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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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강해 (1) -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회복하라

말라기 1:1~2: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12-31

말씀내용
1. 말라기서의 역사적 배경
말라기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때는 주전 5세기 후반입니다. 70~80여년 전에는 제2성전이 완공되었고(주전 516년) 제사가 다시 드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전 445년에는 느헤미야가 3차로 귀환하는 포로들과 함께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과업을 성공적으로 마쳤습니다. 백성들은 성전만 완공되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된 것과 같이, 뭔가 천지를 진동할만한 일이 일어나고 다시 이스라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 제국 치하에서 살아야 했고 그들의 일상은 가난과 궁핍과 싸우며 살아야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유대 민족 가운데서 회복되는 것과 같은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섭섭하고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는 하시는건가?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신건 아닌가? 과연 우리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맞는가? 그 언약이 아직도 유효하기는 한건가?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시기는 하시는건가?”
불안한 질문들이 그들의 마음을 채워갔습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오랜 포로생활 속에서 그들이 본 제국들의 위용과 영광은 대단했고, 옛 고토로 돌아온 지금 자신들의 처지는 너무나 초라했고 자신들은 세상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섭섭함은 냉담함으로, 환멸과 배신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은 주전 5세기를 살았던 유다 백성만의 경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도 겪게 되는 믿음의 도전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은 의무가 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랑이 식으면 신앙의 자리에는 의무만 남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형식이 되고 맙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문제는 시간입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 믿음은 큰 도전에 직면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이 싸움을 싸웠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의무가 사랑을 대치하였으며, 하나님을 중심에서 가장자리 하찮은 곳으로 밀어내버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말라기서입니다. 우리는 말라기서를 통해서 “이런 때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4주에 걸쳐 살펴볼 것입니다.

2. 경고?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1:1~5)
말라기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1).” ‘경고’라는 단어는 강한 뉘앙스를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대개 이 단어가 사용되는 뒤에는 심판에 대한 메시지가 나오곤 합니다. 또 이 단어는 ‘짐’ 혹은 ‘부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서를 이 단어로 시작하시는 것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짐이나 부담으로 여긴 것을 에둘러 지적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가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1:2).” 이것이 경고입니까? 먼저 하나님은 마음이 상하여 섭섭해하는 백성들에게 언약의 사랑의 확실함을 말씀하심으로써 시작하십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증명해 보여달라고 요구했었고, 하나님께서는 요구대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것보다 이들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정체성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사람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유다 백성은 반박합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 말은 “사랑하신게 고작 이겁니까?” 또는 “그런 사랑이라면 필요없습니다.”하는 말입니다. 이 반응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상해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금 당장 고통스러운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고통 속에서 과거의 사랑의 기억 조차 더욱 고통스럽게 느끼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이 감정이 아닌, 언약에 근거한 사랑이며,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3:6에서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어떤 상황이 오래 지속되어 고통을 당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를 언급하시면서 에서의 후손인 에돔 족속을 생각해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택하지 않으심은 그들의 선함과 악함이나 그들의 기질적 장점이나 단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를 미워하였다”고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에돔 족속을 보라고 하십니다. 유다 멸망 당시 에돔 족속은 유다 멸망으로부터 반사 이익을 챙겼을 뿐 아니라, 바벨론을 도와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도주로를 차단하면서 결국 유다의 버려진 영토까지 차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께서 에서를 사랑하셨고 야곱을 미워하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단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본 것입니다. 에돔의 역사를 제대로 보면,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황폐하게 하심으로 멸망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야곱과 에서의 차이입니다. 비록 역사의 과정에서 에돔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없는 백성은 망할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성공과 영화는 다 저주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온 세상 모든 제국을 통치하시는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사랑의 짐을 내려놓지 않으실 것입니다.

3. 제사장들을 향한 무서운 책망(1:6~14)
백성의 마음이 상하고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냉담해지고 그들의 예배(제사)가 형식적 의무 이상이 되지 못하게 된 것은 백성들만의 책임이거나 그들이 겪는 현실의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에는 백성을 진리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지도자들인 제사장들의 책임을 다루십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을 책망하시는 이 본문에서도 백성의 죄가 가볍게 다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사장과 백성은 짝을 맞추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부르시자, 제사장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그 증거를 대보라는 겁니다. 말라기서는 하나님의 지적에 말마다 반박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옵니다. 이 모든 반박은 우리 마음을 잘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건방진 태도입니다.
그들은 자식이 아버지를 혹은 종이 주인을 공경하는 수준의 공경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요, 주인이심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니까요.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보지도 못하실 줄로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증거를 대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하찮게 여겼고, 아무거나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병들고 다리 절고 눈 먼 짐승, 버려도 아깝지 않은 짐승을 제물로 가져왔고 제사장들은 그것을 아무 문제없이 받았습니다. 백성들은 제사를 드렸으니 됐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런 제물들을 용납하고 받은 것입니다.
본문을 좀 더 주의해서 보지요.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렸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또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반문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이 한 말로 증거를 제시하십니다. 7절입니다.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고 지적하십니다. 이것 뿐이 아닙니다. 12~13절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한 말을 그대로 증거로 제시하십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고,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하며 코웃음치고 아무 거나 잡히는대로 가지고 와서 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12~13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주께 차려 올리는 제사 상, 더러우면 어떠냐? 아무 음식이나 차려드렸으면 됐지.’ 하면서, 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다. ‘에이 귀찮아.’ 이렇게 투덜거리면서 바치고는 나를 우습게 보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 너희는 남의 짐승을 훔쳐다가 바치고,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바친다. 그러는데 그 제물을 달갑게 받을 것 같으냐? 나의 말이 그르냐?”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인 목사에게 빗대어 표현하면 이런 말입니다. “설교, 아무 것도 아니지요. 제일 쉬운게 설교죠. 설교 하나 준비하는데 번거롭게 뭐 그리 많은 시간을 쏟습니까?” 또는 “예배, 그거 별거 아닙니다. 그냥 대충 1시간 드리면 되는거지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 말은 이렇게 옮길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일 예배 참석하는게 어딘데, 이거해라 저거해라 주문이 많은거야?” 뭐, 이런 것 말고도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여기는가에 대한 많은 느낌들, 표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책망을 듣는 이 사람들은 제사를 빼먹은 적은 없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8절에서 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그들은 제물을 고를 때, 병든 것, 눈먼 것, 저는 것, 어차피 버릴 쓸모 없는 것이니까 제물이나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세상 지도자도 받지 않을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제물로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일이 우리의 삶에서 그대로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없고, 하나님이 자신의 삶에서 그리 중요한 분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에는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합니다. 여간해서 빠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지금 지적하고 계십니다. 외면과 형식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식었고 하나님을 향한 애정이 없었으며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경외감이 없었습니다.
제사장들이나 유다 백성은 자기들이 빠짐없이 제물을 가지고 와서 제사를 드렸기에,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당연히 자기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기도하고 바라는대로 응답하시지 않자, 이 종교적 유희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과 냉담함은 점점 더 깊어져 갔던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인내하게 하지만, 종교생활은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마음을 굳게 하고 냉담하게 합니다. 종교생활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한 것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생활에는 우리 마음을 녹이고 따뜻하게 하는 은혜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폭탄 선언이라 할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런 제물을 받기 싫으니 성전 문을 닫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드리는 제물을 기뻐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유다 멸망 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루살렘 성전 문 앞에서 전했던 메시지를 기억하십니까?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3?4).” 하나님께서는 이런 더러운 제물을 드림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11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우리가 보통 즐거이 부르는 노래 가사가 아닙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즐거운 분위기에서 나온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가 나를 경멸한다고 할지라도, 내 이름은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게 될 것이고, 이것이 나의 작정이다.”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환호하는 백성을 책망하라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4. 제사장 직무의 엄중함(2:1~9)
하나님께서는 계속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번 제사장들에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돌이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물의 똥을 제사장들의 얼굴에 바르겠다고 하십니다. 제물을 드릴 때, 희생제물의 똥은 밖에 버려지는데, 하나님께서 그 똥을 제사장들의 얼굴에 바르겠다는 것은, 그들도 똥과 같이 간주되어 밖에 버려지는 존재가 되고, 백성 앞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9 하반절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적지 않은 교회 지도자들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입는 일들은 이 말씀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 ‘레위와 세운 언약’을 회상하십니다. 2:4~5을 보지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옛날 광야에서의 바알브올 배교사건을 가리킵니다(민 25:1~16). 모압과 미디안 사람들의 성적 유혹에 빠져 이스라엘 남자들이 바알 숭배 예식에 참여하고 이방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름으로써 큰 배교를 행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사 이 일에 가담한 모든 남자를 다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울고 있을 때, 한 겁 없는 지도자가 미디안 수령의 한 딸을 데리고 회중 가운데 자기 장막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 대제사장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들을 따라 장막으로 들어가 그 두 사람을 함께 뚫어 죽였는데,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로 퍼져가던 염병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하시면서, ‘평화의 언약’ 곧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습니다(민 25:11~12).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바로 이 사건을 가리킵니다. 불경건이 온 회중을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사람 비느하스가 질투하는 열심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서 용감하게 행동한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5절 하반절과 6절에 말씀한대로,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했습니다. 제사장은 이런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비느하스는 이 점에서 모든 제사장의 귀감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의 시대에 제사장들은 도리어 자신들이 옳은 길에서 떠났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게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비느하스로 인하여 맺어진 ‘레위의 언약’을 깨뜨린 것입니다.

5. 사랑이 식었고 경외함이 부재한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 예배가 형식화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예배 자체를 그만 두지는 않아도, 예배는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맙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감동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맛을 알고 살아가십니까? 2017년의 마지막 날이자 마지막 주일인 오늘, 지난 한 해를 돌아보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여러분의 마음은 어땠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는 또한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은 본문에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A.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
첫째는 우리의 믿음 생활에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 신앙 생활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라고 질문하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대부분은 거의 주저 없이 “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유다 백성도 그랬을 것입니다. “너희가 제사의 의무를 잘 감당하고 있는가?”라고 물었다면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접근하지 않으십니다. 마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마음이 상하고 깊은 낙심에 삐진 베드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왜 믿음과 사랑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입니까? 어디서 고장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이 문제를 다루시려고 말라기 선지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루시려고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경고의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유다 백성처럼, 여러분은 하나님께 섭섭함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화가 나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지난 한 해, 지난 모든 삶을 믿음의 눈으로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여러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구할 것은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이 해를 지나기 전, 오늘이라는 이 시간에 이 은혜를 입고 새해를 맞이하십시오. 첫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구하십시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느끼고 경험하고 맛보게 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하라.
본문의 두번째 메시지는 예배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단지 형식적 예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2017년 한 해 동안 1년 52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의 예배는 어떠했습니까? 또 2017년 한 해 동안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하셨습니까? 여러분의 예배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예배하셨습니까?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습니까? 여러분은 예배를 별 것 아닌 양, 가볍게 여기며 살아오고 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한 가지 불변의 원리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가 무너지면 삶도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신 결과를 가인의 삶이 보여줍니다. 예배에서 실패한 가인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삶의 실패를 보장합니다. 주일을 가볍게 여기고 예배를 멸시하면서도 모든 것이 다 잘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영적 붕괴는 이미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 지도자도 불쾌하게 여길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의 회복이 없이는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나 긍휼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정녕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시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 안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예배를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께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를 회복해야 합니다. 오, 자비하신 하나님께 그런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구하십시다.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8-09-22 12:24:04 설교게시판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