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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30) - 성숙한 신자의 특성 : 일관성

요한일서 4:19-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2-04

말씀내용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확신에 관하여 사도는 이 서신에서 세 가지 시험/시금석을 반복적으로 제시해왔습니다. 첫째는 도덕적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빛 가운데서 행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회적 테스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알아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랑 대신 미움이 그 삶의 기조라면 그것은 가인의 성향을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께 속한 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제시하는 시금석은 교리적 테스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하는 것에 관하여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대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와 관련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오신 하나님, 즉 참 사람이며 참 하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 가지 테스트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고, 이 확신에 기반하여 교회는 진리와 성령 안에서의 교제를 누리고 그 기쁨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는 이런 기반 위에서 교회 다워지고 든든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집니다.

특별히 우리는 몇 주 동안 서신의 4장을 비교적 소상하게 살펴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12절 말씀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증거이고, 신자는 성령님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고 확신하게 됩니다(13). 이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내가 하나님과 화해하는 회복된 관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다른 형제들과 나의 회복된 관계, 화목한 가족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갑니다. 하나님의 권속이 되어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그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곳이고, 그래서 교회는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기초로, 우리는 교회를 이해하고 바라보고 또 교회의 생활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심판 날에 담대하게 할 것입니다(17). 사랑은 죄인의 본성 안에 있는 종교적 두려움, 심판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자비하신 아버지로 볼 수 있게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어떤 행위이기 전에, 그리스도인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고 장래에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누리는 확신이 약화된 이면에는, 이 확신이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는데 한 원인이 있습니다. 확신이 주어지는 공동체적 상황이 부재하다는 것은 슬픈 일인 것입니다.

사랑이 시작된 것은(19)

이제 우리는 계속해서 이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9절은 이런 내용을 사랑의 기원과 관련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이것은 중요합니다. 사랑의 기원은 사랑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이 우리의 본성에서 나왔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고 누린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죄인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이기적 성향이고 자기중심성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형제 사랑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다는 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19절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앞에서 사도는 이렇게 진술하기도 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4:10).”
우리의 형제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한다면,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기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형제 사랑을 통해서 눈에 보이도록 증명된다는 것이 사도의 논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보이지 않으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의 물질을 사용하여 사랑함으로써 보여지기 때문입니다(3:16~18).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관계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믿음은 단순히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나를 당신의 아들로, 딸로 여기시고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욥의 믿음을 믿어주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믿음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관계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루어지는 사랑, 성사되는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쌍방적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고 말한다고 그것이 곧 사랑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참된 사랑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장래에 소망을 가지고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나는 평생 교회를 다녔으니 천국문에 이를 때, 당연히 패스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게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내가 하나님을 믿고 확신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또한 나를 아시고 믿어주시는 것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의 의지만 있으면 안 되고 문을 열어줄 사람이 열어주고 싶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확신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에서 할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내가 안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심을 내가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확신을 누리고 살아가기를 바랬던 사도 요한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 서신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도는 이런 논지를 가지고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우리 신앙과 사랑과 담대함의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형제를 사랑하든지, 혹은 이웃이나 심지어 원수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오직 하나의 기원을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이 변개할 수 없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가 아니라 “보라, 내가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20)

제가 지난 주에 질문을 던진 것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쉽습니까? 20절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해서 가지는 일반적 대답을 전제로 합니다. 그 전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쉽다는 우리의 생각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형제들은 참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아름다우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쉽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자기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를 신앙의 치명적인 맹점으로 인도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모든 위험한 착각과 시도들을 뒤집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칫 하나의 관념이 되기 쉽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한 제 경험을 하나 나누겠습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후, 저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이전에는 제가 보지도 못한 외국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울었던 적이 제 기억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후, 그 영혼들을 향한 긍휼한 마음이 제 안에 차고 넘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께서 추숫군들을 일으켜 2억의 백성들에게 보내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내와 저는 1년 반의 선교사 훈련을 마치고 우리가 그렇게 간절히 바라고 기도하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언어를 배우고 문화에 적응해가면서 하루 하루를 지내는 동안, 제 눈에 눈물이 마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때로는 그들을 향하여 화를 내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무시하는 투로 말하는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을 사랑하기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들을 보기 전에는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고 그들 속에 들어와 살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들을 보기 전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품었던 그 사랑은 거짓이었습니까? 저는 그것이 거짓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실력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그들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것은, 제 눈 앞에 볼 수 있게 된 그들을 사랑하게 될 때 비로소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때 저는 이런 위험한 생각에 이를 수도 있게 됩니다.“나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여기 인도네시아까지 와서 선교사가 되었지.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사랑하기기 만만치 않군. 저런 민족성이나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여하튼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 선교사가 된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야.” 하지만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요지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할 때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비교적 쉽겠지만, 그것이 진정한 실력이고 진짜인지 드러나는 때는 내가 형제를 사랑하는 실재 속에서 경험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는 것은 매우 강력한 비난입니다. 사도는 이미 앞에서 두 차례나 이런 방식으로 도덕적 오류를 지적한 바 있습니다. 1:6과 2:4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1:6).”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2:4).”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거짓말하는 사람, 그 신앙이 거짓인 사람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눈 앞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자기 자랑에 불과하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ㅇ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사도가 1:7에서 말씀했듯이,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4:8)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4:16). 또 사랑 안에 거한다는 말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의 계명(21)

사도는 21절에서 이것을 계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사도가 ‘계명들’이라고 하지 않고 ‘계명’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하나의 계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께로부터 받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과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두 가지로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계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키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단일한 하나의 계명입니다. 마태복음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율법을 두 가지로 요약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물론 여기서 주님은 ‘두 계명’이라고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이 두 계명이 ‘같다’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39절에서 “둘째도 그와 같으니”라고 하십니다. ‘같다’는 말은 그 본질이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두 개의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라도 이 둘은 동일한 본질을 지닌 같은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구분지어 생각할 수는 있을지라도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일관성: 성숙한 신자의 특성

우리는 사도가 전개하는 논지를 통해서 성숙한 신앙이 지니는 한 가지 중요한 특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균형입니다. 다른 말로 일관성(consistency)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위선이라고 하거나 일관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신자는 일관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언제나 일관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일관성은 무엇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 사이의 일관성입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전체를 통해서 사도가 강조하는 신자의 삶의 일관성은 몇 가지 더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일관성이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은 언제나 형제에 대한 사랑과 일관성있게 나타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또 교리와 실천도 일관성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성경의 교리들을 착실히 배워서 안다고 하면서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살아가지 않거나 그 계명 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이고 불일치이며 위선이고 거짓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의 일관성도 참된 믿음의 특징이고 성숙한 신자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일관성! 이것은 성숙한 신자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의 특성이 벧샬롬 공동체 안에, 그리고 여러분 모두에게 견고하게 세워져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