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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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6) - 형제사랑의 토대, 하나님의 사랑

요한일서 4:9-1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10-30

말씀내용
지난 8주 동안 교회의 일정에 맞추어 [언약과 성례] 그리고 [교회와 직분]이라는 주제로 각각 4번씩 말씀을 상고한 까닭에 오늘 우리는 9주일 만에 요한일서 강해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문맥(4:7~11)
요한일서는 흔들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구원의 기쁨과 확신을 심어주려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서신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무엇인지 명확한 언어로 설명합니다. 그것은 몇 가지 테스트의 형태로 주어졌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의로운가 하는 도덕적 테스트였습니다. 둘째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하는 사회적 테스트였고, 셋째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가 하는 교리적 테스트였습니다. 이것을 사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해서 확인시켜 왔습니다.
사도는 4:7~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를 사랑해야 할 토대라고 말합니다. 7절에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일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중생)과 하나님을 안다는 것, 두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 두 가지가 확실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여기서 ‘안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친밀함과 지속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니 요한일서에서 사도가 말씀하는 형제 사랑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며, 안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하면 좋은 권장 사항이 아닙니다. 8절에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 말은, 그 사람은 하나님을 안 적조차 없었던, 즉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그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시금석입니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형제 사랑은 부전자전의 원리, 아버지가 사랑이니 그 아들의 DNA도 사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났고 즉 거듭났고 또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자라면, 우리는 아버지를 닮아서 형제를 사랑하는 본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도는 조금 더 나아가서, 형제 사랑의 토대는 사랑이신 하나님 자신인데, 사랑이신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랑을 나타내셨는가를 주목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나타난 방식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방식이어야 하며, 그 사랑이 나타난 것을 경험한 사람은 형제를 마땅히 사랑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7~8절에서 형제 사랑의 토대가 사랑이신 하나님이었다면, 이제 9~11절에서는 형제 사랑의 토대가 구체화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나타난 사랑(9~10)
만일 본성이 사랑이라고 해도, 그 사랑이 어떤 형태로 나타난 적이 없거나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알며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은 목숨을 주는 사랑이며 구체적으로 자기 재물을 허비하는 사랑이라고 말하면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자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3:16~18).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이심을 영지주의 이단들이 주장하듯이, 단지 어떤 특정인들만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신비한 지식이나 체험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객관적인 사건으로 나타내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형제 사랑의 계명은 추상적 개념에 의해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셨다는 공고한 사실에 기반한다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는 말씀입니다(9). 여기서 ‘나타난’이라는 단어는 본래는 감추었던 것들을 드러낸다는 의미인데, 매우 독특하게 사용되었던 용어입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고 할 때 사용되었는데 요한일서 1:2과 3:5,8이 그 용례들을 보여줍니다. 이 용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 성육신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합니다(요 21:1,14). 그리고 재림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2:28이 그 예입니다.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지금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다”고 말할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깊이 연관된 의미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 즉 성육신 사건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 속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일 그 자체가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시공간 속으로 들어온 일이었습니다. 그 사랑이 특별히 누구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까?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나타났는데, 그 사랑이 우리인 교회에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신자들인 교회에 내주하면서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 지속적인 사랑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토대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시작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영원하고 지속되며 한 순간도 그침이 없이 부어지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반복될 수 없는 역사 속의 한 사건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정확하게 그 시제의 의미와 차이가 드러나지 않지만, 사도 요한은 지속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이 단 한 번의 역사적인 사건과 행위 안에서 나타났다는 의미를 ‘사랑하사’(완료형)와 ‘보내심’(부정과거)이라는 두 단어의 헬라어 시제를 통해서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궁극적 기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사도가 8절에서 말한 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9절은 사실상 3:16에 대한 부연설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3:16).”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실 목적으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 사랑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십자가의 사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5:8도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만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10절에서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화목제물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화목제물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미 2:2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오직 요한일서에만 2번 나옵니다. 이 화목제물이라는 용어를 통해서 사도는 두 개의 중요한 개념을 전합니다. 첫째, 속죄 더하기 하나님의 진노를 푼다는 개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단순히 죄값을 지불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푸는 죽으심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이 화목제물이 의미하는 첫번째 중요한 개념입니다. 두번째는 고대의 이교도들이 화가 난 신의 분노를 풀기 위해서 자식을 번제로 바치거나 그에 상응하는 제물을 드렸던 것과 달리,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드려진 제물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킨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를 풀기 위해서 스스로 드릴 수 있는 제물이 없습니다. 전 인류의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 이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없는 제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죄인의 편에서 제공해야만 할 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제공하여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도가 말한 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형제사랑으로 나타나는 사랑(11)
이렇게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서 역사 속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죽게 하시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하고 지속적인 사랑은 이제 다른 차원으로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교회 안에서 경험되는 성도들의 형제 사랑 안에서, 형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은 지속적으로 경험되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되면 좋겠다’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당위적 성격’을 가집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 사랑하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형제 사랑으로써 성도는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랑, 그런 은혜를 받았고 경험하고 누리는 사람입니다.”하는 고백이 말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형제 사랑을 통해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겠습니다마는,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사랑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랑을 많이 받아본 사람은 사랑을 줄줄 압니다. 인색함을 많이 겪은 사람이 인색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각자 겪은 삶의 경험은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모든 인생의 경험을 능가하고 초월하고 압도하는 경험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인색하고 자기 밖에는 모르는 이기적인 존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경험하고 나면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주는 사람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자기 재물을 아끼지 않고 허비하는 사람으로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단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하나님의 존재적 본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알고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공동체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기이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이 도무지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지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부르심입니다. 프란시스 쉐퍼가 교회는 기독교 최후의 변증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뜻이었습니다. 슬프게도 오늘날 한국 교회는 더 이상 말로 세상을 설득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20세기 말에 프란시스 쉐퍼가 보았던 유럽의 교회와 동일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교회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것을 형제 사랑을 통하여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역사 속에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서 나타났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의 형제 사랑을 통해서 다시 지속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교회의 본질이고 속성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알았고 경험했고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이시듯이 교회도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이와 같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듯이 교회의 사랑도 형제 사랑을 통하여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입니까?
이제 묻겠습니다. 우리는 교회입니까? 우리는 성도입니까? 우리는독생자를 보내사 화목제물로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롬 5:5)을 알고 경험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도 전에,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미워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살리시려고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사랑을 압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벧샬롬교회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구청에 이 명칭으로 법인으로 등록되어있고 건물 외벽에 붙여놓은 간판이 그러하니, 세상은 이 이름으로 우리를 알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 자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교회입니까? 세상의 단체와 조직으로 인정된 법인으로서의 교회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라는 교단에 속한 개교회로서의 교회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입니까? 아니,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는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교회임을 증거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매일 십자가에 못박으며, 자기 재물을 허비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기를 부인할 수 있을만큼 크고 압도적이고 우리를 삼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까? 자기를 추구하고, 자기를 방어하고, 자기 만족을 채우며, 자기 의를 쌓아가고, 자기 이름의 영광을 추구하는 삶에서 우리는 자유로와졌습니까? 우리를 살리사 그렇게 자유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내신 그 영원하신 사랑을 더 깊이, 더 풍성하게 알게 하시기를 간절히 구하십시다. 우리 평생에 그 사랑을 경험하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이라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형제를 사랑하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형제 사랑을 통해서 벧샬롬교회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을 지속적으로 이 세상에 나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은혜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