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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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5) - 형제 사랑의 토대이신 하나님

요한일서 4:7-8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8-21

말씀내용
이쯤에서 우리가 하나 정리하고 갈 것이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사도는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을 몇 가지 테스트 형식으로 제시해왔습니다. 첫째로 의로움이라는 도덕적 테스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하나님과 사귐이있다고 말하면서 의로움 가운데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형제 사랑이라는 사회적 테스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그는 형제, 즉 자기처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주장하지만, 형제에게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고 무관심이나 적대감으로 반응하며 이기적 자기 중심성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셋째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가 하는 교리적 테스트가 있습니다. 아무리 도덕적이고 사랑이 많은 듯 보여도 만일 사도들이 전한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이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서신 전체를 통해서 말해오고 있습니다.
바로 앞에서 영을 분별해야 한다는 교리적 테스트를 제시한 사도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인 형제 사랑이라는 사회적 테스트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미 앞에서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의 구조는 마치 나선형 계단을 오르는 것에 비유되곤 합니다. 오르다보면, “아까 거기 같은데”라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는 한 층이나 몇 층을 더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가령, 2:7~11에서 사도가 형제 사랑이라는 테스트를 제시했을 때 그는 참 빛과 관련해서 이 말을 했고, 3:11~18에서 역시 동일한 테스트를 영생 혹은 생명과 관련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 사도가 이 테스트를 제시하는데(4:7~21)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 자체에 연결됩니다. 그러니까 앞의 두 본문에서 말한 것은, 사실상 여기서 말하려고 한 것의 준비단계였다고 볼 수 있고, 이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사실상 형제 사랑의 테스트뿐 아니라, 서신 전체의 요점이고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몇 단락에 대한 연구는 마치 거대한 궁전에 있는 보좌로 통하는 작은 방들을 하나씩 통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작은 방들을 지나 보좌가 있는 중앙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심장이 점점 더 강하게 뛰는 것을 느낄 수 있다…그러나 이제 보좌가 있는 방의 문들이 활짝 열리고 영광의 그분 앞으로 우리가 인도를 받으면 그 장엄함이 우리를 압도하게 된다. 이 모든 일을 주관해 오신 영광의 그분이 바로 사랑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말은 이 서신의 구조에 대한 매우 적절한 비유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사도는 반복해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성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확신을 얻게 하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사귐의 기쁨을 풍성하게 해주고 싶어합니다.

1. 균형 잡힌 신앙?치우치지 않는 신앙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이 말은 헬라어로 “아가페토이 아가포멘 알렐루스”라고 읽습니다. 모두 ‘아’라는 소리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사도는 이런 음운에 맞춤으로써 일종의 강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자’는 말은 현재형 가정법으로 우리가 한 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합니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극단적인 성향은 우리의 본성에 잘 맞습니다. 극단적인 표현이나 구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균형있는 진리는 때로는 인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어서 어디론가 확 쏠려야 뭔가 된다고 느끼는 우리의 성향에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것이 언제나 힘이 있다고 믿는 선동가들은 그것을 십분 이용하곤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광신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좋은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 아닙니다. 전체가 아닌 어떤 한 부분에 미쳐서 다른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다른 세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한 부분에 소위 ‘올인’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고 옥한흠 목사님께서 주장하셨던 ‘광인론’을 들어보셨을지 모릅니다. 복음에 미치고 제자훈련에 미치지 않으면 주를 따르는 참된 제자일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으로 압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온전한 복음에 미치는 것이라면 거기에 이의를 달 수 없습니다. 우리는 광인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역시 문제는 자기가 주관적으로 이해한 그리스도 예수요, 오해된 복음이라면 문제는 심각해 집니다. 부정적 의미의 광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는 예수님께 미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올바른 ‘미침’은 다른 모든 것들을 거부하거나 과소평가 내지는 경시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가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이 있음을 알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수 1:7; 23:6). 그리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의심하고 사랑하지 않을 명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싸움을 하다보면, 자칫 사랑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의 경우일 것입니다. 그들은 온갖 이단들을 잘 분별해냈고 그들을 교회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입니다(계 2:4). 이것은 그들이 진리의 싸움에 매진하면서 경험하게 된 일종의 부작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하나의 경고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이 일에 있어서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마땅합니다. 단지 진리와 사랑의 문제에서만이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는 균형된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는 영을 분별하라는 말씀을 줌과 동시에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줌으로써 균형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형제 사랑의 토대
사도가 본문에서 다루고 싶어하는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형제 사랑의 의무는 어떤 토대에 놓여있는 것인가?
만일 이 토대가 그저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것에 불과하다면, 형제 사랑 또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주변적인 가치 이상을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 기독교의 본질, 요체에 토대를 둔 것이라면, 형제 사랑이 신자의 삶에 차지하는 비중은 가히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사도가 말씀하는 형제 사랑의 토대는 기독교의 요체요, 중추인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은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서 그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의 존재와 본성에 직결되는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적 특징인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도 요한은 그 유명한 명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4:8,16).

A.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
지금 말한 바와 같이, 형제 사랑의 토대에 대해서 사도가 제일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7절에서 사도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랑의 기원, 출처가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로써 사도는 하나님의 본성을 선언합니다(8). 즉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의 토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사도는 9~10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사도가 먼저 말하고 싶은 성도의 형제 사랑의 토대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 자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로써 사도가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사랑이 하나님의 많은 행동들 중 하나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는 것도 사랑하시는 행위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며 소멸하시는 불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랑이실 수 있으십니다.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은 빛으로서 우리의 죄를 드러내시고, 소멸하신 불로서 그 드러난 죄를 소멸하시는데 죄인을 파멸시키지 않고 구원하시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이것은 떨기나무가 불에 타고 있으면서도 소멸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점에서 하나님께 있어서는 정의와 사랑이 대립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면서 정의를 시행하실 수 있으시고, 정의를 시행하시면서도 동시에 사랑이실 수 있으십니다. 이런 말이 왜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고 말할 때, 보통 우리는 자기 방식대로 이해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사랑은 정의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면 왜 심판하시느냐고 묻게 되는 상투적인 질문들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을 오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비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은 바로 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B.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의 본성
이 말은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라는 말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형제 사랑이 하나님께 기원한 것이라면, 사랑하는 사람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형제 사랑을 거듭남과 연결시킵니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성은 형제 사랑으로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이 서신에서 처음 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말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DNA를 물려받았다는 말인데, 그 하나님 아버지의 DNA는 다름 아닌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이 특성을 공유하게 됩니다. 만일, 누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지 않고, 항상 불친절하고 비판적이고 형제들의 흠을 잡고 그것을 퍼뜨리는 일을 즐거워하고 몰두한다면, 그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는 소극적 성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사람들이 여러분의 형제를 비방하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그의 형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질상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사람을 형제로 둘 수 있습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는데도 어찌 그리 다른지 모릅니다.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모두가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형제이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이고 본성입니다. 비록 이런 저런 이유로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그를 불쌍히 여기고 축복하고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C. 사랑은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다.
사도는 7~8절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말합니다. 즉,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 즉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제가 영적 지식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순히 성경 지식이나 교리 혹은 신학 지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런 지식이 많아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영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헬라어로 보면,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보게 되는데, 7절에서 “하나님을 알고”라고 말할 때, ‘알고’라는 단어는 현재시제로 쓰였는데, 8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할 때 ‘알지 (못하나니)’는 부정과거 시제로 쓰인 것입니다. 왜 이어지는 문장에서 같은 동사에 대해서 사도는 시제를 바꾸어 썼을까요? 7절에서 현재시제로 ‘하나님을 알고’라고 한 것은, 신자가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를 지속적으로 갖는 것,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지속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8절에서 부정과거 시제로 ‘알지 못하고’라고 쓴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즉, 8절은 이런 말입니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그가 거듭났다면,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가 구원받은 성도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서 만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바르게 증가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더욱 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지식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확신을 더해줄 것입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제대로 자라가신다면, 여러분은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더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어디서 이 지식을 발견합니까? 성경의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이 우리의 삶이라는 시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경험적 지식이 됩니다. 이런 은헤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3. 교훈과 적용
영지주의자들은 참된 신앙은 영적 씨앗이 심겨져서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을 얻게 된 소수의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가르치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이 두 구절을 통해서 영적 거듭남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특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 사람도 이 말씀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적용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A. 그 사랑을 경험하기를 구하라.
먼저 사랑이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경험하기를 추구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형제를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길은, 사랑이신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입니다. 그분을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힘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그런 은혜를 입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기 위해서 시간을 떼어내십시오.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인식하십시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채울 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는 큰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까다로운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가 될 때, 우리는 그들을 형제로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B. 이 영광스러운 성품을 추구하라.
두번째로 하나님의 이 성품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형제 사랑 외에 다른 선택은 없습니다. 복수하고 되갚아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형제 사랑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기를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영예입니다. 이 영예로운 특권을 누리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과 마음을 드리십시오. 평생에 이렇게 사용한 시간보다 더 낭비되지 않은 시간, 가치있게 쓰여진 시간은 없을 것입니다. 형제 사랑은 단순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부과되는 의무가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그리고 형제 사랑은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는 영광스러운 성품입니다. 이 성품을 추구하십시오.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득한 교회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실로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벧샬롬교회가 그런 복된 은혜를 입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사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