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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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강해 (4) - 말의 회복 그리고 다가오는 심판의 날

말라기 3:14~4:6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8-01-21

말씀내용
하나님을 향해 가진 냉담한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우리는 지난 3주에 걸쳐 말라기 말씀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냉담한 마음으로 세월을 보내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전 5세기 유대 백성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하심으로써 당신의 여전히 변함없는 사랑을 확증하여 주시면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여러분의 태도를 교정하십시오. 둘째, 형제들을 향해, 사람들을 향해 신실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폭력과 힘을 행사하는 관계에서 돌이키고, 신의를 저버리고 이기적으로 행하는 모든 관계에서 돌이켜 믿음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셋째, 물질관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가 가진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며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해야할 날이 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청지기로서 이기적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물질을 사용해야 합니다. 내 수중에 있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헌금 생활과 함께 내가 돈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고쳐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느냐, 어떻게 하나님을 향하여 차가와진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식어져있다면, 이것들을 돌아보고 돌이켜야 합니다.

1.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A. 완악한 말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또 하나 백성들의 삶에서 회복해야 할 것을 발견합니다. 언어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13절에서,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완악한 말'을 했고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들이었습니다. 그 완악한 말이 무엇인지 14~1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즉, "하나님을 믿어봤자 도움이 되는게 하나도 없어. 순종도 해봤고 성경도 읽고 눈물로 기도도 해봤는데 그런다고 해서 이루어진게 하나도 없어. 차라리 하나님 없이 교만하게 사는게 마음이라도 편하고, 성공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느니 내 마음을 따르는게 훨씬 나아. 하나님한테 벌을 줄테면 줘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도리어 잘 되기만 하더구만." 이런 완악한 말로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이런 말을 그들이 얼마나 노골적으로 공공연하게 했는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들의 삶이 힘들 때마다 그들은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하듯이 이런 말들을 쏟아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말을 들으셨고,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우리는 말을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말도 못 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 35~36)." 하나님께서는 심판 날에 우리가 한 말들에 대해서 물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전도서 기자는 우리의 모든 말이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야고보서는 특별히 우리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많은 경고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 3:2~3)."
말을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으시기 때문이고, 마지막 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말
완악한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이 피차에 말한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도 말을 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피차에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형제들과 교제하면서 나눈 은혜로운 말들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잊었어도, 하나님은 우리가 한 모든 말을 들으셨고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한 형제를 말씀으로 붙들어준 것, 말씀으로 서로 격려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고 흡족하게 여기셨으며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들으신다는 것과 관련하여 두 가지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경험입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에게 해드렸던 일화이기도 한데,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 저는 30대의 나이로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GP선교회의 한국대표로 사역을 할 때였는데, 선교행정부터 전국의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설교하고 강의하는 일로 하루도 쉴 새 없이 바빴습니다. 어느 날 사무실에 나갔다가 일정이 빈 것을 보고는 바로 퇴근해서 아이들 학교 정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바로 용인 에버랜드로 데려갔습니다. 다음 날 시험이 있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감사함으로 하루를 즐기자고 하고는, 밤 11시 문닫을 때까지 놀고 집으로 왔습니다. 너무나 피곤해서 막 잠이 들 무렵, 대략 12시 쯤이었는데 열려진 방문으로 아이들의 대화가 들려왔습니다. "오빠, 우리 아빠 너무 좋지?" 오빠가 대답합니다. "그래,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이런 식의 대화에 저는 잠이 확 달아나버렸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럽던지 그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셨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게 들립니다. 들으시고 크게 기뻐하시고 큰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이렇게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쯤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토요일 오후 서울 강동쪽의 커피샵에서 절친인 목사를 만나 몇 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튿날인 주일 아침, 설교하기로 예정된 구로구의 한 작은 교회로 갔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이 약 30여명 되는 개척된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였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한 형제가 와서 묻습니다. 어제 오후 강동구의 커피샵에 계시지 않았냐고? 자기가 제 뒤쪽에 앉아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화가 들려와서 귀를 기울여 듣는데 그게 은혜로왔고, 마침 자기가 아는 목사님들의 이야기도 하길래, 이 목사가 누군가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다는 겁니다. 결국 인터넷에서 저를 확인하는데 실패했는데, 이튿날 서울의 반대편에 있는 교회에서 그 목사가 설교를 하더라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저는 머리칼이 쭈뼛 서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내가 이상한 말들을 쏟아냈고 불경건한 말들이 나왔더라면, 오늘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까 생각하니 끔찍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이 좀 더 와닿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말을 들으십니다. 우리가 형제들과 피차에 나누었던 모든 말들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들으십니다. 우리의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그 말들로 인해 너무나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실까요? 아니면, 대적한다고 느끼셔서 슬퍼하실까요?

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망
3장 17~1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을 주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내가 정한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라는 말은 언약적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의미에서 특권적 신분을 가진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끼는 것 처럼 그들을 아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지금 이 세상에서는 그들의 이런 특별한 신분이 드러나지는 않고 있지만, 그날에는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에 비로소 그들은 의인과 악인,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들이 어떤 결과를 맞게 될지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그날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많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한 결과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당 못할 영예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들이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겪은 일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쓴 바, 이 말씀들의 의미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또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이 날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상황에 따라 불평과 원망을 터뜨리지 않고, 그날을 바라보고 힘을 얻고 소망을 발견하고 오늘을 견딜 인내의 힘을 얻습니다.

3. 그 날은 온다.
말라기 선지자의 외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날의 영광에 대해서 선지자는 더 말합니다. 4장 1~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 날은 옵니다. 반드시 옵니다. 그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대적하는 자들의 운명은 하늘과 땅처럼 구별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인과 악인의 운명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구별하실 것입니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그날에 지푸라기 같이 태워지고 뿌리도, 가지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무서운 심판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의 운명은 다릅니다. 그들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고, 그들은 마치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뛸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끊임없이 악인에게 밟혔던 의인들은 그날에 악인들을 밟을텐데, 마치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이 밟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생각해보지요.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모든 약한 것들을 고쳐주신다.
그날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영적, 육체적 모든 질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실 것입니다. 의로운 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장 78~79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그날이 오면, 의로운 해가 떠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빛을 비출텐데 그때 성도들은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들의 치유를 받을 것입니다. 이름만 신자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작정하고 그렇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 병자들을 고쳐주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 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살려다가 받은 수많은 상처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 전쟁에 자신의 삶을 던져 싸우다가 입은 상처들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상처를 입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날 주님께서 의로운 해처럼 오셔서 그 빛으로 우리를 고쳐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치유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제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뛰어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들에게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합니까?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상처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히려 상처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에 완전한 치유를 얻게 되겠지만, 그날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친히 우리를 치유해주시고, 아침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주십니다. 어제의 괴로움이 오늘은 더 이상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침에 자비하고 선하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돋는 해같이 오셔서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치유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뛰어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B.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해방의 날이다.
둘째, 그날은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용광로 불같은 심판의날이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 구원의 날에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뛸 것입니다. 평생 묶여 있던 죄의 유혹의 사슬을 끊어내는 날, 마치 갇혀 있던 우리의 문이 열리고 햇살이 비추어 들어오는 그 문으로 뛰쳐나가 껑충껑충 뛰게 될 것입니다. 이 큰 구원을 인하여 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운 사람들, 그 죄와 유혹을 이겨내려고 부단히 싸운 사람들, 그들에게 그 날은 그들을 구속하고 있던 우리를 뛰쳐나가는 날,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그 모든 유혹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 원수 같은 죄악의 권세를 짓밟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3)." 이 탄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날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입니다. 이름뿐인 신자들은 그날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C.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승리의 날이다.
세번째로 하나님은 그날에 영적 권능과 능력을 약속하십니다. 이것은 역설입니다.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성도들은 그날에 악인을 밟고 주님과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원수 사탄아, 그날이 오면 나는 너를 내 발 밑에 재처럼 밟을 것이다. 때로는 네가 나를 넘어뜨렸고 비참하게 만들었지만, 그날이 오면 내가 너를 밟을 것이다." 이 경기는 이기는 경기입니다. 비록 지금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지기도 하지만, 이 경기의 승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길 것입니다. 12회전 권투 경기에 비유하면, 처음부터 계속해서 맞았을지라도 12회전에서 우리는 그를 KO시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경기 중에 좀 맞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을 수 있습니다. 피 좀 흘려도 괜찮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이깁니다.

D.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관계 회복의 날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날이 오면, 우리는 모든 관계의 회복을 경험하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인간 관계의 갈등이 얼마나 크고 고통스러운 문제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뒤로부터 인간이 피할 수 없이 겪게 되는 고통입니다. 사람 때문에 속상해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고부 사이에, 형제와 자매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옵니다. 모든 깨어진 관계들, 오해로 말미암아 소원해진 관계들이 회복될 것입니다. 본문 4장 5~6절을 보지요.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물론 오리라 한 엘리야는 세례 요한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마 17:10~13).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는 말씀인데,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왜냐하면 여기 '아버지'가 복수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종말론적인 회복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사는 놀라운 영적 연합이 일어날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복된 약속입니까? 자녀들의 회심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본 모든 경건한 부모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약속입니까? 부모의 회심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왔던 경건한 자녀들에게 이것은 얼마나 위로가 되는 약속입니까?
그날은 옵니다. 그날을 바라보십시오. 태어난 날이 있듯이, 죽을 날도 있습니다 . 이것이 확실한 것처럼, 심판의 날도 분명히 우리에게 임합니다. 심판의 날이 닥쳤을 때, 여러분은 그 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날이 여러분에게는 심판의 날이겠습니까, 아니면 구원의 날이겠습니까? 확실히 그날은 의로운 해가 광명한 빛을 쏟아붓는 날이 되겠습니까?
2018년을 시작한지 세 주일이 지났습니다. 이 한 해가 여러분의 삶에 후회없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실 그 날이 우리에게 즐거운날, 기쁜 날, 축복의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날은 우리의 모든 완전함으로 서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날을 맞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옷입고 그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을 소망하면서 사는 우리 모두의 남은 평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