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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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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1) - 신앙의 본질

요한일서 5:1-5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2-11

말씀내용
믿음, 사랑, 순종은 하나다.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을 회피해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무조건 열심히 뜨겁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신앙 양태가 한국교회에 만연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앙 생활에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중에서도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매우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뜬금없이 묻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에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 기초해서 묻는 것입니다.
사도가 4:7부터 계속 말해오는 주요 주제는 형제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제 5:1~5에서 그 내용을 마무리하면서 다루는 주요주제도 사랑입니다. 요한일서의 맥락에서 볼 때, 신앙의 본질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요한일서가 쓰여진 목적과 관련해서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확신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사도는 이 본문에서 사랑을 말함과 동시에 요한일서 전체에서 말해왔던 참된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테스트를 전체적으로 종합합니다. 그것은 교리적 테스트로서 믿음, 사회적 테스트로서 사랑, 그리고 도덕적 테스트로서 순종입니다. 사도는 마치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시면서 한 하나님이시듯, 이 세 가지 테스트도 조화로운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1절은 믿음과 사랑을 말하고, 2절과 3절은 사랑과 순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서 다시 믿음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믿음과 사랑과 순종, 이 세 가지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믿음과 중생(거듭남)
질문을 또 하나 드리겠습니다. 믿음이 먼저입니까, 중생이 먼저입니까? 여러분은 믿고 거듭났습니까, 아니면 거듭났기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까?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1절이 그것에 대한 대답을 줍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라고 했습니다. 이 문장의 논리는 무엇이 먼저라고 말해줍니까? 사실, 우리 말 번역으로는 ‘믿는 자’와 ‘난 자’라고 할 때 두 동사의 시제가 불명확하지만, 헬라어에서는 분명합니다. ‘믿는 자’에서는 현재 시제가 사용되었고, ‘난 자’라고 할 때는 완료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지금 믿고 있고 또 계속 믿는다는 말입니다. 중생이 오고 그 다음에 믿음이 옵니다. 다시 말해, 믿음은 중생의 증거이고 열매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이미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말은 중생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거듭남은 우리를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을 인식하는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중생의 결과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은 영지주의 이단들이 거부했던 교리였고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고백하는 진리였습니다.
믿음이 중생의 첫번째 증거라면, 두번째 증거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1절 하반절입니다.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그들을 낳으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서 난 자를 또한 사랑합니다. 중생의 두번째 증거는 사랑입니다. 1절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계명 지킴
사도는 2절에서 다음 논리를 전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이 논리의 큰 그림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알 수 있다.”
여기서 또 질문을 던져봅니다. 사도는 왜 그냥 하나님을 사랑할 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않고,“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지금까지 사도가 말해온 것에 비추어 아주 당연합니다. 사도는 4:20에서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형제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증거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5:2에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형제를 사랑하는 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만 증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했습니다(2:3~4).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고 함으로써, 독자들이 착각하거나 자기를 기만할 소지를 제거합니다. 그래서 3절에서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정리하면, 1절에서 말한 바, 중생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했고, 2절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들도 지키는데, 하나님 사랑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증거 혹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4:20~21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두 사랑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된 그리스도의 세번째 테스트, 순종이 나타납니다. 거듭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계명들을 순종합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첫번째 결과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두번째 결과는 순종?아버지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과 순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요 14:15,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계명들은 무겁지 않다.
사도는 3절 하반절에서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이 말이 왜 나옵니까? 사도는 지금까지 은혜의 복음을 전해 왔는데, 갑자기 왜 계명들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일까요? 복음과 은혜와 자유를 말하는 것은 율법폐기론이나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과 은혜와 자유는 도리어 율법을 율법되게 합니다. 복음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율법을 지킬 힘을 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율법이나 계명들은 지키기 어려운 짐이라는 인식이 심겨져 있습니다. 사도는 이것을 교정해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계명들을 지키는 자입니다. 순종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내가 말하는 순종,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또 하나의 율법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순종은 사랑이 만들어내는 순종이다. 그래서 그 계명들은 무거운 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열쇠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계명들을 지키는 것을 힘들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순종을 의무로만 여기게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기쁨으로 순종하게 만듭니다. 사랑은 계명들을 마음으로부터 지키게 만듭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계명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갖다 붙인 규정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며(롬 12:2), 언제나 우리의 행복을 위하시는 지혜롭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함으로써 사랑의 자발성과 자유를 말합니다. 계명들이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그것은 무거운 의무와 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도는 4절에서 왜 계명들이 무거운 짐이 아닌지를 더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사랑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말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자녀들인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가족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하는 말입니다. 사도는 여기서 그 계명들 자체가 무겁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계명들은 도무지 지킬 수 없는 불가능한 명령이고 죄인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거듭난 자녀들에게 계명들은 무겁지 않습니다. 계명들이 변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의 본성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하라는 것으로 압축됩니다. 사랑하는 본성이 주어진 새 사람에게 사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고 하고 싶은 것이기에 그 계명들이 더 이상 무거운 짐일 수 없습니다. 사랑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은 결코 어려운 명령이 아닙니다.

세상을 이겼고 이기는 사람들
계명들이 무겁지 않다는 말을 설명하면서, 사도는 조금 더 나아가 세상을 이긴다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계명들이 무겁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긴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4~5절에는 세상을 이긴다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첫째는,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4a)”이고, 둘째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4b)”이며, 세번째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5)”입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개념입니다. 문제는 그 개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이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이긴다’는 동사의 시제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됩니다. 처음과 세번째 동사는 현재시제로 쓰여졌지만, 중간에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이라고 할 때, ‘이기는’은 부정과거(분사)시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좀 더 엄밀하게 시제를 살펴 번역하면 “세상을 이긴 승리”라고 하는게 나을 것입니다. 이 부정과거 시제는 어떤 확정적 행위를 가리키는데, 사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요? 첫번째 가능성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신(요 16:33) 십자가의 승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두번째로는 이 서신의 독자들인 성도들의 회심 사건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죄인의 회심은 세상을 이긴 사건입니다. 끝으로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거부한 결정적 행위와 결단, 거짓 교사들과 분리한 것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의 문맥 상, 첫번째 가능성인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승리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히려 두번째와 세번째 설명이 문맥과 이 서신의 독자들이 처한 상황에 더 잘 어울리는 설명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는 말씀처럼,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최초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반응을 했을 때, 신자는 세상을 처음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교회의 상황 속에서 얼마 전에 분리되어 나간 거짓 교사들로부터 이들이 돌아섰을 때, 이들은 거짓 교사들과 거짓 교훈들을 이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는 말씀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는 말씀에서 현재시제로 쓰인 ‘이김’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이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누려야 하는 지속적인 승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문맥상, 우리의 순종을 어렵고 무겁게 만드는 모든 세력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상에 대한 승리입니다. 2:16을 보지요.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만일 우리의 사랑이 나뉜다면, 만일 우리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것들을 사랑하게 된다면, 계명을 지키는 순종은 어렵고 무거운 짐이 될 것입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회심의 순간에 세상을 이긴 승리자입니다. 이 승리에 기초하여,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이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는 말씀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거듭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고 이런 사람은 세상을 이긴 자이며 또한 날마다 이기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요한서신이 쓰여지던 당시 세상은 두 가지 방식으로 교회와 성도들에게 접근했습니다. 지적인 면과 물리적인 면입니다. 지적인 면에서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사상으로 교회를 흔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과(5:1) 구원과 생명을 주시려고 사람이 되신(4:9,14)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5:5) 흔들릴 수 없는 믿음과 확신은 그것을 부인하는 이단을 대항하여 이기게 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또 물리적인 면에서 로마 제국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과 황제가 자기들의 육신은 주장할지라도 자기들의 영혼은 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담대하게 신앙을 지켰고 이로써 그들은 세상을 이기고 있었습니다. 승리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세상에서는 비천해 보이는 자신들의 몫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멋진 표현대로,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히 11:38).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여러분, 사도가 오늘 본문의 논리를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각인시켜 주고자 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테스트, 믿음과 사랑과 순종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세 가지 모두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 사랑과 순종이 서로 묶여 있으며, 이 세 가지는 모두 함께 묶여 있습니다. 세 테스트는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되거나 독자적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믿음과 사랑과 순종은 중생의 참된 표시들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이 이 세 가지 테스트의 중심에 있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드러나고 순종은 사랑 없이 불가능합니다. 순종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사랑 없는 믿음은 거짓이고, 사랑 없는 순종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지 않을 행위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4:18). 사랑은 인내하는 믿음을 견고히 세워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이 이기게 합니다. 사랑은 계명들을 무겁게 만들지 않음으로써 순종을 가능하게 하고 기쁘게 순종하게 하며 나아가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믿음, 사랑, 순종 이 세 가지는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어거스틴의 말입니다. “당신은 단 한 가지 짤막한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하십시오. 침묵하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외치려거든 사랑으로 외치십시오.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십시오.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십시오. 그대 안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십시오.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올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