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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강해 (1) - 잠자는 교회와 영적 각성

요나 1:1-16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7-06-08

말씀내용
요나서 서론
요나서를 통해서 얻어야 하는 하나님의 교훈들과
요나서를 상고하는 이유들

1. 요나서는 교회의 자화상, 즉 너와 나의 자화상이다.
불순종하고, 영적 잠에 빠져들어있으며, 또는 각성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놀랍게 감당하다가도 민족이기주의와 철저한 개인 이기주의와 같은 편협한 자기 이해에 빠져들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그림같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게, 선교사에게 그리고 신자 개인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이다.

2. 요나서는 잃어버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그림같은 언어로 보여주면서 선교의 기초와 핵심을 가르쳐 준다.
불순종하는 요나를 향하여, 잃어버려진 이방의 뱃사람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늘에 사무칠 정도로 악에 빠져있던 니느웨 사람들을 향하여 나타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는 목도한다.

3. 물론 요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장 묘사적으로 표현한 예언서이다.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의 도리와 부활의 권능을 체험적으로 배우게 된다.

말씀으로 들어가서
소명(Calling)과 하나님을 낯을 피한 선지자(vv.1-3)
요나는 특이한 선지자였다. 그야말로 오늘날의 선교사를 연상시키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이방민족에게로 보냄을 받은 선지자였던 것이다. 그는 그 악독이 하늘에 사무칠만큼 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로 가라고 보냄을 받는다.

요나의 시대적 정황: BC 8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여로보암 2세)의 정치경제적 부흥
요나가 소명을 거부한 이유를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먼저 고려할 필요가 있다. 요나가 활약했던 주전 8세기의 여로보암 2세 치하의 북왕국 이스라엘은 인근 적대국이었던 다메섹(아람)이 앗수르의 침입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그들에게 빼앗겼던(왕하10:32-33; 12:17) 국토를 회복하고 전례없는 경제 부흥을 일으켜 민족적 자부심을 크게 고양시켰다(암6:1). 이같은 국가적 번영에 도취된 이스라엘은 그들의 부패한 사회와 영적 타락은 아랑곳없이 하나님이 곧 이방 제국을 뒤엎고 이스라엘이 열국 위에 드높여질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있었다(암5:18-20).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전한 국토 회복의 예언(왕하14:25)이 실현된 것을 보았거나 기억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요나에게 새로 임한 소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염원을 성취시켜 주시리라는 긍정적 기대를 가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 시대의 두 선지자: 아모스와 요나
여로보암 2세 치하에 두 선지자가 부름을 받았으니 요나와 아모스였다. 요나는 그런대로 이스라엘 출신이라 하고, 아모스는 남왕국 유대 출신으로 북왕국 이스라엘로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였다(암1:1, 드고아는 예루살렘 남쪽 성읍). 요나는 국가 부흥의 메시지를 선포하여 각광을 받았고, 아모스는 사람들만 모이면 이스라엘 사회의 총체적 부패와 패역함을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하였다. 요나는 인기를 한 몸에 누릴 수 있었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으나, 아모스는 조롱과 멸시를 당하다가 결국에는 이스라엘에서 추방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둘 다 동일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대언하였으나 내용은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언제든지 이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요나의 문제(1,2절): 성공주의 사고방식과 민족주의
우리의 잘 살아가는 인생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이것이 요나의 삶에 파문을 가져왔다. 이것은 사실 절대적으로 좋은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는 자기 백성의 기대에 맞는 예언을 하고 각광을 받아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요나는 이 소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할만큼의 머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사 그의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 돌이켜 회개하는 니느웨 백성들을 사하실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원수의 나라와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폐허가 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니느웨에서 그가 이 메시지를 전한다 하자. 아마 그에게 돌아올 수 있는 최고의 대우는 조롱일 것을 또한 그는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의 불행한 동료였던 아모스의 삶을 통해서 그의 선교사역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될 것이란 것 정도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말 요나로 하여금 소명을 거부/조정하게 만든 요인은 바로 민족 이기주의의 편견이었다. 지금까지 자기의 조국 이스라엘은 거의 150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돌이킴이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저 악한 니느웨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시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이 있으시다면 자기의 백성을 돌아보셔야지 왜 니느웨의 백성을 돌아보시느냐하는 편견이 그에게는 동시대의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그의 동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고 하신 말씀을 잊었다. 이것이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잘못의 근원이었다. 자기들이 섬기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신학의 문제이다.

우리가 가야 할 곳, 니느웨
그렇다. 우리가 가도록 보내심을 받는 곳은 언제나 니느웨이다. 사실 니느웨는 우리가 본성적으로 거부하는 곳이다. 니느웨는 악독함이 하늘 보좌에 미치는 그런 곳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내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선교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섭리에 대한 해석(3절): 일이 잘 풀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일이 잘 풀려나가는 때에 경계심을 바짝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뜻밖에 일이 잘 풀려나가는 것을 보기 시작하면, “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구나”라고 착각하기 일쑤다. 요나가 그랬다. 그는 니느웨 대신 다시스를 선택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소명을 거부하는대신 조정하였다. 물론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거기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나름의 합리화를 하면서 가고 있었을 것이다. “왜 꼭 니느웨란 말인가? 다시스도 선교지 아닌가?” 그가 배를 타기 위하여 항구 도시인 욥바에 도착하였을 때, 이게 웬 일인가?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게 아닌가? 게다가 배가 만선이 아니어서 표까지 얻을 수 있었다. 고대에 다시스로 가는 배가 오늘날의 고속버스처럼 5분에서 10분 간격으로 있었을 리가 없다. 기껏해야 며칠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그것도 정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형편에 ‘마침’ 배를 만났다는 것은 요나의 입장에서 볼 때, 거의 기적이었다. 그는 지금 도망가는 길이 아닌가? 도망가는 사람이 욥바의 한 여관에서 배를 기다린다고 해보자. 얼마나 조바심나는 일이겠는가? 주님께서 언제 그를 쫓아오실지 모르는데 말이다. 요나는 생각했다. “이렇게 배를 제때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야”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낯을 피한다는 것”(3,10절)
결국, 그가 선택한 길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길이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 있다는 것은 철저하게 내면의 문제요,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의 외양이나 행사를 통해서는 결단코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이 없다. 목사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고서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고, 열매도 나타날 수 있다. 수십년 전에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설교가들이었던 짐 스웨거트 목사나 짐 베이커 목사의 경우를 보라. 이들은 여자들과 불륜의 관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설교했고, 많은 사람이 그들의 설교에 회개하며 반응하였다. 하나님의 낯을 떠난 하나님의 종의 사역에서 일어나는 열매는 그 자신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저주거리인 셈이다. 나의 사역의 열매가 여전하다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있는 증거는 아니다.
우리의 종교가 우리의 내면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가 목사라거나 혹은 장로라거나 혹은 그 무슨 직분이나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우리 내면이 하나님 앞에서 올바름을 증명해주는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인간일 뿐이고,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내면을 보신다.

내려가는 길(3절)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은 오로지 ‘내려가는 길’이다. 그는 욥바로 내려갔고, 배로 내려갔으며(v.3), 또 배 밑층으로 내려갔다(v.5).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해야 할 만큼, 기가 막힐 정도로 요나의 삶은 바닥으로 떨어져가기 시작하였음을 성경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행위는,
1)선교의 부르심에 대한 불복종이었고,
2)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그치는 불복종이었으며,
3)날마다 순간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듣기를 거절하는 불복종이었고,
4)순간마다 우리의 눈과 행위와 생각이 범죄하도록 허용하고 찰나의 순간이라도 죄를 탐닉하는 불복종의 행위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불순종이 있고 또 매일 매일의 삶에서의 불순종이 있다.
1번만 충족되었다고 해서, 즉 선교사가 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선교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가 혹 그 교회가 하나님의 낯을 향하여, 그 거룩하신 면전에 사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교회와 선교사의 큰 유혹이다. 선교를 하면서도 그의 내면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 세계선교의 일대 전환점으로서 선교사와 교회가 회개해야 할 부분이다.

또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를 열심히 나오고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이 우리의 내면이 건강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 있음을 보장해주는 것이거나 증명해주는 것도 아니다.

추적하시는 하나님(4~10절)

끝날뻔한 이야기: 사람의 거절이 하나님의 거절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야, 네가 나의 부르심을 거절하니 할 수 없구나, 다른 사람을 찾아보마. 잘 가거라.”라고 말씀하셨다면 요나서-니느웨 전도기가 아닌-는 1장 3절로 끝날 뻔하였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그를 추적하고 계신다. 이제부터의 모든 기사는 요나에게 있어서 은혜로 주시는 덤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인생은 다 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의 삶은 그야말로 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죽었어도 골백번 죽어야 했을 저주받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운명이 바뀌어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었으니 말이다. 찬송가 가사와 같이, “나 이제 생명 있음은 주님의 은사요”(찬송가 27장) 옳은 고백인 것이다.
재난이 가져오는 위기와 비극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데서 비롯된다. 여호와의 낯을 피한 비극인 것이다(2,3절).
하나님은 저쪽으로 가라고 하시는데 인간은 불순종하고 이쪽으로 가는 배에 그의 몸을 싣는 것이다. 이것이 비극이고 재난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첫번째 소품: 폭풍(5절)
‘그러나’ 하나님은 폭풍으로 응답하셨다. 폭풍으로 도망가는 선교사를 추적하신 것이다. 이것이 요나서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먼저 사용하신 도구였다.

잠에 빠진 선지자와 깨어있는(각성된) 세상(vv.4-5)
여호와의 낯을 피한 성도나 교회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영적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세상은 난리가 났어도, 교회는 잠을 잘 수 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요나를 추적하시기 위해서 대풍을 보내셔서 배는 거의 깨어질 지경이 되었다. 바다에서 뼈가 굵은 뱃사람들로 모두 두려워하여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한편으로는 배를 가볍게 해보려고 짐들을 바다로 던졌다. 그러나 정작 모든 원인의 제공자인 요나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깊은 잠에 빠져있다. 너무나 그의 잠이 깊었던 나머지 그는 이 난리통에서도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요나) 마8:23-27; 마12:38-41
예수님은 바래새인과 서기관들이 표적을 구할 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다. 이것은 분명히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사흘만에 나오게 된 것을 부활의 표적으로 지적하신 것이다.
풍랑을 만난 배에서 잠을 잔 사람은 성경에서 예수님과 요나이다. 그러나 잠을 자게 된 원인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짓 평안의 문제: 거짓 평안은 영혼을 잠자게 한다.
어떻게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주하는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처음 배를 탈 때만 해도 그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불안과 초조의 심정을 달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선지자인 요나가 욥바에 배를 타려고 나타났을 때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요나에게 물었을 것이다. “다시스에 집회가 있으신가 보죠?” “예, 그러니까 예, 집회가 있어서요.” 이렇게 대답을 하면서 얼버무리는 동안 요나는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을 것이다. 도망자이니까. 그러나 배가 출항하고 약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두렵고 떨리던 그의 마음도 합리화와 더불어 조금씩 안정이 되어갔을 것이고, 이런 거짓 평안을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 심한 긴장으로 인한 그의 피곤한 몸은 자기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을 것이다. “괜찮아, 괜찮을거야, 배가 이미 출항하지 않았는가?”이렇게 속삭이면서 말이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거짓 양심을 강요하고 만들어내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죄의 출발과 진행이 언제나 이런 식이다. 갑작스럽게 본색을 드러내고 시작하지 않는다. 천천히 그리고 점진적으로 죄는 죄 아닌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에게 속삭이며 결국에는 우리를 점령하고 마는 것이다.

교회와 세상의 상관관계: 살아보려는 인간의 노력이 헛될 수 밖에 없는 이유
요나와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공연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폭풍이 임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며 요나 때문에 보내신 것이다.
폭풍이 임하는데 정작 주인공이요, 원인 제공자인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다. 교회는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다. 배에 탄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폭풍으로부터 벗어나 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배를 가볍게 하려고 짐들을 바닷물 속에 던져 넣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른데 있었다. 이렇게 세상이 임하는 재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지만 그 원인은 전혀 다른데 있는 것이다. 사회과학적 분석이 통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가 하나님의 낯을 피한데서 비롯된 재난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세상의 역사 속에서 교회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되는 세상의 재난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든 재난의 원인이 다 교회의 잘못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교회는 그 재난과 무관하지는 않다. 구약의 역사가 이것을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고 한국의 역사에서도 이런 연관성을 찾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사례) 신사참배와 한국전쟁
IMF
삼선개헌을 찬성한 목사들의 명단을 발표한 사례(이만열교수)

영적 잠을 자는 교회가 할 수 있는 것
물론 영적 잠에 빠져서도 교회는 형식적인 모든 프로그램들은 다 할 수 있고 성도는 교회 활동과 봉사를 다 할 수 있다. 요나는 잠을 자고 있지만 여전히 선지자였다. 육신의 눈으로는 잠을 자고 있는지 깨어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각성의 시작(vv.6-10)

부끄러운 각성, 수치의 연속
배 밑층에서 잠에 빠져있던 요나는 선장에 의해 깨움을 받는다. 종종 교회는 잠을 자다가 부끄럽게도 세상에 의해 깨움을 당하곤 하지 않는가? 세상이 교회를 썩었다고 하고, 연일 매스컴에서 때리고, 등등 하여 교회는 자성을 하기 시작하지 않는가?
그리고 ‘네 신에게 빌어보라’는 권면을 받는다(6). 제비를 뽑는다. 그것이 요나에게 정확하게 떨어졌다(7).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다. 제비를 뽑아서 요나가 걸린 일은 잘 된 일인가, 나쁜 일인가? 이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요나가 걸리면 하나님의 이름이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자기 명예를 중시하시지만, 오직 한 경우, 그것을 양보하실 때가 있다. 그것은 자기 백성의 거룩함을 이루시고자 하실 때이다.

요나에게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요나는 질문을 받는다. 왜 이 재앙이 임하였는가? 너는 도대체 누구냐?(8) 왜 여기까지 오도록 그는 잠을 자야 했는가? 왜 깬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을까? 이제야 요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면밀한 자기성찰(v.9)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그의 고전적 명저인 <기독교강요> 에서 신앙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는 자기를 알지 못하고 또 자기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요나는 고백한다. 요나는 자기를 드디어 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9). 이 고백은 문제가 있다. 과연 그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였던가? 여호와를 경외했으면 여기까지 왔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님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비록 넘어져서 여기까지 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10). 드디어 한 넘어진 선교사, 넘어진 하나님의 사람의 돌이킴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정한 회개(v.10)
영적 각성이나 부흥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정직하게 나타낼 때,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가면을 벗어 던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하나님 앞에 솔직히 말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을 때, 각성과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리의 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을 기대한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내 영혼이 부딪치는 경험이 없는 사람!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가슴을 친 일이 없는 사람!
이런 경험과 고백이 없이는 아무도 새로워 질 수 없는 것이다.

예언적 각성과 선상의 부흥 그리고 선원 복음화(vv.11-16)

죄의 삯은 사망
요나가 진실한 고백을 하고, 회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풍랑은 가라앉지 않았다. 왜? 요나는 깨달았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철저하게 공의로우신 하나님! 그는 이 영적 깨달음으로부터 자살이나 자포자기의 충동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방인 선원들의 목숨을 건져주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죽음에 던지기로 작정한다. 이 결단이 행동에 옮겨지자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
요나는 입으로, 마음으로 회개하는데서 자신의 할 일을 끝내지 않았다.
선원들이 요나에게 묻는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11절). 드디어 구약의 가장 놀라운 예언적 말씀이 이 불순종한 선지자 요나로부터 계시된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12절).
우리의 문제는 회개를 가볍게 여기는 태도이다. 죄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회개도 가볍게 여길 수 있고, 이 문제의 근원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인 것이다.

선상의 부흥(16절)
잠자던 한 선교사의 각성은 선교의 전환점이 되었다. 물론 잠자던 한 교회의 각성이 세계선교의 놀라운 전환점이 된다고 하는 것은 재언할 필요가 없다.
선상의 부흥이 일어났다. 각기 이방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던 이들이 한결같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며,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다(16절). 저들이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이다. 여기서 부흥과 복음화는 거의 구별하기 힘들다.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하나님의 자비가 요나를 공의로 다루시는 그 자리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요나는 그렇게도 용납할 수 없었던 이방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을 죽음에 내던질 수 있는 자의 모습이 되어있지 않은가?

결론
당신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 교회의 모습은 배밑층에서 잠자고 있는 요나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데, 지금 너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은 지금도 네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네가 죽는 곳에서 생명구원이 일어난다.

불신자들과 예수를 믿지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가는 인생이 쉴 곳은 없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는 사람이 자신의 불순종하는 자아를 죽일 때 거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고 마침내 참 안식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 어거스틴이 그의 참회록에서 고백한 말을 알고 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 할 때까지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고백록 1:1) 하나님의 빛 앞으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나아온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 때 잃어버리게 될까봐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헛된 기쁨들이 한꺼번에 다 제거되었을 때 정말 너무나 상쾌했습니다……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신 당신은 진정 최상의 기쁨입니다. 제게서 그것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 취하신 당신은 비록 피와 살에는 아니지만, 그 어떤 즐거움보다 더 감미롭습니다. 마음 속 그 어떤 비밀보다 더 깊이 숨겨져 있는 당신은 모든 빛 보다 더 빛나는 분입니다. 자신들에게서 모든 영광을 찾으려는 인간의 눈에는 비록 보이지 않지만……. 당신은 모든 영광을 능가하는 분입니다. 오, 주 나의 하나님, 나의 빛, 나의 행복, 나의 구원이시여.”(고백록 9:1)
여러분, 하나님 앞에 나아오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쉬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큰 기쁨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채워주실 것이다. 여러분이 어거스틴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빵세>의 저자인 블레어 파스칼이 죽은지(1662년) 며칠 후 한 하인이 우연히 주인의 외투 안에 숨겨진, 파스칼이 쓴 글들로 덮여있는 양피지 조각을 발견했다. 팔 년동안 파스칼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만남에 대한 신앙고백을 자기 자신만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총의 해 1654년,
11월 23일 월요일 성 클레멘트의 축일,
…….
저녁 약 열시 반부터
열두시 반쯤까지

철학자들과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바로 오늘 하나님 앞에 여러분이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라고 고백하고 나아오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만나주실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바다 속에 던져진 요나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큰 물고기에게 삼키운 바 된다. 이것은 진정한 죽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삼일 삼야 물고기 배속에 있다가 물고기가 그를 토해냄으로 부활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스스로 높아진 마음과 그 자아를 죽이지 않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안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들어야 한다. 요나와 같이 말해야 한다. "나를 죽여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우리가 죽어야 많은 영혼이 살아난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선교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선교사들이 죽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자기부인과 십자가 짐이 없다면 이런 선교사가 백만 명이 나와도 생명 구원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죽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살라는 것이다. 자기 밥을 다 찾아먹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은 자신의 권리는 물론, 남의 권리까지라고 할 수만 있거든 차지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기 권리를 다른 이들을 위해 양도하라는 것이다. 미쳤는가? 아니다. 지극히 정상이다. 우리의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의 제자답게 살아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런 일을 행하지 않는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자기를 죽이는 자는 주위의 많은 영혼들의 구원을 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부활의 생명을 경험한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자가 없다.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여함을 알고 싶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의미이다(빌3:10-11).

세상에는 두가지 방식의 삶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가르쳐주신 삶의 방식이고 하나는 사단이 우리 속에 가만히 넣어주려는 삶의 방식이다. 전자는 요나를 통해 가르쳐진, “나를 죽여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는 것이지만, 후자는 언제나 “나도 살고 너도 사는 방법이 있지 않느냐”고 속삭인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치신 한 알의 밀의 비유와 십자가의 죽으심은 타협없이 말한다. 죽어야 사는 것은 만고불변의 영적 법칙이라고.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할 것이다"(요12:25).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10:17,18).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이다. 기독교의 비밀인 것이다. 아직 한 번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죽여보지 못한 사람은 아직 한 번도 기독교를 제대로 알아 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나를 죽여라, 그래야 너희가 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다. 우리는 그가 죽음으로 살아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의 부르심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과 같은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