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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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강해 (20) -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

요한일서 3:19-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6-07-17

말씀내용
지난 주일에 우리가 상고한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그 형제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닌 자기 희생으로 표현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노파심에서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웃 사랑이 아니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참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또 다른 하나님의 자녀를 알아보고 그를 사랑합니다. 이 형제 사랑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요 증거입니다.

1. 진리에 속한 자(19a)
19절 상반절을 보지요.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사도는 18절에서 말한 것을 정확히 받아서 말합니다. 18절에서 사도는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권면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은 같은 의미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식이고, ‘진실함’은 ‘진리 안에서’ 혹은 ‘참됨 안에서’(in truth)라는 뜻입니다. 명제로 나타날 때 그것은 진리를 의미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에는 ‘참됨’ 혹은 ‘진실함’을 의미하게 됩니다. 진실함은 옳든 그르든 마음이 진실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진실함이 아니라, 그 행위가 정확하게 진리에 토대를 두고 있고, 옳은 행동이며, 마음으로부터 나온 정직한 행동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18절에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한 말은 곧 “네가 믿는 진리에 부합하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네가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너의 그 행위는 진리에서 나온 것이며, 진리에 속한 사람임을 증명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참된 그리스도인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합니다. ‘진리에 속했다’는 말은 참된 그리스도인, 진리이신 그리스도께 속했다는 말입니다(요 18:37). 여기서 우리는 사도가 요한일서를 쓰는 전체 맥락이 격려이고 위로라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사도는 낙심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고 확신에 이르게 하고자 서신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자, 이제 너희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었지?”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사도는 이 말을 들을 때, 너희 마음이 너희를 책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2. 격려인가, 경고인가, 책망인가?
먼저 19절 하반절을 건너뛰고 20절로 가겠습니다. 20절에서 사도는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 다시 말하면 양심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을 말합니다. 형제 사랑으로써 당신의 믿음의 참됨을 드러내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외부적 평가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양심의 소리입니다. 양심은 우리 내면의 재판관입니다. 물론 양심은 솔직하고 정직하지만, 상황과 마음의 사정에 따라서 좌우되는 경향이 많은 불완전한 재판관입니다. 아주 심한 경우, 양심은 사탄의 도구가 되어서 우리를 부당하게 정죄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양심은 중요하지만 절대적이 되면 위험합니다. 이 점을 유의해서 우리는 이 말씀을 살펴야 합니다. 사도는 먼저 양심의 소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더 다루기 전에, 먼저 19절 하반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는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사실, 19절 하반절과 20절은 해석하기 매우 어려운 구절입니다. 이 내용은 격려일까요, 경고일까요? 아니면 책망일까요? 만일 형제 사랑으로써 신앙을 입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마음에 확신을 얻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낙심하는 편이겠습니까?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양심이 절대적 기준을 가지고 완전히 의로운 판단을 하는 최종 재판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양심의 기준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양심의 문제로 보면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응할 것입니다. “아, 나는 형제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는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럽기만 하구나. 내가 이제껏 살면서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형제를 사랑했는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구나.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란 말인가?” 이와 같이 예민한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는 의기소침하고 확신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연약한 신자들을 생각했고 그들을 위해서 뭔가 격려를 해야겠다고 느꼈을 수 있습니다. 대개 이런 것은 기질적으로도 나타날 수 있지만, 질병이나 실패와 같은 일시적 상황 때문에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형제 사랑으로 신앙을 입증하는 것이라면, 100점은 아니어도 그래도 잘 해오고 있지 않았는가?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정성껏 형제들을 대해오지 않았는가? 아,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구나!” 물론 우리는 이 반응에 대해서 전적인 신뢰를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를 기만할 만큼 마음이 부패했기에, 어쩌면 양심도 그 자기 기만의 신하로 일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런 거짓된 확신을 가지는 경우라면, 그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가 아니라 경고일 것입니다.
또 한 경우를 제시해보겠습니다. 어쩌면 이 경우가 우리에게 더 보편적일지 모르겠습니다. 형제 사랑으로 믿음을 입증하라면, 우리는 당장 어떤 일이 마음에 걸릴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정작 한 형제를 위해 물질 혹은 시간을 내주었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일들이 생각날지 모릅니다. 형제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하겠는데, 정작 나 자신의 상황을 보면서 고민에 빠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이런 이유, 저런 핑계로 행함과 진실함이 드러나지 않는 경우, 자신의 불편함 때문에 내키지 않는 상황에서 순종을 보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가 아니라 책망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세 가지 개연성이 있는 경우를 제시했습니다. 물론 저는 아예 명백하게 신자가 아닌 경우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봐도 전혀 마음이 끌리지 않고, 오히려 세상적으로 매력적인 사람들을 볼 때 훨씬 더 마음이 가고 사랑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았습니다. 이는 명백한 불신자임을 드러내는 경우입니다. 사도는 지금 신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유형 중 어떤 유형에 가깝습니까? 스스로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3. 마음을 굳세게 하라(19b~20)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할 단어는 ‘굳세게 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주로 ‘설득하다’ 혹은 ‘확신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아주 드물게는 ‘안심시키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도는 어떤 의도로 이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첫번째 사람의 경우라면 안심시키기 위해서 사도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번째 경우, 가볍게 자신들의 믿음을 확신하는 자리로 가고 있다면 뭔가를 ‘설득함으로써’ 그들에게 경고를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세번째 경우는 어떻습니까?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 걸려서 정작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일을 최소한으로 하든지 아니면 미루는 사람이라면, 사도는 그들을 ‘설득함으로써’ 책망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의 문장, 하나의 동사를 통해서 다양한 신자들의 다양한 마음을 향해서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령님께서는 사도의 이 서신을 통해서 다양한 우리의 모습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A. 격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역은 확실히 안심시키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번역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는 말에 대해서 논리적 연결로 보자면, “그래서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이로써 우리는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굳세게 세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20절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심령이 예민하고 약한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들이 형제를 사랑했어도 부족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또 형제를 사랑해왔다고 해도 여전히 제대로 하지 못한 어떤 일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양심(마음)은 그들을 책망할 것이고 정죄할 것입니다. “너, 그 때 왜 그 형제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였느냐?”고 묻는 양심의 소리에 대답하지 못하고 자책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20절에서 말한,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때 신자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사도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될 때, 신자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와 자비와 선하심은 우리를 책망하는 우리 마음 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약함과 죄악을 덮고도 남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는 큽니다. 신자는 여기서 위로와 격려를 얻어야 합니다. 그 은혜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났고 우리의 구속을 완성한 은혜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저주한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던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내 연약함, 내 실패, 내 죄악을 다 아시는 주님,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또한 나를 용납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첫 경우에 속한다면, 사도가 지금 말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굳세게 하여 안심하고 평안한 마음을 얻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죄감 아래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심이 찾아올 때, 신자는 지식에 기초해서 자신의 믿음을 세워가야 합니다. 그 지식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을 아는 지식입니다.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의존하는 신앙은 결코 건강하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신앙입니다. 바른 신앙은, 자기 감정을 복음의 사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아래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이 일어날 때, 자기의 실패를 돌아보는게 아니라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의심의 감정에 몰입되는 대신, 객관적 복음을 돌아보고 그것을 증거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신뢰하는 대신 하나님의 사면 판결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든지, 우리는 우리를 사해 주신 하나님의 판결과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존 스토트가 말했듯이, “지식에 의해서 우리 마음의 의심은 침묵 당해야 합니다.”

B. 경고
두번째 사람의 경우에서 이 말씀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경솔한 자기 만족에 빠지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니까 진리에 속한 사람이지. 사람은 완전할 수는 없잖아? 나만큼 하는 사람도 없지 않은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요한일서 전체와 19~24절 본문이 전체적으로 격려와 확신을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19절 하반절과 20절은 신자들이 이런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20절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양심이 판단하는 것과 비할 수 없이 완전하게 판단하시므로 그 판단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우리 양심도 우리를 판단하거늘,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20절은 이런 의미가 됩니다.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있다면 우리 마음보다 크시며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더욱 엄격하게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라는 사실로 자신을 설득하고 값싼 자기 만족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사도는 분명히 형제 사랑을 참된 신앙의 표지로 보고 있지만, 단순히 그리스도인의 확신이 그 수준에 머무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높고 영광스럽고 신비한 차원의 확신이 있다는 것을 사도는 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만족하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행위로부터 오는 확신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C. 책망
세번째 경우입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많이 처하게 되는 입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도는 형제 사랑은 말로 하는게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라고 했고, 형제 사랑의 표는 자기 희생이라고 말했습니다. 형제 사랑의 원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일입니다. 형제 사랑은 물질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희생한다는 말은, 내가 가진 것이 많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꼭 필요로 하지만, 형제를 위해서 내 필요를 포기하고 물질을 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며, 프라이버시를 양보하는 것이고 자신의 성향을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가 형제 사랑을 이렇게 제시했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아, 정말 쉽지 않구나!”하는 마음 아닙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형제 사랑은, 참된 신자의 영적 본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다른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영적 본능을 가집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영적 본능을 따라서 힘을 다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사도가 권면한 의도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삶은 결코 저절로 살아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중생으로써 우리에게 주신 새 마음을 따라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빌 2:12~13).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영적 본능을 따라 행하지 않고, 인색함이나 이기적인 정욕을 따라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형제를 사랑하기를 거부한다면, 제일 먼저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할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보다 크사 우리를 엄정하게 다루시는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자신을 설득하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의 책망은 어떠하겠습니까?
우리 마음보다 크신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비열한 마음 같은 것을 갖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과 긍휼하심은 우리가 가진 마음과 가히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위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분이시라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 속의 비열함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일에 더욱 자신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마음의 비열함을 따라 행하는 모든 것을 아시고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는 법이 없으시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이렇게 요구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삼가 너는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일곱째 해 면제년이 가까이 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를 악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그것이 네게 죄가 되리라(신 15:7~9).”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에게 19절 하반절과 20절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비열한 마음을 극복하라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신자는 그런 비열한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을 설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며, 모든 것을 아신다는 사실로써 자신을 설득하고 자기를 희생함으로써 형제 사랑을 순종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양심이 우리를 책망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설득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4.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담대함(21)
오늘 말씀이 우리 신앙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양심이 여러분을 책망한다면, 여러분은 결코 정상적인 신앙 생활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적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오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알 수 없습니다. 기도의 만족을 모르기에 기도는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 말씀하듯이,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단순히 가벼운 자기 만족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참으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담대함은 이미 2:28에서 살펴보았습니다. 2:28은 최후의 심판 자리에 설 때 담대함을 얻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담대함은 문맥상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이 담대함은 심판주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담대함이라기 보다, 아버지 앞에 매일 나아가는 자녀의 담대함에 가깝습니다. 이 담대함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인지 모릅니다.
로마서 8:1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서 정죄함을 거두어가시는 것일까요? 마음에 정죄함에 대한 느낌이 있으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고, 형제들과의 사귐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처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심으로써 정죄함을 거두어가사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은혜로 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쁘고 영광스럽게 받으시는 섬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만 영광과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우리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됩니다. 신앙 생활 전부가 다 바뀝니다. 여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양심이든, 아니면 쉽게 자기 만족에 이르게 하는 양심이든, 우리는 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일에 근거하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는 건강하고 성숙한 신자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