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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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강해 (2) - 형제에 대한 신실함을 회복하라

말라기 2:10~3: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1-07

말씀내용
70년 포로생활에서 귀환하여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서 제2성전을 지었고(BC 516), 총독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서 예루살렘 성벽도 완공하였지만(BC 445), 선지자들이 말했던 것과 같이 천지를 진동하는 역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유다 백성은 여전히 진저리 나는 가난과 주변의 압박 아래서 식민지 백성의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식어갔고, 하나님께 섭섭한 마음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마음은 그들의 예배인 제사를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백성들은 어차피 죽을 짐승이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하나님께 가져왔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제사장들이 이런 제물을 마다하지 않고 받았으며, 거룩함과 더러운 것, 정함과 부정함에 대한 율법의 기준을 가르치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발하시면서, 또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예배가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예배는 괜찮습니까?

1. 리뷰: 경외감이 없는 시대
말라기서가 보여주는 5세기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에서 저는 오늘날 21세기 한국교회의 모습을 봅니다. 예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경외감과 신비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널드 맥컬로우의 말입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를 방문해보면 교인들이 정확한 교리적 입장에 잘 맞고 사회개혁운동에 막대한 후원을 제공하고 개인적인 영적 경험을 추구하게 하는 하나님과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있는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경외감과 신비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유일하게 땀이 나는 손바닥은 설교가 성공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닌지 불확실한 설교자의 손바닥이고, 유일하게 떨리는 무릎은 봉헌송을 하는 독창자의 무릎일 것이다.”
거짓 신이나 우상의 특징은 섬기는 사람의 마음에 맞고 다루기 쉬운 유용한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은 결코 우리로 경외감에 떨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도와주는 조력자일 뿐입니다. 이런 신 개념은 너무나 쉽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파고 들어왔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거짓 신이 가득한 느낌입니다. 그 일차적 책임은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거의 말하지 않은데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체계 안에 들어와 갇힐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머리 속에 내가 이해한 하나님은 담을 수 있어도, 거룩하신 하나님은 담을 수 없습니다.
25년간(1940~1965) 휘튼 대학 총장을 역임했던 레이몬드 에드먼(V. Raymon Edman) 박사는 은퇴 후, 1967년 가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였지만 특별히 대학 예배의 강단에 섰습니다. 그는 <왕의 임재 앞에서>라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의 경외감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를 원했습니다. 그 자리에 학생으로 참석했던 도날드 맥컬로우의 말입니다: “예배는 진지한 행위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이디오피아 황제를 방문했을 때를 상기했다. 황제 앞에 나가기 전에 주어지는 지시 사항들, 그가 따라 해야 했던 외교 의례, 황제 앞에서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어떻게 절을 했나를 설명하면서 우리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 말을 마친 순간에 에드먼드 박사는 설교단에서 쿵 하고 넘어져 마루에 쓰러졌으며,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앞으로 갔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적어도 잠시나마 우리는 생명을 맛보았다. 하늘과 땅 사이를 구분하는 선이 갑자기 없어졌고, 다음 시간에 치를 시험과 주말에 가질 데이트를 걱정하는 대학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앞에 천사들과 천사장과 함께 있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주 하게 된다. 아마도 오늘날 예배 중에 가장 소홀하게 되는 때는 예배가 시작될 때일 것이다...우리는 전능하신 분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예배를 시작할 때 조용하게 묵상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레이몬드 에드먼 박사가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가르치려고 했던 하나님 경외함은 여전히 오늘 우리 교회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함께 경외감을 회복해야하는 것은 이 시대 기독교회가 가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말라기서를 읽을 때, 이 요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2. 형제 관계가 영적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유다 백성의 영적 상태가 저조한 이유는 단지 지도자인 제사장들의 책임이나 예배만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총체적으로 무너져 있었습니다. 본문 10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은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 영적으로 저조한 이유는 그들이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며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신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형제를 속이고 배신하는 태도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 같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만큼 영적 혼돈과 무감각 속에 떨어지게 된 이유는 그들의 형제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는 것이 언약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형제와 맺는 관계는 절대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와의 관계에서 거짓을 행한 대표적인 경우를 두 가지로 지적하시는데, 이방 여인과의 결혼과 이혼의 문제였습니다.

A. 이방 여인과의 결혼(2:11~13)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를 11~13절에서 먼저 다룹니다. 11절에서 하나님은 이것을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바라보는 성경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혼은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 됩니다. 유다 백성은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에도 파괴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이 맺었을 뿐 아니라, 이 언약 관계에 의해서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연합을 누리는 것이기에, 이방 여인과의 결혼은 이 모든 것을 깨뜨리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12절에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여기서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아마도 권하는 사람과 권함을 받아서 그런 일을 수동적으로 한 사람들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이 적극적이었든지 소극적이었든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끊어내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물론 유다 백성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그다지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믿음을 배반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는 문제였고, 또한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는 문제였습니다. 이것이 형제 관계에서 지적하시는 첫번째 문제였습니다.

B. 이혼과 학대(2:14~16)
하나님께서는 이어서 이혼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백성들은 왜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봉헌물(제물)을 받지 않으시냐고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13~14). 그들은 하나님께 “어찌됨이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십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유다 백성이 아내를 학대하고 이혼함으로써 아내와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이 맺는 관계가 아닙니다. 결혼은 언약에 기초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증인이 되시는 관계입니다. 결혼 관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말씀하셨기에 이것을 사람이 마음대로 나눌 수 없습니다.
15절에,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달리 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 둘을 하나로 만드신 아담과 하와의 결혼 연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드신 것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이 결혼입니다. 결혼의 하나됨은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맥락에서만 가능하고 이해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것은 유다의 남편들이 이런 신성한 결혼의 관계로 맺어진 자기 아내를 폭력으로 학대함으로써 이혼을 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옷으로 학대를 가린다”는 표현은 폭력적 악행으로 자신의 인격을 더럽히는 행위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유다의 남자들은 자기들이 어려서 취한 아내, 언약으로 하나가 된 아내를 버렸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강자로서 약자인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고, 아내를 짓밟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고 하신 것은 이런 유다 남편들의 폭력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는 문제이고 믿음을 저버리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은 언약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우리 구원의 근거로 삼으십니다. 히브리어 헤세드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언약에 근거한 사랑임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희가 영적인 회복,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다면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5b, 16b).
결혼과 이혼의 문제는 더 넓은 형제 관계로 확대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했다는 것입니다(10). 이것이 일반적인 관계도 아닌 심지어 부부관계에서 나타났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런 거짓이 형제를 대하는 나의 성향, 패턴이 되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언약을 파기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양한 관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터나 가정, 어디를 막론하고 여러분이 가진 지위나 힘을 이용하여 형제를 합당하게 대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것이고, 신앙을 팔어넘긴 것이며, 그 신앙은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는 물론이고 일터나 가정에서도 동일합니다. 가령, 그리스도 안에서 고부 관계는 달라야 합니다. 고부 이전에 새계명 아래서 만나야 하는 그리스도인 자매들입니다. 또 직장에서의 상하관계라 할지라도 그리스도들 안에서의 관계는 특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났기에 더 사랑하고 더 충성스러워야 합니다(딤전 6:1~2; 골 3:22~24).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에게 신실하고 충성스러워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거짓으로 형제를 대하거나 먹은 마음을 가지고 형제를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하나됨을 깨는 것입니다. 부부의 하나됨의 언약을 지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의 적용입니다. 부부관계에서 거짓과 배신과 학대와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 경건 모두 정상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심판의 날이 다가온다(2:17~3:6)
그들은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괴롭게 해드리고서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또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고 말했고, “정의의 하나님 어디 계시냐?”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을 괴롭힌 것입니다. 그들이 한 말은 이렇게 고쳐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걸로 봐서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 같은데, 도대체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 계신거야?”라는 불평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런 불평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3:1~6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존 웨슬리의 말입니다. “나는 천국과 지옥이 항상 내 눈 앞에 있어 날마다 인생의 두 길을 직시하면서 살기를 원한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님을 영광 중에 뵙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도가 평생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 것은 오늘이 아니라 마지막 날입니다. 심판의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공의가 성취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사자를 보내실 것입니다(1).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다른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서 처럼 초림과 재림의 구분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의 사자가 오실 길을 예비하도록 ‘내 사자’를 보내실 텐데 그는 세례 요한입니다. 비록 히브리어로 ‘말라기’가 ‘내 사자’를 의미하고 말라기 선지자도 주님이 오시기 400년 전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메시야를 예언했고 그 길을 예비했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세례 요한을 가리켜 하신 말씀으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언약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날을 감당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2). 이것은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금을 연단하는 불,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은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심판의 철저함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에게 그 날은 심판의 불이 될 것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한 자들에게는 연단하고 정결하게 하는 불이 되고 그날은 영화로운 날이 될 것입니다(3). 그러나 마술 하는 자,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꾼의 삯을 떼어먹어 사람을 억울하게 하고 부자 된 자,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억울하게 한 자, 이른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간 모든 자에게 그날은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5; 4:1).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 거짓과 폭력으로 사람들을 대한 자들입니다. 2장 17절로 다시 가보십시오. 그들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고 했고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그들의 생각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들은 그 생각을 실행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을 속이고 배신하며 자기가 가진 힘으로 압제하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선지자가 왜 갑자기 심판의 날을 말씀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심판의 날은 백성들이 말로 하나님을 괴롭힌 것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그들이 말한대로 살았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날이 옵니다. 그날에는 모든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억울함이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공의가 성취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그 날을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4. 교훈과 적용
A. 복음 안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형제를 향하여 거짓을 행하지 말고 신의를 저버리지 말며 폭력이나 힘을 행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결혼과 이혼이라는 부부관계만에 국한된 말씀이 아닙니다. 영적 회복을 원한다면, 형제를 신실하게 대하는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깨어진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그저 사람 편에 서서 사람을 즐겁게 하고 좋은게 좋은거지 하는 관계를 만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언제나 성경이 형제 사랑을 언급할 때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 안에서”라는 조건입니다. 형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형제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모여 발을 씻어 주신 뒤에 새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방식은, 제자들의 기분을 맞춰준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그 은혜를 받은 성도들입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은, 이제 더 이상 전과 같이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고, 자기를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형제를 이용하지 않고, 형제를 온갖 말로 속이지 않으며, 어떤 힘으로도 힘들게 억누르지 않게 합니다. 복음 안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여러분의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하게 하십시오. 부부관계, 부모자식관계, 시부모와 사위/며느리 관계, 모든 형제 관계에 복음이 작동하게 하십시오. 복음의 은혜로 여러분의 모든 형제 관계가 풍성하게 하십시오.

B.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마치 보지도 못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착각함으로써 에배를 무너뜨렸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고 여긴 나머지, 자기들의 모든 말을 듣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착각한 것을 보여줍니다.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또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기도만 들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골 4:6). 사람 앞에서 말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가지고 말을 한다면, 우리가 어찌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고 힘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 모든 말과 행동이 주님 앞에 낱낱이 드러날 것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찌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형제를 대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 특별히 형제를 대하는 모든 태도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과 그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렇게 변화시킵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부부관계, 가정, 교회, 우리가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 속에서 풍성하기를 구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