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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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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1) - 형제 사랑과 기도

요한일서 3:19-24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7-24

말씀내용
우리는 지난 두 주일에 걸쳐서, 자기를 희생하는 형제 사랑이 신자의 참된 표지이며 그것이 신자의 양심에 주는 확신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신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참된 믿음을 입증하고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확인하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하지 않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사도는 계속 말합니다. 이 문제가 우리 마음에 걸려 있으면, 우리의 기도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형제 사랑과 깊이 연결되었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믿음과 사랑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분리될 수 없다는 것뿐이 아닙니다. 기도 생활도 형제 사랑에 절대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좋아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형제를 사랑하기 보다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례들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것은 정확하게 주님께서 묘사하셨던 바리새인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였습니다(눅 18:9). 주님께서는 신앙생활이 이렇게 잘못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배우는 중요한 교훈은, 형제 사랑과 기도 생활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도 함께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1. 경외함과 담대함(21)
사도는 21절에서 ‘담대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2:28에서 언급했던 것인데, 거기서는 주님의 재림 때 신자가 가지는 담대함을 말했다면,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 기도할 때 가지는 담대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거룩하고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없는 시대에 본문이 말하는 담대함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경외감을 느끼십니까? 이것이 우리 신앙에 얼마나 본질적인 질문인지 아시겠습니까?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 아니라 만물을 심판하실 심판주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실 뿐 아니라 공의로우시기에 거룩의 기준을 따라, 죄인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 나타난 무한히 자비하고 은혜로우심을 통해서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가지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하고 기도하고 예배할 때마다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것이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모세가 불붙은 떨기나무 앞에서 들었던 바,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는 음성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외칠 때, 그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외친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개념, 이런 느낌을 잃어버렸습니다. 강단과 예배에서, 그리고 신자들의 삶에서, 공동체의 교제 안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하나님 경외함입니다. 그리고 자리를 채운 것은 천박함입니다. 성경이 우리 신앙의 요소를 언급할 때 가장 근본적인 개념으로 제시하는 것이 경외함이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정말 두려워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외함이 없는 신앙이 신앙일 수 있을까요? 경외함이 없는 기도가 기도일 수 있나요? 우리의 신앙에서 경외함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경외함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근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이 말하는 것은 경외함이 아니라 담대함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경외해야 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담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경외함과 담대함이 양립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신앙의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담대함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두려움의 감정이 아닙니다. 이것을 놀랍게 묘사하고 있는 시편의 두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시 2:11).” 경외하여 떨면서도 동시에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말하는 담대함입니다. 또 한 구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친밀하심이 주어지는 대상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친밀함이야말로, 신비로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을 C.S.루이스가 잘 표현했습니다(지난 12월 민수기 강해에서 이 부분을 이미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나니아 연대기』에서 비버 부부가 루시에게 아슬란을 소개하는 장면입니다.
“그, 그는 사람이죠?”하고 루시가 물었다.
“아슬란이 사람이라! 분명히 아니지. 그가 숲속의 왕이며 저 바다 너머의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고 말했잖니. 누가 동물의 왕인지 모르겠니? 아슬란은 사자란다. 사자, 위대한 사자란 말이다.”라고 비버씨가 엄하게 말했다.
“우와! 나는 그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위험하지 않은가요? 난 사자를 만나면 좀 무서워요.”라고 수잔이 말했다.
“얘야, 아마 넌 분명히 그럴거다. 그리고 아슬란 앞에 무릎을 덜덜 떨지 않고 나타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가장 용감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단지 바보일거다”하고 비버 부인이 말했다.
“그러면 그는 위험한가요?”라고 루시가 물었다.
“위험? 넌 비버 부인의 말을 듣지 못했니? 누가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든? 물론 그는 위험하단다. 그렇지만 그는 선하단다. 그는 왕이란 말이야”라고 비버씨가 말했다.
여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과 하나님 앞에서 신자가 가질 수 있는 담대함이 함께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시는 그 아슬란 앞에서 두려움과 함께 담대함을 가지고 대하는 것을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내내 보게 됩니다.
사도가 지금 여기서 말씀하는 ‘담대함’은 어떤 것입니까? 언제 그런 담대함을 가질 수 있습니까?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그래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을 때 그 담대함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형제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기도 생활에 절대적으로 연결됩니다. 자기 마음에 자책이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고 자기 기도가 상달되거나 응답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정확히 같은 의미입니다.

2. 확신 안에서 하는 기도(22)
사도는 22절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이 구절은 오해받기 쉬운 구절입니다. 기도 응답이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면 주어진다고 읽을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려는 것은, 이 조건을 만족시키면 기도가 응답된다는 게 아닙니다. 사도는 형제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은 응답받는 기도의 토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이 계명을 지켜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를 행한다면, 그는 의당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할 것이고,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구할 것입니다. 계명 지킴과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은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3~24)”. 이 말씀은 이 본문과 정확하게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말은,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기뻐하시는 바와 일치된 것을 구한다는 의미지, 이기적 욕구와 탐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다 주신다는게 아닙니다. 기도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에 자기 뜻을 예속시킨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서신 말미에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요일 5:14)”이라고 한 말이 이와 같은 의미입니다.

3.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23)
사도는 22절에서 자신이 말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23절에서 설명합니다.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이 말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단순히 형제 사랑만이라고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여기서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두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이 전체 맥락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을 다시 못박듯이 다짐하는 10~24절의 결론입니다. ‘믿는 것은 필수이고 사랑하는 것은 선택’이라는 시중의 잘못된 오해를 교정하는 결정타입니다. 누구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믿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됩니다(갈 5:6).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순종해야 하고 또 믿음에 대한 요구에도 순종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정한 토대입니다. 그런데 믿음과 사랑을 묘사할 때, 사도가 다르게 표현한 것 하나가 있습니다. ‘믿고’와 ‘사랑할 것’의 두 동사의 시제를 다르게 쓴 것입니다. ‘믿고’는 부정과거라는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단 한 번 결정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을 강조합니다. 반면, ‘사랑할 것’은 현재 시제인데, 이것은 반복적, 지속적으로 사랑하는 태도를 강조합니다. 형제 사랑이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계속 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형제 사랑은 신자 평생에 결코 중단할 수 없고 중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을 수 없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형제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과 사랑의 본질적 연합을 요구합니다.

4. 성령의 확신(24)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마지막 결론인 24절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말하려는 확신은 형제 사랑이라는 순종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다가 아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제 사랑은 하나님의 진리에 부합하는 행위이며, 그 진리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것임을 앎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 응답의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라는 점은 분명히 사도가 말한 바입니다. 그러나 순종의 행위로부터의 오는 이런 확신은 유익하면서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행위에 기초한 확신은 자기 공로를 의지하는 자리로 갈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확신의 영광스러운 차원을 이제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시는 확신입니다. 순종의 행위에서 주어지는 확신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자녀의 영에 친히 증거하시는 확신에 자리를 양보하게 됩니다. 이 확신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단지 내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고 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구나’를 아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하시는 차원의 확신이 있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주관하심을 압니다. 영적 분별력이 생깁니다(고전 2:12~15). 그리고 영적인 일들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말의 뜻입니다(롬 8:5~6). 그리고 전에 없이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고 그 죄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사도 요한이 24절에서 쓰고 있는 내용입니다.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안에 내가 거하고 하나님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지를 아는가 하면 믿는 자에게 주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가 하면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해서 압니다. 이것은 우리 지식의 궁극적 원천이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신비한 확신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9).” 이런 확신이 어디서 나옵니까?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신 성령님께서 주시는 확신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확신은 결코 사도가 처음에 말한 바, 형제 사랑을 통해서 이르는 확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함으로써,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을 사도는 논박합니다. 계명에 순종하는 것과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은 나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형제 사랑이라는 이 중차대한 계명을 등한시하는 사람이 성령의 확신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5. 적용과 교훈: 온전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온전한 균형을 이루는 총체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성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닮아 아름답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일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영적 확신을 누릴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지 못하고, 기도도 막힐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이 있느냐의 여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자기 마음에 자책이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설 수 없고 기도가 상달되거나 응답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성 아래 있는 사람, 즉 하나님 안에 있고 또 그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그가 하나님과 가지는 영적 관계의 온전함과 충만함을 멋지게 드러냅니다. 이렇게 형제 사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확신은 오직 하나님과 진리에 닻을 내릴 때 주어지는 흔들리지 않음이지, 결코 확신의 느낌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노력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형제를 미워한다면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는 것은 당연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기도가 문제가 없다면 여러분은 위선자이거나 자기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런 사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물며 우리를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얼마나 역겨워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용서받았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믿는 자들은 그 가슴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자들이며 그 사랑은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형제 사랑의 모든 원천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일 3:16; 4:11, 19).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몇 주에 걸쳐 우리에게 권고하시는 말씀을 잘 새기십시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당신 자신을 주시는 사랑,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생활을 단지 기도와 성경읽기에 가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 말씀 앞에 반응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녕 이 말씀을 들었다면, 여러분이 정녕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여러분은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의 신앙이 드러날 수 있게 된다면, 교회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기도는 전에 없는 확신과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여러분 안에 자기를 희생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막는 비열한 생각이 들어올 때마다 여러분은 자신을 설득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 보다 크신 분이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경고하고 책망함으로써 설득하셔야 합니다. 물론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격려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주님의 이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정직한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닮은, 아름다운 신자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들로 하나님의 교회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