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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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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9) - 사랑은 소망을 낳고

요한일서 4:17-1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1-27

말씀내용
요한일서와 4장의 문맥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요한일서를 쓰면서,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확신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마음이 서신서 전체에 흐르고 있습니다. 실로 그리스도인에게 확신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확신이 없이 어떤 길을 가보신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더 갈까, 아니면 유턴을 할까 내내 고민하게 됩니다. 조금만 더 가보고 결정하자고 생각하다가도 지금 돌려야 하나 생각합니다. 그 길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확신이 없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이 없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는 훨씬 더 평안을 누리고 교회는 훨씬 더 깊은 성령의 교제를 경험하고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4장 1~6절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믿는 바른 믿음을 제시했고, 7~12절에서는 그 증거로 형제 사랑을 제시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믿음과 사랑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4:12에서 사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하고나서, 1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17~21절에서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상고했던 중요한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데, 그것을 어떻게 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압니다(13). 성령님께서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음을 증거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믿습니다.
사도는 12절과 관련해서 하나를 더 말합니다.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했는데, 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17~21절에서 생각할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사랑은 심판 날에 담대하게 한다(17)
그 대답이 17절입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세상에서 인간 법정에 서는 것도 두려운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정에 그것도 우리 인생 전부를 놓고, 행위 뿐 아니라 마음의 문제까지도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짓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령 골수를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습니까?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면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12절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우리 안에 심겨진 씨앗이 되어 우리의 형제 사랑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을 사도는 사랑이 이루어진다, 사랑이 그 목적을 성취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면 그 결과 우리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좀 더 설명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은 우리의 형제 사랑으로써 열매를 맺고 온전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20절에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형제 사랑은 우리의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교회 열심히 나와 봉사하고, 기도 많이 하고, 헌금 내고 하는 것으로도 물론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확실한 증거로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사랑을 통해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형제 사랑이 하나님 사랑의 척도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궁극적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사랑은 심판 날에 우리를 담대하게 만듭니다.

순종과 사랑은 함께 간다
우리는 앞에서 믿음과 사랑은 별개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4:1~6은 믿음에 대해서, 4:7~12은 사랑에 대해서 말씀함으로써 사도는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7절은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진다고 했습니다. 2:5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여기서는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17절은 형제 사랑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순종과 사랑도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에 대한 믿음, 그 말씀과 계명에 대한 순종,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됨의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믿음, 순종 그리고 사랑은 신자가 마지막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자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자들
17절 하반절입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주께서 그러하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문맥상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한 말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자, 하나님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하나님과 같다는 말을 3:2~3과 비교해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말씀합니다. 반면 17절은 ‘지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두 구절은 서로 상충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성취되고 있지만, 그날에는 이것이 완성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왔지만, 지금도 오고 있고, 또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는 날이 심판 날입니다. 2:28에서는 ‘그가 강림하실 때’라고 했는데, 3:3에 이른대로 우리에게 그날은 소망의 날입니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날은 소망의 날인데, 이 소망이 어디서 주어집니까? 바로 형제 사랑이 그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고 소망을 보게 합니다. 형제 사랑이 심판 날의 소망을 낳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교회 열심히 나와 봉사하고, 헌금 드리고, 뭐 그런 행위들로 측정되기 보다, 형제 사랑으로써 하나님 닮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랑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았음을 입증하게 되고, 나아가서 그것이 심판날에 우리로 담대함을 갖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대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벧후 3:12).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은 사람인 신자들에게 심판의 날은 두려움의 날이 아니라 소망과 기대의 날입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18)
18절에서 사도는 17절의 요지를 뒤집어서 설명합니다. 담대함의 반대 개념은 두려움입니다. 말하자면, 왜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들은 심판 날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담대함으로 소망하게 되는가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사랑은 두려움과 공존할 수 없으며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기 때문입니다.
죄는 두려움을 낳지만 사랑은 담대함을 낳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것은 궁극적인 두려움을 제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경외하는 마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경외심과 비굴한 두려움은 다릅니다. 히브리서 9:28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긴다고 할 때 두려움은 경외심을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두려움은 하나님의 형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죽음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가리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경외심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동시에 사랑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그러해야 마땅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의미로 사도는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형벌과 지옥과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주의 계명에 순종함도 없으며, 형제를 사랑하지도 않으며, 그로써 하나님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고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하고 믿음의 도리, 즉 말씀에 무지하여 이런 두려움에 종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성경의 말씀을 따라서 믿음의 도리를 지속적으로 바르게 그리고 깊이 알아가는 일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는 그 믿음의 도리를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형제 사랑으로써 온전히 이루어지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고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소망을 낳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은 옵니다. 그날은 확실히 옵니다. 그날에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그날이 되어봐야 알수 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담대함은 확신입니다. 긴가 민가 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반대로 그 날 두려움으로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오늘 여러분과 제 삶에서 확인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졌다면 여러분은 그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고 설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경박하거나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확신과 애정으로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제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6:14~17입니다.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겨지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얼마나 무서운 광경인지 모릅니다. 세상에서는 떵떵거리며 살았을 사람들도 그 심판 날에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심판 날의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졌는가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말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잠시 인용하겠습니다. “형제 사랑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내가 사랑 안에 거하는지의 여부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구원의 목적 전체를 곡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내 삶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니라면 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 초보자에 불과합니다…성도임을 검증해 주는 것은 자신의 삶에서 사랑이라는 요소에 지대하고도 점진적 관심을 갖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행위에 비추어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과 닮았는지만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으뜸되는 야망입니다.”
단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는 격려를 하자는게 아닙니다. 그런 다짐과 결심은 어떤 단체나 조직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와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형제들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진 사람들로 채워지고 세워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닮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그 본색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다시 12절을 보십시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향력이 우리 의식 속에 들어왔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이끄시고 나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성령님을 통해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형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처럼, 전에는 두려웠던 그 날이 이제는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날이 된 것을 알게됩니다(벧후 3:12). 그래서 1세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주일에 형제들에게 ‘마라나다’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오십니다.” 혹은, “주님, 오시옵소서.”하는 의미입니다. 왜 그들은 사랑하는 형제들을 향해 그런 인사를 했을까요? 그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대한 담대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져 심판의 날을 담대하게 기다리는 벧샬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