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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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강해 (3) - 열정이 아니라 긍휼: 자기부인의 미학

요나 3:10 ~ 4:11, 마태복음 9:36-38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7-06-10

말씀내용
서론
질문: 당신에게 소중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야심이라 표현하기는 뭐해도 모두 소박한 꿈 정도는 가지고 살아간다. 살면서 우리가 목숨을 걸만큼은 아닐지 모르지만 귀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라. 대다수의 우리 사랑의 대상들은 우리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므로 그것이 소중한 것이다. 원래의 가치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훨씬 우리가 그것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내가 더욱 귀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이 없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들에서가 아닌가?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 본연의 모습으로부터 나오는 시각일 수는 없다. 그것은 우리 바깥으로부터 오는 시각이다. 하나님의 시각이다. 나의 소중한 것이 깨어지는 체험이야말로 우리에게 새로운 어떤 것, 진정한 어떤 것을 향한 가치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깨어진 마음의 틈새로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의 마음, 요나의 마음
요나서의 주제는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이다. 이것은 요나서의 마지막에 가서야 그 진수를 확연하게 드러낸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에게 긍휼을 가지셨다는 말로 시작한다.

긍휼: 마땅히 받아야만 할 심판과 저주를 베풀지 않는 호의
은혜: 마땅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호의

발단(3:10): 하나님의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발단은 이것이었다. 회개하고 돌이키는 니느웨 백성들을 보신 하나님께서 내리시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시고, 긍휼을 품으신 것이었다. ‘뜻을 돌이키사’는 영어성경에 ‘He had compassion’이라고 표현되었다. 적절한 번역이다. 하나님이 하신 것은 니느웨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이었다. 물고기 뱃속의 요나에게 긍휼을 베푸신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요나의 첫 번째 항변(4:1-4)
정열의 사람, 요나의 분노
요나의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였다. 요나는 이것이 싫었다. 심히 싫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에게 긍휼을 품으신 것은 적어도 요나에게는 큰 악이었다(But it was a very evil thing to Jonah).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께 분노하였다. 여기서부터 요나의 강퍅함과 하나님의 긍휼은 끝까지 평행선을 이루면서 나가게 된다.
적어도 요나의 마음은 이랬다.
이스라엘은 150년이나 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니느웨는 단 하루만에 회개하였다. “이 악한 니느웨 사람들을 그냥 용서하시다니? 이것은 값싼 은혜가 아닌가? 과거에 다윗에게는 간음과 살인의 대가를 치루게 하신 하나님이 아닌가? 심지어 내게도 톡톡히 그 대가를 치루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던가?”요나에게는 지금까지 그가 받은 구원의 감격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요나는 긍휼(compassion)의 사람이 아니라, 열정(passion)의 사람이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 열정이다. 우리는 과도하게 열정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요한은 예수님을 따라다닐 때, 사마리아 성을 지나면서 그의 태도로 인하여 형제 야고보와 함께 ‘우뢰의 아들’이란 별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어떠하였는가? 그야말로 ‘사랑의 사도’가 되지 아니하였는가? 프랜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래도 하나님께 공의로운 심판을 베풀어달라고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시작되면 내가 가장 먼저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나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기를 구했던 바울사도와 어떤 점에서는 대단히 유사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혀 바울과 다르다. 선교의 성공이 결국 이스라엘을 두 번째 위치에 두게 될 것이라면, 그는 이방세계를 위한 선교사가 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요나의 정통 신학
요나의 하나님 이해는 옳았다. 흠잡을데 없이 옳았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틀림이 없는 하나님 이해이다. 정통 신학의 신론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얼마든지 정통 신학을 가질 수 있고, 바른 성경교리를 수호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죽은 정통이다. 교회사의 위대한 경구를 우리는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정통은 이단보다 무섭다.” 그렇다. 요나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생명력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의 문제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정통신학자의 문제였다. 이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읽고 공부하고 또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 구절들을 암송할지라도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신학박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소자 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 요나의 말을 빌면, 결국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통 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아이러니이다.
진정한 진리의 이해는 우리로 하여금 거룩과 사랑 그리고 긍휼로 인도해야 한다. 이것이 바른 진리 이해이다.

요나의 문제, 민족이기주의
요나가 하나님에 대한 정통 신학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던 것은 바로 요나의 고질적인 문제인 민족이기주의의 문제 때문이었다. 우리 역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집단 이기주의의 포로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을 알아보는 방식이 있다. 물질적 소유의 면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학식의 면에서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가 대하는 방식에서 약간의 거리낌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가 집단 이기주의의 포로라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이다. 집단 이기주의는 하나님의 관점을 방해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들어설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요나의 문제, 온 마음, 전심 결여의 문제
요나는 은혜를 많이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다시 이렇게 수렁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것일까?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완전하게 화합하지 못하였다. 사역 성공에 대한 요나의 기대는 하나님의 기대와 달랐다. 전심으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의 편에 서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도 다시 미끄러져 내려갈 수 있다. 하나님에게 온 마음을 드리지 못하면 말이다. 만일,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에도 아랑곳 않고 악을 행하다가 망하였다고 하자. 요나는 어떻게 반응을 보였을 것인가? 아마도 그는 하나님의 일을 성공적으로 잘 치루었다고 생각하고 기쁨으로 돌아갔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것이 아니다. 요나를 참아주셨던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니느웨에도 적용이 되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니느웨는 요나보다는 더 낫지 않은가? 반응에 있어서 말이다.
결국 선교의 문제는 선교사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이다. 그리고 선교사의 문제, 교회의 문제는 영성의 문제이다. 선교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교회이다. 즉, 교회의 마음이 선교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교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느웨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을 때 요나의 마음에는 진정으로 기쁨이 있었을까? 전심으로 행하지 않는 전도자의 마음에 온전한 기쁨이 있을 수는 없다.

우리들의 삶과 행위는 얼마나 온 마음으로 행해지고 있는가? 전심으로 행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삶은 요나가 니느웨에서 전도하던 첫 날의 삶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는 하지만, 온 마음으로 행하지 않는 삶 말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건짐을 받은 요나가 어찌 하나님께 이렇게 행할 수 있는가? 어찌 하나님께 분노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즐거이 받지만, 남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은 괜히 시기가 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에게 주신 탈렌트, 지위, 지식, 기회 등에 대하여 쓴 마음을 품는 모든 태도가 바로 요나의 태도였던 것이다.

불완전한 사람을 통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니느웨의 부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부흥에서 놀랍게 사용된 종 요나, 그러나 그의 모습은 이처럼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미숙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사람을 통하여 그 놀라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바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놀라운 예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결과는 그 하나님의 종이 온전하다는 것을 반증해 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많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조심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응답: 우리는 하나님께 화낼 권리가 있는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Have you any right to be angry?). 그렇다. 성낼 권리가 실오라기 만큼이라도 요나에게 있는가? 없다. 요나가 잘 안다. 그러나 그는 분노한다.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그의 자존심과 함께 말이다. 하나님의 대답은, ‘요나야, 너는 화낼 권리가 없구나’하는 점잖은 말씀이시다. 그렇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화낼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과거의 모든 인도하심에 대하여 말이다.

요나의 두 번째 항변(4:5-9)
영웅에서 구경군으로
요나는 니느웨 부흥의 영웅이다. 그런데 분노에 찬 요나는 이제 구경군이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성에서 나갔다. 이것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가는 요나의 모습을 묘사한다. 하나님의 오른 손에 붙들려 멋지게 사용되던 주인공 요나가 이제 역사의 무대 중앙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것이다. 그는 무대에서 나갔다. 구경군이 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성 동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구경군이 하는 일은 자리를 잡고 앉는 것이다. 그는 할 일이라고는 없다. 이제 앉아서 구경하는 것 외에는 말이다. 그늘 아래 앉았고,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기로 하였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다. 구경군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구경군의 특징이다. 역사의 부담이나 시대적 부담은 안중에도 없다. 그는 보고 즐기는 사람이다. 요나는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지었다. 이제 니느웨 부흥의 역사의 주인공은 사라졌다. 다만 니느웨 성밖 동편에 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구경군 요나인 것이다. 그는 독한 마음을 먹었음에 틀림없다. 이제 남은 삼십 수일 동안 정말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기로 작정하였으니. 그 더운 중동의 태양빛 아래서 말이다.

요나와 박넝쿨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준비해주셨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또 하나의 긍휼의 표시였다. 꼭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요나야, 내가 니느웨 사람만 사랑하는게 아니고, 너도 끔찍히 사랑한단다.” 요나의 머리에는 그늘이 졌고 요나는 이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다. 요나서에서 처음으로 요나는 이렇게 기뻐하였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던 요나는 자기에게 그늘을 만들어주는 박넝쿨 때문에 무지무지 기뻤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조금 편하면 우리는 심히 기뻐한다. 돈 좀 있으면 참 기분이 좋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심히 즐겁다. 이것이 우리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는가?

하나님의 소품들: 벌레 한 마리, 뜨거운 동풍
요나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를 명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벌레 한 마리에게 명하셨다. 박넝쿨을 씹으라고. 다시 요나는 새로운 신학교에 입학하여야 했다. 박넝쿨 신학교. 아침에 일어난 요나는 깜짝 놀랐다. 박넝쿨이 다 시들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하나님은 더하셔서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다. 요나는 미칠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요나는 하나님께 분노한다. 사느니 죽는게 더 낫다고.

하나님의 두번째 응답(9절)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박넝쿨로 인하여 성낼 권리가 있느냐고. 요나는 더욱 신경이 날카로와졌고, 강퍅해져있다. 첫 항변에서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찔끔했던 요나, 이제는 감히 대답한다. 나는 화낼 권리가 있다고. 요나는 지금 울고 있는가? 그래 울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나 속이 상해서 말이다.

울고 있는 요나, 울고 계시는 예수님
여기 요나보다 더 큰 이가 계시다. 그는 지금 울고 계신다. 니느웨와 정반대의 현실 앞에서 말이다. 요나는 회개한 도시가 구원을 얻는 것을 한탄하여 울고 있고,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도시를 보고 울고 계신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 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13:34,35
당신도 울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도시 때문에, 왜 울고 있는가? 조국 대한민국이 보이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미국이 보이는가? 이 세상이 보이는가? 그들 죽어가는 영혼들이 보이는가?

요나서의 결론(4:10-11)
열정이 아니라 긍휼 그리고 자기 부인
모든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그가 귀중히 여기는 가치와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가치가 다르다는데서 출발한다. 자기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한 이기적 열정은 하나님이 영혼을 향하여 가지고 계시는 긍휼을 쫓아낸다. 요나가 귀중히 여긴 것은 박넝쿨이었고,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신 것은 십이만에 달하는 니느웨 백성들이었다. 요나가 귀중히 여긴 모든 가치는 결국 박넝쿨에 불과한 것들이었음을 하나님은 요나와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계신다. 그것은 하룻밤에 낫다고 하룻밤에 망해버리는 가치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가치를 가지고 목숨을 걸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합당한가? 하나님이 니느웨 백성을 귀히 여기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단 말인가?

요나의 두 번째 회개?
우리는 본문에서 요나의 두 번째 회개를 만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가정하기는 한다. 요나서는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난다. 요나는 아마도 두 번째 회개로 하나님께 대답을 했을 것 같다. 그러나 성경은 대답을 남겨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 하나님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을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요나의 회개는 선교사의 마음이 선교에 가 있지 않았던 것에 대한 근본적인 회개였다. 선교사가 하나님의 관심보다 자기 관심에 더 사로잡혀 있는 모습을 회개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문제이다. 교회의 마음이, 성도의 마음이 하나님이 소중히 여기는 것에 가닿지 못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가 박넝쿨을 귀중히 여긴 행위는,
1)선교사역에서 자기 뜻, 자기 영광을 추구한 불복종이었고,
2)선교사역 중 자기 안녕과 평안을 물질적인 데서 구한 불복종이었으며,
3)명성-하루에 났다가 그것이 자기 힘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루에 망하는-을 의식한, 즉 교회나 선교사가 자기 이름을 의식한 불순종이요, 들의 풀같고 아침 안개같은 인생을 귀히 여긴 불순종이며, 돈을 귀히 여기고 가정을 귀히 여긴 행위와 마음으로서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주님이 부르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불순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의 박넝쿨은 자기의 가족, 자식, 아내를 향한 제한된 사랑이요, 자기 직업, 장래의 꿈, 중류적 삶을 향한 기대 등을 향한 집착인 것이다. 지나가는 인간의 군상 앞에서 그들의 목적없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는가? 영혼이 보이는가?
예수님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팔레스타인의 민중들을 바라보셨다. 그 영혼들을 보셨다. 그리고 고통스러움으로 민망해하셨다.
찰스 피니는 어느 날 뉴욕의 맨하탄 거리를 걷다가 지나는 비즈니스맨들의 비참한 영혼의 상태를 보고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며 꿇어앉았다. 그 영혼들을 어떻게 하실 것이냐고 하나님께 물으며 그는 맨하탄 거리에서 울었다.

왜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일까? 박넝쿨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이 귀중히 여기시는 가치를 볼 수가 없다. 나의 박넝쿨이 무너져야, 하나님의 영혼을 볼 수 있다. 당신이 박넝쿨을 스스로 내려놓을수만 있다면 당신의 삶은 새로운 가치, 하나님의 가치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돌이킨다면, 여기서 선교사가 돌이킨다면, 교회와 선교지에서 일대 대변혁이 일어날 것이다. 대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이것은 교회사의 대변혁이요, 선교역사의 대변혁인 것이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박넝쿨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버리실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주님의 가치를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것은 실로 가치있는 일이다. 축복된 일이다.
에쿠아돌의 아우카 족 선교를 시도하다가 4명의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아우카 족의 창에 스물 아홉 나이로 하나님께 부름받았던 짐 엘리옷은 일기에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다 지킬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우리가 아는가? 재산, 지식, 경력, 사랑하는 가족 모두가 다 박넝쿨이요,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이다. 아무리 지키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한 순간이라도 가져가시려고 하시면 다 놓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목숨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안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위하여 죽으신 그 많은 생명들, 영혼들! 그 가치를 얻기 위하여 ‘지킬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자, 그것들을 내려놓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당신은 지킬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하여 평생을, 생명을 바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언젠가 하나님이 원하시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려놓아야 할 것들을 위해서, 그것들을 얻기 위하여 당신의 삶을 드리고 있지 않은가? 당신에게 정말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그것을 위하여 ‘지킬 수 없는 것’을 내려놓을 용의가 있는가? 그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탁월한 헌신이다.
짐 엘리옷은 20세 때 그의 일기에 또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나님, 내가 기도하오니 마른 막대기 같은 나의 인생에 불을 붙여주셔서 당신을 위해 타오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나의 하나님, 내 인생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을 위해 소모되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나는 오래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 주 예수님처럼 가득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런 탁월한 헌신에로 초청하신다.
우리가 이런 헌신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다면, 세계복음화의 대과업은 머지않아 그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주의 날은 결코 이런 탁월한 헌신 앞에서 멀지 않은 것이다.
마라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