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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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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2) - 확신을 구하십시오

요한일서 3: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7-31

말씀내용
요한일서 강해의 첫 설교 제목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에 정말 필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또 이 서신을 쓰는 사도의 의도도 확신을 주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두 주 동안, 형제 사랑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자기 믿음을 확증할 뿐 아니라, 확신을 얻게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만일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 없다면, 양심이 그를 책망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가질 수 없고, 또 기도의 확신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신은 이와 같이, 순종의 행위에 근거하여 주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이 24절에 사도가 말씀한 것인데,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주 안에 거하고 주께서 자기 안에 거하시는 자이며 그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단순히 내가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알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24절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이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압니까?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안다고 말하는 대신, 사도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안다고 말합니다. 지난 주일 이 부분을 설명하러 때, 이것은 확신의 영광스러운 차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의 확신은 그 자체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말씀하는 것은, 순종이라는 행위에 근거하여 아는 확신과는 다른 차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구하고 누리는 것이 성도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하기에 오늘 이 구절을 중심으로 이 주제를 별도로 다루려고 합니다.

1. 확신이 필요하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확신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은 정말 중요합니다. 신자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연약하고 희미한 믿음으로 살아가기에는 장애물과 유혹 거리가 너무 많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교리적인 면에서도 너무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 설령 정통 교단에 속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들어야 할만큼 타락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일서가 쓰여지던 당시와 그렇게 다른 환경이 아닙니다. 이단들이 독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서식지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신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진리를 알게 하시고 그들이 미혹당하여 구원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지켜 주신다고 말했습니다(2:20,27).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확신을 주려는 사도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사는 것은 신자에게 참 중요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만연한 하나의 문제는 자기 기만과 자기만족에 빠진 신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원받았으니까 됐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확신이 없이도 적당히 신앙생활로 규정된 것들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그런 외적 행위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 있는 것인데, 그 믿음의 참됨을 스스로가 어떻게 확인을 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칫 자기 기만에 이르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하나의 지적 동의로 여기는 태도도 자기 기만의 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예수님을 보내주셨다는 것과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저 지적으로 동의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은 실재가 아닌 관념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신앙은 지적 동의 이상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전인격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으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가슴으로 알고 의지로 순종하는 일이 수반됩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을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한낮 지적 동의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열망할 것입니다. 더 이상 누가 그에게 기도하라고 독려하거나 권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 목을 매고 살거나 미련을 가지고 살던 전과는 달리, 그는 하늘을 사모하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품게 될 것입니다.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교회는 교회답게 변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2. 확신에 관한 몇 가지 기본 원리들
그렇다면 우리가 확신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전에, 먼저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몇 가지 관련된 원리들을 짚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 믿음은 있지만 확신이 없는 신자
첫째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확신으로 얻지 않습니다. 참된 신자라고 할지라도, 확신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두 사람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은 두려움씨(Mr. Fearing)이고 또 한 사람은 소신(Little-faith)이라는 인물입니다.
두려움씨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부족함을 알기에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복음을 들었고, 더 이상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의 결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신자는 절망과 낙심, 두려움의 포로가 되기 쉽고, 별것도 아닌 말이나 일에 상처를 받고 낙심을 하게 됩니다. 이런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입니다.
또 한 사람은 소신입니다. 이 사람은 순례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전 재산을 거의 다 빼앗깁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보석은 잃어버리지 않았고 증명서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아무리 연약하고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복음(아름다운 것)을 지키게 해주시며(딤후 1:14), 시험에서 건지신다(벧후 2:9)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신이 남은 순례길을 가는 동안 그 보석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인데, 그것은 그가 보석의 존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보석이 생각나면 위안을 받기는 했으나 그럴 때면 어김없이 자기가 잃어버렸던 돈 생각 때문에 마음이 거기에 온통 사로잡히곤 했습니다. 그는 남은 길을 슬프게 가면서 만나는 사람만 있으면 자기가 도둑들을 만나 고생하게 된 이야기만 합니다.
그는 복음과 믿음의 능력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냅니다.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당하는 어려움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받은 복음과 보배로운 믿음의 은혜와 복락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연약한 믿음을 가진 신자를 묘사합니다.
이와 같이, 설령 참된 신자가 믿음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확신을 누리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B. 사탄의 집요한 공격으로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확신과 관련한 또 하나의 문제는 사탄이 집요하게 신자를 공격해서 확신을 빼앗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자는 회심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고 혹은 더 나쁜 상태로도 될 수 있습니다. 종종 이것은 죄에 빠지는 경우와 관련이 됩니다. 하지만 사람이 완전히 타락하여 배교를 하게 되는 경우와는 달리, 비록 처참한 영적 형편으로 떨어지기는 하였으나 다시 회복이 될 것입니다.

C. 기질상의 이유로도 확신을 잃어버릴 수 있다.
이외에 신자는 기질 상의 이유로도 확신을 잃어버리고 무서움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사탄의 집요한 공격으로 확신을 잃은 신자와 마찬가지로, 말씀의 위로를 통해서 믿음의 자리를 회복하게 됩니다.

D. 거룩의 수준과 확신의 수준은 비례한다.
네번째로 다룰 원리는 신자가 거룩의 낮은 수준에 머물러 살아가면서 높은 수준의 확신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확신을 가졌다고 하면서, 그 확신이 우리를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하며,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앙은 잘못 되었다는 생각도 문제입니다. 이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바로 “아멘”이라고 말하도록 훈련된 풍토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3. 성령님께서 증언하시는 확신(롬 8:16)
본문이 말씀하는 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서 8:16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님께서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고 증거하신다고 말합니다. 시편 35:3에서 다윗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 말은 전쟁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다면, 다윗은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이 전쟁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도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가 겪게 될지도 모르는 고난과 어려움도 감당할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흔들리더라도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님께서 친히 증언하신다는 말은 단순히 우리 마음이 느끼는 수준을 넘어 훨씬 더 큰 수준에서 체험적으로 우리가 알게 되는 확신을 말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확신은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는 체험입니다. 이것은 또 구원의 사실 뿐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확신하게 합니다. 찰스 시므온은 “이 체험이야말로 전생을 드려서 거룩하게 되려고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였던 자들에게 오는 가장 높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체험”이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굳윈은, “천국을 제외하고는 이것은 능가할 체험이 없다”고 말할 만큼, 성령님께서 신자 자신에게 증거하시는 확신은 놀라운 것입니다. 이런 확신은,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을 느끼게 하고(롬 5:5), 현재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할만큼 영광스럽고 강력합니다. 탁월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인, 사라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진 나머지 나는 다른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나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던 매분마다 느끼는 것이 내가 생애 전체를 통해서 누렸던 외부의 위안과 즐거움 보다 더 가치 있었다고 생각한다.” 종종 이런 확신은 감정을 동반합니다. 19세기 웨일즈의 설교자인 크리스마스 에반스의 말입니다. “나는 내 마음 전체가 어떤 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하나님이 은혜롭게 찾아오심에 대해서 소리 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내 영혼에 그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 은혜를 감격하여 울었다.”

4. 성령의 확신이 주어지는 때
물론 이런 성령의 확신은 신자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신자는 이런 체험이 없이 살다가 죽기도 합니다. 또 그런 체험이 주어진다고 해도 그 확신은 남은 생애에 내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법칙으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시간에 그런 확신을 주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신자가 장래에 어떤 환난을 당해야 할 때,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성령의 확신을 주심으로써 그 환난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공동체적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1907년 평양 산정현 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도 그렇습니다. 이 부흥 이후, 1910년에 우리나라는 일제에 강점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흥의 은혜를 통해서 고난을 준비하게 하신 경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확신은 종종 임종 직전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기도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마귀가 신자를 가장 깊은 두려움으로 몰아가려고 할 때, 성령의 확신을 얻으면,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영광스럽게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임종의 시간에,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확신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여주신다면 우리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임종을 맞게 되겠습니까?

5. 이 확신을 구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이런 확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에서 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중에서도 그런 확신을 체험하고 아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확신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시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태도로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이 확신을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도 베드로의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벧후 1:10).”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여러분, 이런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체험 자체를 추구하는 것 보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 온전하게 알기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머리의 지식이 아니라, 친밀하고 경험적인 방식으로 알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확신을 어려분의 믿음의 목표로 삼으십시오. 스펄전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믿음을 구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믿음을 주실 때 확신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이 확신을 얻을 때 더 충만한 확신을 위해 간구하십시오. 또한 충만한 확신을 얻게 될 때, 그 즐거움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즐거움을 얻게 될 때, 영광 자체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는 분명히 그가 정하신 때에 그것을 당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18세기의 위대한 설교자인 조지 윗필드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확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것은 무서운 실수이다. 또한 그것이 초대교회 시대에나 박해 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서운 실수이다. 확신의 결과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화평과 기쁨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비록 즉각적인 확신을 가지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하려고 애써야 한다. 나는 실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평생 신음하면서 보내는 큰 이유 중 하나는 자기들이 누릴 그리스도인의 특권들을 모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것을 간구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그것이 이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침받았기 때문에 그것을 구하지 않는다. 반면에 나는 마치 태양광선으로 그 마음에 기록한 것 같은 체험을 가진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고 사람들과 마귀들에게 할 수만 있으면 그들의 주님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들을 끊어보라는 도전을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구세주요, 당신의 제자들의 마음을 밝히사 그 특권을 알게 해주시고 당신께서 그들을 축복하사 그들이 영원한 구원을 확신하기까지 당신과 씨름하는 일을 멈추지 말게 하소서.”
윗필드의 이 말로써 우리가 하나님께 성령의 확신을 구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교회는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지 모르지만 능력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모든 외양과 형식을 다 갖추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힘이 없습니다. 19세기의 스펄전이 당대의 교인들에게 던진 도전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스스로 충만한 신자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넘치도록 나눠주는 유용한 신자로 만들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저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런 신자들로 우리를 만들어주시기를 기도할 마음이 생깁니다. 스스로 충만한 신자가 아니라, 남들에게까지 넘치도록 그 은혜와 그 확신을 나눠주는 유용한 신자로 우리 벧샬롬의 지체들인 여러분을 만들어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