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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강해 (3) - 물질관을 회복하라

말라기 3:7-12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1-14

말씀내용
하나님께 대한 냉담한 마음처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것을 말라기서는 잘 보여줍니다. 주일이면 습관처럼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활동에도 참여하지만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라기의 말씀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는 않으십니까? 말라기는 그런 자리에서 회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먼저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향해 그들이 의식하지 않고 행해왔던 잘못된 예배 행태는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물을 율법의 요구대로 가져올 수 있었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마음을 쏟아 제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님은 형제에 대하여 신실함을 회복하라고 명하십니다. 예배가 무너지니까,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가정이 무너졌고 가장 친밀해야 할 부부관계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고 아내를 학대하고 버리는 남편들의 문제도 심각했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맺고 살아가는 모든 관계를 대표하는 문제였습니다. 관계에서의 신실함을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고 신의를 저버리지 말며 폭력이나 힘을 사용하여 인격을 지배하거나 강제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예배와 함께, 형제 관계도 회복되어야 할 것을 요구합니다.

1. 돈과 헌금에 대한 오해
우리는 본문에서 물질관, 재정활동이 온전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이 본문은 말라기에서 가장 유명한 본문입니다. 특히 10절이 그렇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러분이 말라기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들어보셨다면, 이 구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구독하던 잡지 중에 Leadership Journal이 있는데, 이런 기사가 난 것을 보았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가 이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를 독려하면서, 이 말씀대로 3년 동안 십일조를 온전히 했는데도 수입이 늘지 않았다면, 드린 십일조를 모두 반환해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100% Money-Back Guarantee라고 상업광고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입니까? 그들은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 본문을 얼마나 엉뚱하게, 기복적으로 믿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일반적으로 돈과 헌금은 목사님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설교의 주제일 것입니다. 이런 구절을 설교할 때, 교인들은 교회에 돈이 필요한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돈, 물질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그만큼 예민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에 대한 설교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너무나 많은 부분을 그 주제에 할애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중 1/3이 돈과 관련된 말씀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돈이 가진 힘 때문입니다. 돈은 사람을 지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칼 마르크스가 이것을 잘 간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그는 돈이 가진 힘을 알았고,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뿐 아니라, 하나의 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을 진작에 말씀하셨고, 예수님도 지상에 계실 때 그러하셨으며, 사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신앙과 돈, 신앙과 물질의 상관관계는 무시될 수 없고 분리되지도 않습니다. 돈은 또한 우리를 자기 기만으로 몰고 가기 쉬운 만큼 위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좀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 성공은 탁월함이 아닙니다(Success is not excellence).
성공은 탁월함이 아닙니다(Success is not excellence). 우리는 세상이 주는 가치에 많은 영향을 많고 삽니다.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향해 세상은 하루에도 수 백 차례 개 이상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출세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행복하다는 메시지입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마귀가 뱀을 통하여 우리 조상 하와를 유혹할 때 주었던 메시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금수저나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부자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처럼 비참하고 불쌍한게 없습니다. 실상을 보면,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이 형편없고 불행하며 수치스럽게 사는 예가 셀 수 없습니다. 이런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 삶이 출세와 성공 때문에 더 가치있는 삶으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오히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고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나 물질, 소유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말씀입니다. 영혼이 부요해야 합니다. 신앙은 영혼의 빈부를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하나님 앞에 잘 산 인생,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인생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면서 최선을 다하여 살다가 주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이것이 너무 적게 말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잘 사는 삶, 영원한 삶,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너무나 적게 말하는 반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지는 너무나 많이 말합니다. 마치 인생이 전부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우리 인생은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결산을 해야할 날이 있다는 것을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3. 돈은 돈의 자리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7절에서 “내게로 돌아오라”고 부르시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들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않았다고 지적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된다는 말이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만 있으면 만사형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돈 많은 백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삶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돈을 바꾸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패니 크로스비의 찬송 가사가 잘 보여줍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시는데,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반문합니다. 이미 하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지요. “너희 마음이 회복되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와 형제관계를 회복해라. 형제를 이기적으로 대하고 거짓을 행하고 신의를 지키지 않는 한, 너희 영혼은 회복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세번째로 말씀하시는 것이 물질관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너희는 다 도둑놈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것을 상습적으로 도둑질해왔다. 온 나라가 그렇다.”고 하십니다.
핵심은 돈을 사랑하는 일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9~10을 보지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자가 되기를 구하는 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이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선지자 말라기의 말씀을 듣는 유대 백성이 이 늪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삶을 지속하는 한,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돈은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돈을 돈의 자리로,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로 모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돈을 돈의 자리로 돌려놓아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십니다.

4. 십일조의 신학
하나님께서 유대 백성에게 도둑질을 했다고 하시는 근저에는 십일조와 봉헌물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 백성은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반문했고,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와 봉헌물이 증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일조! 정말 예민한 이슈입니다. 먼저 십일조와 봉헌물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겠습니다. 명확하게 딱 떨어지는 성경적 답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학자에 따라서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일반적인 구분은, 십일조는 일종의 세금이고, 봉헌물은 십일조 외에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모세 율법에서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레위기 27:30~33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땅’입니다. 땅은 영구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소작세로 바쳐야 했습니다. 신명기 14:22도 ‘토지 소산의 십일조’라고 명명합니다. 이점에서 십일조는 내도 되고 안 내도 되는, 자기가 임의로 정해서 내는 헌물이 아니었습니다. 십일조는 기본이고, 그 다음에 자원하여 드리는 봉헌물의 개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 맞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삶에서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각종 예물, 봉헌물로 하나님께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자원함에 기초하지만, 그들의 삶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영위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표하는 것은 마땅한 바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헌금일지라도, 그들이 가져온 예물은 1장의 언급대로, 병든 것, 저는 것 같이 가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수 없는 예물이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대한 마음의 냉담함은 그들의 모든 종교 행위를 의무로, 최소한의 형식으로 축소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까왔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최소한의 바침은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한 십일조도 아니었고 받으실만한 봉헌물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돈에 대한 사랑, 자신들의 필요는 하나님이 아닌 돈이 채워준다는 생각은 그들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도둑놈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렇게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성실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금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려면, 그들은 언약의 조항을 이행할 책임이 있었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십일조를 통해서 입증되어야 했습니다. 9절 하반절에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축복 아닌 저주의 상황에 살고 있음을 선언한 말씀입니다.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은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5.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이제 우리는 논란 많은 1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먼저 이 말씀을 오용하는 보편적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십일조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의 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십일조를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렸는데도 물질의 복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성이 없는 십일조였다는 것이지요. 피할 길도 완벽하게 준비된 것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기복주의, 번영신학의 해석입니다. 그래서 서두에 말씀드린 바, 십일조로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천박한 태도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문제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십일조로 나를 시험해 보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것이지요. 본문의 문맥을 봅시다. 3:6에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적으로 불성실함에도 불구하고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야곱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으로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그점에서 언약의 조항인 십일조를 언급하신 것입니다. 이 본문은 철저하게 언약의 개념 하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이 무엇을 시험하라는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 시험(테스트)의 본질은 ‘축복을 주시나 주시지 않나’하는 것, 즉 ‘온전한 십일조가 축복의 비결이 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언약을 파기하는 자에게는 저주로,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는 축복으로 응답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으로 언약을 파기한 그들은 확실히 저주를 받은 삶 가운데 있었습니다. 만일 유대 백성이 다시 십일조와 봉헌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그들이 복을 받는다면, 그것은 십일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의 축복은 물질 자체의 축복에 있는 게 아니라, 언약의 축복에 있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에게 신실하듯이, 너희도 언약의 파트너로서 언약에 신실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1~12절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축복들은, 메뚜기가 토지 소산을 먹어치우지 못하게 하시고, 포도열매가 잘 수확되게 하시고, 땅이 아름다워져서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고 칭송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 문’을 연다는 것은 비를 약속하심인데,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유대 백성은 페르시아 제국의 식민지로 자신들의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신 보다 작지 않은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라기 전체를 통해 당신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우주적 통치자이심을 보이십니다. 이 칭호가 가장 빈도 높게 사용된 성경은 학개, 스가랴, 말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제국의 권세 앞에 주눅이 든 유대 백성에게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는 선언입니다. 여기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연만물에 미칩니다. 하늘 문을 열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메뚜기 떼를 금하여 유대 백성의 토지 소산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12절에,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는 말씀은 종말론적인 성취를 바라보게 합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의 궁극적 성취입니다(창 12:1~3). 이것은 단순히 물질적 축복이 아니라,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을 온 세상의 영광으로 회복시키시겠다는 언약적이고 종말론적인 약속인 것입니다.

6. 신약 성도의 십일조
이 말씀을 이해했다면, 이제 우리는 구약 율법 아래 있던 성도들과 달리,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십일조와 또 십일조에 관한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의 구분상 의식법에 속합니다. 율법 규정으로서 십일조는 주님의 십자가로 성취되었으므로, 우리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께서 들어보셨겠지만, 신약시대에도 십일조가 구속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제시하는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외식을 책망하는 맥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율법이 명한 십일조를 하되, 아주 작은 양념에 속하는 채소들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했습니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 것은, 율법의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무시하면서 율법의 덜 중요한 십일조의 외적 규정을 준수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렸다면 그들은 책망이 아닌 칭찬을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하신 것은, 하라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주신 말씀으로써, 언약의 경륜으로 볼 때 여전히 구약에 속한 상황에서 모세 율법의 십일조를 존중하신 것이지, 주님의 십자가 구속 후에 신약의 성도들이 십일조 규정을 행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십일조를 양념에까지 적용해서 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십일조의 정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따라 살아가고 있으며 그 정신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는가 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약 성도에게 십일조는 율법 조항의 의무가 아닙니다. 그러면, 십일조는 더 이상 불필요합니까? 여기서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구약의 십일조와 신약교회의 십일조의 연속성입니다. 구약 십일조의 기능과 용도를 보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성전 제사를 맡은 레위인과 제사장의 생활을 책임지는 용도였습니다. 목사가 구약 제사장은 아니지만, 원리에 있어서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또 십일조는 연1회 레위인에게 드려지는 십일조와 별개로, 절기에 드려질 때에는 드리는 자와 가족 그리고 그 집에 속한 노비와 제사를 담당하는 레위인이 함께 먹는 축제 음식에 쓰였습니다. 제사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듯이, 오늘날 이것은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모든 비용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십일조를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평균적으로 그들 소득의 20%를 십일조로 드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여기 ‘자선의 십일조’라 일컬어지는 것이 하나 더 발견됩니다. 이것은 매 3년차에 추가되는 십일조로, 주로 그들 중에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사용되는 십일조였습니다. 이것을 세번째 십일조라고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평균적으로 자신들의 수입과 소득의 23.3%를 십일조로 드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율법 규정의 십일조가 사용된 용례들은 신약교회가 배워야 할 원리를 제공합니다. 신약 성도인 우리는 헌상의 의무를 가집니다. 이것을 의무라고 표현했지만, 사실상 하나님은 즐거움으로 내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고후 9:7). 우리가 드리는 헌금은 교회의 전임사역자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교회가 교회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비용을 충당합니다.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구약 시대에 자선의 십일조로 이스라엘 안의 빈자들을 섬겨야 했듯이, 신약 교회도 그 책임과 기능을 감당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은 교회 안의 가난한 형제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한 세계의 모든 민족과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선교의 사명으로 확장됩니다. 이렇게 구약 율법의 십일조와 신약교회의 십일조는 원리와 기능에서 유사합니다.

7. 적용-탐욕을 조심하라!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하나님께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렸듯이, 우리 역시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것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 청지기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께 속합니다.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사용자이고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겨주신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책임있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사용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가졌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를 물질에 대한 모든 탐욕에서 보호해줍니다.
비율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고후 9:7). 그러나 구약의 십일조가 가지는 비율 1/10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가, 돈에 묶여 살아가는가, 돈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신이라고 여기는가의 여부는 우리가 하나님께 마땅히 드릴 것,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한 용도,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일, 복음을 온 세상에 증거하는 일에 인색한가, 관대한가에 따라서 판단될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기준을 우리는 구약의 십일조 원리에서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돈을 사랑하여 돈과 함께 망하지 않도록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돈이 여러분을 속이지 않게 하십시오. 돈이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돈이 여러분의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돈이 여러분의 노후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노후와 영생을 보장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것이 보험이나 저축은 무조건 불신앙이다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는 노후도 준비해야 하고, 자신의 장래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돈이 우리의 노후와 장래를 책임져준다고 믿는 것이 여러분의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돈이 하나님을 대치하는 자리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와 존 웨슬리가 모두 이 말을 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주머니, 곧 지갑의 회심이다.” 이것은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이었습니다. “십일조를 통해서 내게로 돌아오라.” 참된 회심은 물질관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내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게 합니다. 나를 위한 용도로만 쓰던 것이 이제 하나님 나라와 영광을 위해 그리고 어려운 형제들을 섬기는 용도로 쓰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나를 위해 다 쓰고도 돈이 남아돌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덜 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몫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탐욕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이것이 참으로 회심한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은 하나님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물질관을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게 그 임재의 영광과 은혜를 우리 안에 다시 풍성하게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