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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8) - 성령의 증거

요한일서 4:13-1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1-20

말씀내용
성경 바르게 읽기?성경의 논리를 따라가라.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성경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은 연결되지도 않는 신탁 따위를 주워 모아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성경 기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쓰게 하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논리를 따라가기 위해서 수고를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구원의 확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지를 설명하고 그 확신에 이르고 기뻐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요한일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교회의 대분열로 말미암아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고 자기들이 과연 거듭난 신자인가에 대한 문제까지도 의심해야 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이단에 빠져 교회를 흔들고 나가는 사태를 보면서 과연 참된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도 이런 비슷한 경험들을 가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서신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문맥이 중요하다.
성경의 논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성경의 문맥을 살펴서 본다는 말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문맥을 놓치면 그 말씀의 의미의 절반 이상은 사라지게 됩니다. 문맥은 그만큼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에도 전혀 그 문맥을 고려하지 않을 때, 왜곡이 시작됩니다. 문맥을 살피는 것은 자기 멋대로,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지켜주는 안전책입니다.
사도는 4장 1~12절에서 크게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1~6절에서는 모든 영을 다 믿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의 테스트를 참된 신자의 증거로 제시했습니다. 참된 신자는 무조건 ‘아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오직 진리의 말씀에만 반응하고 목자장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에만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사도는 특별히 당시 이단인 영지주의와 관련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진리를 분명하게 믿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4:2).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은 그 사람이 가진 영이 그리스도의 영인지 미혹의 영인지를 가늠하게 해줍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첫번째 증거는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진리를 믿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어 7~12절에서 참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증거를 말합니다.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믿음과 사랑에서 확실한 증거를 드러내게 됩니다.

믿음과 사랑
믿음과 사랑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분리될 수 있는 별개가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을 약화시키려면 사랑을 죽이면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된다고 말씀했습니다(갈 5:6). 믿음과 사랑의 능력, 즉 믿고 사랑하는 능력은 다 성령님께 속한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자연인은 하나님을 믿을 능력도 없는 소경이었고, 남을 사랑할 능력이 없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영이시고 그 첫 열매가 사랑이신 성령님께서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고 또 서로 사랑하게 만드셨다는 것이 성경의 설명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열매의 양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은 오늘 우리가 상고하는 본문에서도 계속되는 논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3~16절에는 12절에서 말씀한 바, “하나님의 내주하심’이라는 개념이 세 차례 반복해서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영광스러움과 풍성함을 아울러 보여주는 놀라운 개념이고 실재입니다. 사도는 12절에서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는 표현은 오늘 본문에서 13절과 15,16절에 세 번 나옵니다. 이 세 번의 언급은 모두 상호적인 거함, 즉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표현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13절에서 사도는 성부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에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사람은 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첫째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것, 즉 참된 진리를 믿는 것이고(15), 둘째로 사랑 안에 거하는 삶, 즉 형제를 사랑하는 삶입니다(16). 15절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바른 믿음, 16절은 형제를 사랑하는 삶, 즉 믿음과 사랑을 다시 말한 셈입니다. 이 논리를 놓치지 않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성령의 증거(13)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12절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는 12절에서 서로 사랑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어떻게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시는 줄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이 13절입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모든 자녀에게 예외 없이 성령님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 아는 것은 영지주의 이단이 주장하듯이, 몇몇 특정인들만 소유하는 특별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신 모든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보편적 지식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함과 하나님이 자기 안에 거하심을 압니다.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이고 성령님이 친히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르기도 하고 알기도 하는 지식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믿음?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함(13~15)
사도는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다는 진리로부터(13)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셨다는 사실로 옮겨갑니다(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이라는 말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우리에게 증인으로 성령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4~6에서 사도 바울도 이와 동일한 논리로 설명합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성령님은 그 아들의 영이라고 불리기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우리 구원의 확실성을 보장해 주시고 우리를 확신에 이르게 하시려는 의도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확실성은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명 완수와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완전하게 이루신 후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을 율법의 저주와 형벌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신 죽음이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그리스도를 ‘세상의 구주’라고 묘사한 것은,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듯 구원이 단순히 무지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친히 죽으심으로써 죄로부터 구원하신 구주가 되셨음을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하나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가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확실하게 알도록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성령의 증거는 주관적이고 경험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위에,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 자에게 더 하심으로써, 구원의 확실성을 알고 확신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보내다’ 라는 동사의 시제는 완료형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이 단순한 역사적 사건 사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세상의 구원이라는 목적과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존 스토트는 이 구절 안에서도 요한일서 전체의 중요한 논리가 흐르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그리스도인의 시금석이 있다. 첫째는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이라는 ‘교리적 시금석’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보내심 안에서 나타났다는 ‘사랑의 시금석’이다.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주가 되셨다면 우리는 죄를 버려야하며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 시금석’이다. 우리가 14절의 진리를 붙잡는다면, 우리는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믿을 것이고(믿음),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할 것이며(윤리), 서로 사랑할 것이다(사랑).” 이 세 가지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요한일서가 내내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12절에서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고 말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좀 더 나아가서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의 행위를 우리는 보았을 뿐 아니라 증언한다고 확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주하시기 때문에 경험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내주하심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권이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성령님을 통해서 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사도가 정리해서 말한 것이 15절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고 증언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공개적으로 시인하고 고백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단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참되고 온전한 믿음은 참된 신자의 증거입니다.

사랑?그 안에 거함(16)
이제 사도는 16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다”고 말합니다. 이 두 동사는 모두 그 행동이 미치는 영향과 결과를 강조하는 완료형 시제입니다. 즉,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성을 확신할 수 있으며 그것을 지금도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소수의 특정인만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것이 참된 신자의 하나의 증거라면, 사랑과 관련해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 즉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어오면서 계속해서 이것을 말해왔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랑이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거하시며 그 사람이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랑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어찌 그를 신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은 사랑 안에 거하고 형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교훈과 적용?당신은 신자입니까?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신자는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15절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는 사람이고, 16절에서는 사랑 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15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되고 바른 믿음을 말하고, 16절은 형제 사랑의 실천을 말합니다. 믿음과 사랑입니다.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참되고 바른 믿음과 고백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삶은 그가 참된 신자임을 증거해줍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거하시고 그는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신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성령님의 증거로 그것을 압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13~16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시고 너희가 알아서 믿고 알아서 경험하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그 구속의 사실을 믿게 하셨고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게 하셨으며 나아가 본질상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변화시켜주셨습니다.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모두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구나 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구나를 알게 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가를 아는 시금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줄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입니까?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 거하십니까?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과연 어떻게 알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구주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한 순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질 율법의 저주와 형벌과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대신 받으신 일 안에 일어난 구원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을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에게 주셔서 이 구원의 복음을 믿게 하시고 구원의 확실성을 알게 하시고 구원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안에 거하심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고 확신하고 누리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이 바른 교리와 가르침을 배우고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교회에 주신 형제와 자매들을 나와 무관한 사람들로 여기신다면, 결코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영광스러운 사실을 경험하거나 확신하는 자리에 이를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심을 압니까? 그것은 우리 믿음이 형제 사랑으로 표현되고 경험될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아,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구나”하고 느낍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내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러하기에 신자는 이 일로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내주하시는 은혜를 더욱 확신하는 자리로 가게 되는 때는 여러분의 믿음이 형제 사랑으로 표현될 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중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6절을 다시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이 어찌 사랑 안에 거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셨는데 그 놀라운 사랑을 묵상할 때 어찌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 있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의 증거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기에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 밖에는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