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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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7) - 교회, 하나님을 보여주다

요한일서 4:11-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1-13

말씀내용
문맥 (4:7~12)
사도 요한은 4:7에서 형제 사랑이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이라는 사실을 말해왔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이 형제 사랑이라는 것을 사도는 이미 2:7~11과 3:11~24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사도는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인가를 더 정밀하게 논증하는 동시에 그렇게 형제를 사랑할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가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문맥을 조금 살피면서 갈 필요가 있겠습니다.

형제 사랑의 세 가지 근거/토대
사도가 4:7~10에서 말씀한 바, 하나님의 자녀들이 형제를 사랑할 근거, 토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 즉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아버지의 품성을 닮아 사랑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7~8). 만일 우리 본성이 미움이라면 그것은 가인의 특성이고 악한 자 마귀에게 속하였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3:12). 두번째 형제 사랑의 근거와 토대는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입니다(9~1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냥 본성이 사랑이라고 말하는데서 끝나지 않았고, 사랑의 행위 안에서 나타났고 입증되었고 드러났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이 두 가지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11).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해야 하는 또 한 가지의 토대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11~12절 말씀입니다.

성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
또 하나, 7~12절의 문맥을 주의깊게 살피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가 이 짧은 문맥 안에서 성 삼위 하나님을 언급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7~8절에서 사도는 주로 성부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할 때, 물론 하나이신 성 삼위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사도는 의도적으로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이신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성자 하나님 즉 독생자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9~11). 우리는 세상의 역사 속에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심을 입으신 독생 성자 하나님 안에서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사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형제 사랑 안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목적을 이루게 되고 우리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고 경험하게 된다고 말합니다(12~13). 그런데 우리 안에 일어난 이 영적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인식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어주셨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13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 오셔서 내주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알고 확신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 안에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11절부터 계속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논증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전적으로 성 삼위 하나님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를 보내심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고 그 나타난 사랑은 신자들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형제 사랑의 형태로 다시 교회 안에 나타나게 되고, 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 안에 거함을 알고 경험하고 확신하는 은혜를 누린다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감정인가, 의지인가?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신자들의 형제 사랑은 당위적 의무라는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내적인 동기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형제 사랑을 왜 안 하느냐고 다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한 의무일 뿐 아니라 신자의 마음에 형제를 사랑하고픈 욕구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땅하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의지로 순종해야 하는 의무인가, 아니면 그런 감정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형제 사랑은 의지의 문제입니까, 감정의 문제입니까? 사도 요한은 지금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제가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16). 이것은 의지의 문제입니까, 감정의 문제입니까? 슬프거나 낙심이 될 때 우리는 기뻐하기로 결심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기뻐할 수 있는 감정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또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살전 5:18). 감사는 의지의 문제입니까, 감정의 문제입니까? 여러분이 너무나 힘들고 곤고한 상황 속에 빠져들어갔을 때, 여러분은 감사하기로 결심하고 감사해야 합니까, 아니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사의 감정이 신자의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올라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 사랑은 형제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때 사랑해야지 하고 결심을 하면서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사랑하는 감정이 일어날 때 사랑하라는 말입니까?
저는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명령이므로 우리는 의지로 순종하기로 매순간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뻐하기로 결단하고, 감사하기로 결단하며,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감정의 문제는 어디 있습니까? 기쁨이나 감사나 사랑은 사실 감정에 깊이 연관된 것들이 아닙니까? 의지로만 기뻐하고 의지로만 감사하고 의지로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자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기 때문에 이런 가르침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의지와 감정을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성, 감정, 의지의 기능들은 인간 자아의 통일성 안에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은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 영혼에 두 개의 기능을 주셨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지성(mind)이라 불리는 것으로 지각하고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또 하나는 지각하고 생각하는데서 나아가 그 대상에 대해서 끌리거나 좋아하든지 아니면 싫어하거나 거절하는 기능으로, 성향(inclination)이라 불립니다. 성향은 그것을 취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행동과 관련해서는 의지(will)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성향을 동반하지 않고 그저 사물을 인식하고 지각하는 차원의 지성이 있고, 인식한 대상을 좋아할 것인지 싫어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동반하는 성향 혹은 의지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감정은 무엇입니까? “감정이란 성향이 지성을 통하여 표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향은 지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성향은 지성으로 파악한 내용에 대하여 끌리고 끌리지 않는 경향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교리를 온전하게 잘 배우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감정은 이런 지성의 활동의 결과에 의존하여 반응하게 되고 그것이 다시 의지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런 참된 감정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단지 머릿속의 신앙일 수 없고, 혹은 피상적 느낌에만 머무를 수 없으며, 지성이나 감정과는 동떨어진 의지의 행위로 축소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 참된 감정에 연결될 때, 신앙은 전인격적이고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전인적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이해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독생자를 보내심으로써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성향에 영향을 미치고 이 성향이 형제 사랑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남으로써 의지의 활동이 됩니다. 이점에서 성향이 지성을 통하여 표현된 바 감정은 지성과 동떨어진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또한 의지와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지성이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감정은 다시 의지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의 진리를 이해할 때, 우리의 성향이 발동하여 그 복음 안에서 인식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끌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끌림은 당연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우리의 의지를 발동시키게 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기뻐하라, 감사하라, 사랑하라”는 명령들이 의지의 문제입니까, 감정의 문제입니까? 사도가 단순히 명령만 하지 않고 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다양하게 논증하고 설명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는 그 복음의 내용을 아는 것에 근거하여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순종은 단지 의지의 영역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순종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 모두가 전인적으로 발동하는 순종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질적으로나 본성적으로 자신과 잘 안 맞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만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대로 나와 여러 면에서 꼭 맞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끌리고 이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본성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이것을 굳이 사랑이라고 표현한다면, 개나 짐승들도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랑입니다. 사도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말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죄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이야기, 복음을 들었고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복음의 진리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고 우리를 대속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에 마음이 끌립니다. 이런 마음을 사도 베드로가 잘 표현하였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가 깨달은 복음의 진리는 이제 살아내야할 힘있는 진리가 됩니다. 이제 자기와 별로 맞지 않는 형제들을 향해서 이 진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자신의 마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의 진리를 깊이 깨달을 때, 그것은 우리 안에 우리와 맞지 않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감정을 일으켜 줍니다. 신자는 이 일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복음의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하는게 아니라, 이 진리를 되새기고 더 깊이 알아가기를 결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성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끌리는 마음을 만들어내고 하나님께 끌리는 마음은 형제 사랑이라는 의지의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할 때 의도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형제 사랑의 작동 원리
사람은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로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다는 복음의 진리가 어떻게 전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변화시켜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위해서 자기 것을 아끼지 않게 하는가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모든 것을 보장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나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것은 잃어버릴 수 없는 사랑이며, 그 어떤 것으로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입니다(롬 8:35~39).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확실히 보장된 것이기에 모든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딤후 1:8). 4장 18절을 보십시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아는 사람은 사랑을 잃어버릴 두려움이나 불안함이 없이, 그리고 전능하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시고 자기를 위해서 모든 것을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그는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음 놓고 또는 이기심을 넘어서서 자유롭게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는 원리입니다.

교회,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
12절에서 사도는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 진술이 아닙니다. 사도가 하고 싶은 말은 영이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며 본 사람도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는 감지되고 경험되고 아는 바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시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을 통해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서로 사랑은 아들 안에서 당신을 계시하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이 서로 사랑할 때 자기 백성 가운데서 계시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으시는 사랑이신 하나님은 먼저 복음 안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셨고, 두번째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라는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시작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뿐 아니라,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의도된 목적을 성취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을 때 의도하셨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의도가 성취된다는 증거입니다. 12절은 결국,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짐을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목적을 이루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형제 사랑을 통해서 온 세상 앞에 증거되는 자리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이런 점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온 세상에 보여주는 전시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잘남과 성공과 출세와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는 패자일 수 있고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이 세상 속에 교회로 존재합니다. 우리는 혼자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더불어 존재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새계명을 말씀하셨을 때, 의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오직 서로 사랑으로써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사랑, 자기 중심성, 자기 추구, 자기 만족의 족쇄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입니다. 이 족쇄가 풀리고 형제를 사랑할 자유를 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데 끌림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형제 사랑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식하게 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이런 교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말만 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을 보여주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말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복음에 대해서 말만 하지 말고, 이젠 좀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살아계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옵션은 없습니다. 교회가 건물 크기나 화려함, 편의 시설, 사회적으로 성공한 구성원들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외에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교회, 하나님을 보여주다
2세기와 3세기 초에 살았던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말입니다. “나는 성경을 공부함으로써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은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보고 그들을 그런 방식으로 살게 하는 그것을 나도 갖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스도께 인도함을 받았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다보면, 삐꺽거리는 우리 개개인의 인생은 하나 하나 합쳐져서 멋진 교향곡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향곡이 세상을 향해 울려퍼지게 될 때, 세상 속에 있는 주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될 것입니다. 터툴리안이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의 수많은 터툴리안들을 주의 교회, 주의 백성들에게로 이끌어주시는 복된 역사를 우리 시대의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