도 없는, 증거 없는 신앙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세 증인을 소환합니다.

효력있는 참된 증언
사도가 소환하는 세 증인은 ‘성령과 물과 피’입니다(8).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라고 말할 때, 사도는 분명히 구약 율법의 기준을 원용하고 있습니다.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라고 한 말씀입니다(신 17:6). 중요한 사건을 단 한 사람의 증언으로 결정함으로써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기독교 신앙이 단지 이 세상에서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문제이며 따라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러기에 여기도 세 증인이 필요합니다. ‘성령과 물과 피’라고 할 때, 성령님은 인격이신 하나님이시지만, 물과 피는 증인?증언하는 이?이라고 표현하기는 어색합니다마는, 사도는 모두를 의인화하여 증인?증언하는 이?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 증인들의 증거가 참되다는 것을 더불어 강조합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무도한 결정을 내릴 때, 유대인의 공회가 세운 증인들의 증언들은 일치하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는 예수를 쳐서 거짓 증언하는 자가 많으나 그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못함이라…그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더라(막 14:56,59).” 거짓증거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증언이 일치되도록 피의자들이 서로 말을 맞추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도가 소환하는 세 증인의 증언들은 ‘합하여 하나이니라’고 말합니다(8). 그 증거가 참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물, 피가 한 목적과 결과를 향해서 함께 일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를 확립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기 때문에, 이 증언은 효력있는 참된 증언입니다.

두 증인: 물과 피
먼저 사도는 두 증인을 부릅니다. 물과 피입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라고 말합니다(6).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물과 피’는 요한일서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도의 편지를 받는 교인들은 익숙하게 알고 있는 내용이었을텐데, 우리에게는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해석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뉘어 왔는데, 첫번째로는 물과 피가 세례와 성찬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칼빈과 루터가 이 해석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무게가 실리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그 자체로만 보면 문제가 없습니다마는,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난점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나 성찬이 아닙니다. 지금 사도의 관심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며(1) 하나님의 아들(5)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가 갑자기 세례와 성찬의 주제를 꺼낼 이유는 없습니다.
두번째 해석은 어거스틴과 고대 주석가들이 많이 선호했던 해석으로, 물과 피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창에 찔리셨을 때 허리에서 나온 피와 물을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입니다(요 19:34~35). 이 해석은 예수님의 죽음이 실제적 죽음이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문맥과 연결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4에서는 ‘피와 물’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물과 피’라고 말합니다. 물론 순서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 있지만, 창에 찔려서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은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이 피이고 그와 함께 물도 나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물과 피’라고 쓰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물과 피’라고 한 것은 단순히 주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것과는 다른 뭔가를 말하려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니다. 또 요한복음 19:35에서 ‘피와 물’이 나온 것을 증언한 사람은 ‘이를 본 자’ 즉 목격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증거입니다(9).
세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이것은 가장 본문에 적합한 해석이라고 보여지는데, 고대 교부 터툴리안이 가졌던 해석입니다. ‘물과 피’는 예수님의 세례(수세)와 십자가 죽으심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례와 죽으심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과 끝으로, 예수님의 세례와 십자가 죽으심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선포되셨고 성령님이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마 3:16~17; 요 1:34).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요한은 이 십자가 죽으심의 시간을 ‘영광의 때’로 계속해서 묘사했습니다. 이 해석이 본문에 가장 적합한 해석이라고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사도가 요한일서를 쓰면서 계속해서 의식하고 있는 영지주의 이단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물과 피’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대 영지주의 지도자 케린투스(Cerinthus)는 인간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에 메시아(그리스도)가 그에게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을 때 떠남으로써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인간 예수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참 하나님과 참 인간이셨고 한 순간도 그렇지 않은 적이 없으셨으며, 세례를 받으실 때와 죽으실 때까지 여전히 참 하나님과 사람이셨다고 증거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에 케린투스가 말한 것처럼, 단지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대속의 죽으심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이 편지에서 강조했던 바, 2:2과 4:10은 거짓말이 될 것이고 기독교와 기독교 신앙은 무너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가 여기서 ‘물과 피’라고 언급한 두 증인은 바로 예수님의 세례와 죽으심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번째 증인: 성령님
사도는 이제 세 번째 증인을 소개합니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말합니다(6b). 여기서 사도가 어떤 의미에서 성령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가를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님께서 예수님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34를 봅시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두번째, 세례와 죽으심이 예수님의 메시아되심과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명한다는 사도의 증언을 신자들의 마음에 확증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는 2:27에서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성령님이 아니면 아무도 예수님을 주라고 말할 수 없다고 썼습니다(고전 12:6). 여기서 ‘주’라는 말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에 상응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증인으로서의 사역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로마서 8:16일 것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에 대한 놀라운 구절입니다. 성령님께서 신자의 영혼 안에서 행하시는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언급하는 세 증인 가운데 물과 피는 그리스도의 역사성, 삶과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객관적 증거이고, 세번째 증인인 성령님은 객관적 증거들이 신자 안에서 경험적인 사실이 되도록 하는 주관적인 증거를 제공하십니다. 물과 피라는 객관적 증거와 성령님의 주관적 증거를 통해서 신자는 믿음을 가지게 되고 확신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증언 보다 위대한 하나님의 증언
이 세 증인을 세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주체는 사도 자신이 아닙니다. 9절은 그 주체가 바로 하나님, 성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성령과 물과 피는 세 증인인데, 이 세 증인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인간의 증거도 두 세 증인을 내세워 입증하면 믿을 만한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세 증인을 세워 증언하시는 것은 얼마나 더 믿을 만하고, 강하며 힘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 증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아들을 증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증거보다 더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증거를 믿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여기서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것은 자기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신자가 자기 안에 증거를 갖는 것, 즉 성령님의 내적 증거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이미 사도가 6절과 8절에서 언급한 바, 성령의 증거가 그것입니다. 이 성령님의 내적 증거가 그리스도의 세례와 죽음을 가리키는 물과 피라는 역사적이고 외부적인 증거를 보충해 주고 확증해 줍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건대,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갖는 것은 그 특성상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 출발점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라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기초한 것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도는 10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증언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영생
이제 11~12절에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세 증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신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의 세례 받으심과 죽으심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서는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을 받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영생이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 것은 장차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신자들이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대신, 사도는 지금 현재적으로 모든 믿는 자가 누리는 은혜의 축복이고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영생을 생명의 시간이 무한정 연장되는 생명의 양으로 말하기 보다는, 생명의 질을 강조하여 말합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도 연합한 것이고,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을 지니고 사는 존재, 영생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명이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누리는 생명입니다. 사도가 말씀하는 영생이 혼자 누리는 생명이 아니라,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누리시는 생명이고, 또 신자들에게 주어졌을 때에도 그 생명은 혼자서 영원히 사는 생명이라기 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불어 함께 사랑하면서 누리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모든 신자는 영생을 누리며 그 영생은 요한일서의 서두에서 사도가 말씀한 바와 같이,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며” ‘우리의 사귐’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입니다(요일 1:3). 이 영생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는 삶이며, 이 안에서 성도들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견고함을 향하여 가는 교회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죄인들에게 가능해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제시하셨고,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적으로 증거하셨기에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기는 믿음, 신자 안에 주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은 혼자서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고 더불어 살아가며 누리는 영생의 삶을 통해서 그 믿음은 견고해지고 더 큰 확신을 누리게 되며 그것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는 성 삼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생명의 사귐과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주께서 믿음 없는 세상을 향해서 이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교회로 이 시대의 모든 교회들과 우리 벧샬롬 교회를 세워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