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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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강해 (2) - 각성된 선교사와 니느웨의 부흥

요나 1:17 ~ 3:10 / 김형익 목사 / 기타 설교 / 2007-06-09

말씀내용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
스올의 뱃속에서-1:17-2:10
“인간은 가장 비천한 지점에 설 때에, 비로소 가장 고귀한 진리를 깨닫는다.”

요나서 2장에서 우리는 고기 배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요나의 마음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요나의 내면 탐구이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내면의 변화, 마음의 변화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본문은 매우 의미가 있다.
요나서가 좋은 이유는 요나서가 노골적으로 해외선교에 대한 강조를 해주는 성경이라서가 아니라, 선교를 말하면서도 역시 하나님의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정말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요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놀라운 말씀이 된다.

요나가 하나님을 등졌을 때, 그가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이 전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배 밖으로 던져져 죽음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버림을 받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요나의 신학교 입학(1:17)
하나님의 준비-새로운 시작
요나의 몸이 바다로 던져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고 계셨다. ‘마침’ 물고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요나를 추적하기 위하여 폭풍을 준비하여 보내셨고, 이제는 미리부터 큰 물고기가 배에 접근하여 던져지게 될 요나를 받아들이게 하셨다. 한치의 착오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어쩌면 요나서는 1:16로 끝날 수도 있었다. ‘요나는 그렇게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고 후기를 달면서 말이다. 이것은 삼손의 스토리와도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비록 처음에는 실수를 하였으나, 마지막에는 깨닫고 복음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말이다. 그러나 요나서의 관심은 요나만이 아니다. 요나서의 관심은 요나 자신과, 니느웨 백성들이다. 이 두 대상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대상들인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이다. 요나서가 1장으로 끝나지 않은 것은 다시 한 번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었다.

대어(大魚)신학대학원(The Great Fish Theological Seminary)
한 설교가는 요나가 고기의 뱃속에 들어간 것을 요나가 하나님의 신학교에 입학한 것에 비유하였다. 옳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교훈을 받기 위해 정통 사마리아 신학교보다 좋은 대어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이제 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요나를 만나보자.

기도를 배우는 요나(2:1,2)
요나가 기도를 하고 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 요나가 기도를 하다니. 이것이 요나가 이 신학교에서 처음 배운 것이고 그의 첫 번째 변화였다. 요나는 잘 나가던 시절에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아모스 선지자와는 달리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선지자가 된 것은 아무래도 자기의 설교 실력과 족집게 같은 예언이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에도 기도하지 않았다. 그가 제대로 기도를 하기만 했었더라면 그는 다시스 행 배를 타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배 밑층에 내려가 깊이 잠든 요나를 깨우면서 선장이 기도하라고 했을 때조차도 그는 결코 기도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도와는 거리가 먼 선지자가 이제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진정으로 기도를 하게 되는가? 그 최적의 환경은 다름 아닌 물고기 뱃속이다. 이것은 인생의 광야를 의미한다. 우리가 만난 물고기 뱃속 즉 광야는 있었는가? 아니면 혹시 지금 나는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련하시기 위해서 집어넣으시는 제련소와 같고,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의 자리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한,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에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놀라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신학교에로 무언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입학시키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이 없이 우리는 잘 기도하지 않는다.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요나(2:2)
그는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왜 나에게 이 고난이 찾아온 것인가? 내가 다시스로 향하기 시작한 이후 내게 찾아온 일련의 고난은 하나님의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인가? 고난의 의미를 묻는 선지자에게는 소망이 있었다. 고난의 의미를 묻기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이 있다.
다윗처럼 고난을 많이 체험하였고, 그 의미를 바르게 파악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이렇게 고난의 의미를 고백한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71).

응답하신 하나님(2:2)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고, 부르짖었다. 사실상, 물고기의 뱃속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의 마음으로는 부르짖었겠지만, 그의 부르짖음은 거의 신음이었을 것이다. 비릿하고, 숨이 막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캄캄한 물고기의 뱃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향하여 신음하였다. 그런데 이 신음은 응답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에게 대답하셨고, 그 음성을 들으셨다. 어쩌면 우리가 즐겨 부르는 복음성가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는 바로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찬송(v.9)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모하시는지
...........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를 바라볼지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섭리를 깨닫는 요나(2:3)
하나님을 만나면 과거가 열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안목의 분명한 변화가 생긴다. 요나는 비로소 자신의 무가치함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전에 잘 나가던 시절에는 자신만만했고,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하나님의 낯을 떠나기로 하고, 다시스 행 배를 탔고,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자신에게 긍휼하심을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가치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베푸시고 존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자신만만한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보잘 것 없는 그리고 죄인된 존재임을 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찾아오셨으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사랑받은 존재임을 인식한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로이드 존스가 언제나 설명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만 설명이 가능한 사람’인 것이다.
요나는 자신을 바다 가운데 던져 넣은 것은 뱃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주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를 둘러 덮은 것은 그냥 파도가 아니라, ‘주의’ 파도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주님이 계셨다. 주님이 만드신 일이다. 이런 인식의 지평이 열리는 것은 주님을 만날 때만 이다. 주님을 만나면, 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된다.
요셉은 17살 때 형들이 애굽에 팔았던 것을 생각만 해도 한이 맺히고 억울한 일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요셉은 복수혈전을 벌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5,7,8).
요셉에게는 믿음으로 과거를 바라볼 수 있는 지평이 열렸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이제 목전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두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8:2).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눈앞에 둔 즈음에, 기억해서 좋을 것이 별로 없을 과거 40년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과거를 덮어두라”고 말해야 옳지 않은가? 왜 과거를 기억해야 하는가? 그 이유가 명백하다.
“신 8:12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13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15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16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17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8:12-18).

이런 과거에 대한 정리가 없이는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 수가 없다. 우리 자신도 이런 신앙적 과거 정리가 꼭 필요하다. 예수를 믿는 것은 과거를 덮어놓고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어느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고 하여도, 우리에게 열려야 할 인식의 지평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나를 아셨고, 나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이며, 내 인생의 한 순간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둠을 당한 적이 없으며 어느 일도 우연히 일어난 일이 없고, 하나님의 손안에서 일어난 최고의 과정, 최상의 과정이었음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에는 한 맺힌 일들로 기억되던 것도, 믿음의 눈으로 다시 보게되었을 때에는 하나님의 가장 선하신 섭리가 배어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 30대의 위기가 있다. 대개 20대 말에서 30대 사이에 찾아오는 심리적 현상인데, 그때 심각하게 심리적 비타민 3A 결핍증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3A는 affection(애정), acceptance(용납), affirmation(인정)이다. 어려서부터 겪어오던 현상이 한꺼번에 심리적인 부담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이런 것을 신앙으로 넘어서는 것은 바로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다.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의 토대이다. 우리가 무엇을 믿는 것인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아버지가 되시며 그분은 참으로 좋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을 기대할만 하게 만드는 사건인가? 이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미래 인생에 대하여 긍정적인 기대를 가질 수 있겠는가?
당신이 이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가?
섭리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그분은 너무나도 좋으신 분이시다.

“다시” 성전을 바라보는 요나(2:4)
요나의 첫 번째 결심이 나타난다.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이다 하는 것이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낯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이며, 고통스런 일인가 하는 것을 알았다. 배웠다. 이제 그는 다짐한다. 이전에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떠났었지만, 이제는 다시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 설령 하나님께서 나를 쫓아내시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말이다. 하나님의 면전을 바라보겠다고 말이다. 하나님의 성전은 바로 그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임재하였던 바로 그곳이다(대하7:1-3). 이 말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겠다는 의미이고, 다시 기도하겠다는 결심이며, 다시 영혼들을 사랑하여 전도하겠다는 각오이다. 다시 이전의 가장 활기찼던 신앙의 삶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결심이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은 다시 타협하지 않겠다는 뜻인 것이다.
언제라도 좋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결심이 필요하다. 백 번 넘어져도 백 한번 일어날 수 있는 결심이 필요하다. ‘다시’. 이것은 우리의 깨어지기 쉬운 삶에 너무나도 중요한 단어인 것이다.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구원을 고백하는 요나(2:5-7)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한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며 비참한 일인지를 알았다. 그것은 물이 그의 영혼까지 둘러 죽게 하고, 알 수 없는 심연의 깊음이 그를 에워싸고, 해초가 그 머리를 죄는 것이었으며, 내려가다 못해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나올 수 없도록 땅이 그 빗장으로 그를 막아서는 저주스런 비참함임을 그는 알았다. 그러나 그는 노래한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여주셨음을 노래한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놀라울 정도로 특이한 사실은, 요나는 한 번도 구원해달라고 외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우리와 큰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아닌가? 오히려 그는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 그의 육신은 비록 고기의 뱃속에 매여서 곧 죽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요나가 자신이 곧 살아날 것이라고 믿었다고 생각할 근거가 그렇게 강하지 않다) 그는 구원받은 자신의 영혼을 인하여 구원을 노래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쫓겨난 자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의 신음에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진정한 고난은 물고기 뱃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나는 이것을 배웠다.
이제 하나님과 화해하였다고 확신하였기에 요나는 눈 앞에 보이는 임박한 죽음의 증거들을 극복하고 구원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감사가 터지는 요나(2:8-9)
요나는 감사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물고기의 뱃속으로부터 그가 건져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한 감사가 아니었다. 사실, 요나는 고기 뱃속으로부터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처럼, 구원 곧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발견한 것이다(2:9).
요나는 하나님께서 아직 그의 육신의 생명을 구원해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구원해주시려고 하셨기 때문에 감사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의 반역으로부터 돌이키게 하시고 다시 한번 주를 부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대하여 감사하였다. 그는 영혼의 구원을 감사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끊임없으며 또한 함께 하시는 은혜와 긍휼에 감사하였다.
그의 감사는 노래였다. 그는 감사하는 목소리(a song of thanksgiving)로 주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다. 살든지 죽든지 그는 서원을 주께 갚겠노라고 한다.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고 신앙을 고백한다. 요나의 감사는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감사였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이다. 여기서 그가 부른 감사의 노래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자’ 그것이었을 것이다.

신학교 졸업(2:10)
요나는 이제 다 배웠다. 하나님의 신학교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려고 하신 모든 것을 배웠다. 이제 더 이상 그는 학교에 매여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명하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셨다. 졸업한 것이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낯을 향하게 되었다.
기도를 배웠다.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다.
하나님과 다시 교제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 앞에 다시 감사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물고기 뱃속은 요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
니느웨의 부흥-3:1-10
사명을 다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람을 데려가시지 않는다. 요나에게는 사명이 남아있었다. 하나님이 요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니느웨 사람들을 사랑하셨다. 이제는 니느웨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열매를 맺어야 했다.

두 번째 소명, 두 번째 기회(3:1-2)
다시 명하셨다. 이것은 처음의 명령과 다소 차이가 있다. ‘쳐서(against)' 외치기보다는 ’에게‘(to) 외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4절에서 요나가 외친 그 메시지를 볼 때, 두 번째로 주신 명령은 한시적인 심판의 선언이었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가 엉뚱한 일을 벌이고 있는 동안에 니느웨의 죄악은 더욱 하늘에 사무치게 되었고, 이제 심판의 날은 40일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님의 사람이 부르심 앞에서 고민하며 불순종하고 있는 순간에도 사람들은 죽어가고 있다.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채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선교의 긴박성을 바르게 보여주는 말씀이다.

요나의 순종(3:3-4)
니느웨는 삼일길이 걸리는 큰 성읍이라고 설명된다. 요나는 니느웨 선교 첫날, 하룻길을 다니며 외쳤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요나의 외침을 듣는 사람들마다 회개하며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닌가?

니느웨의 부흥(3:5-9)
요나는 다음 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첫 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반응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니느웨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었다. 심판의 두려움이 엄습하였고, 심지어는 왕에게까지 이 각성이 전달되었다. 왕은 명하였다. 백성은 물론 짐승까지도 아무 것도 먹지 말고 마시지 말고 회개하되,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께 힘써 부르짖을 것이며, 각각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라고 하였다. 니느웨에 부흥이 임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를 잘 들은 이유
선교사 자신의 복음체험이 한없이 중요하다. 요나는 싸인(표적) 그 자체였다.
니느웨에서의 전파가 요나의 물고기 체험 전이었더라면, 아마도 전파 자체에 효과가 별로 없었을 것이며, 거기에 대한 반응도 역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요나가 큰 고기에 삼켰다가 페니키아의 해변 위에 증인들이 보는 앞에서 토해내졌다면, 아마도 증인들은 이 이야기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을 것이며 물고기 신을 숭배하던 사람들이 요나를 기꺼이 하나님의 메신저로 받아들였고 그 일을 기억하고 오랜 후에까지 그 이야기를 보존시켰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고대 니느웨의 유적이 발견된 티그리스 계곡 상류의 언덕이름은 수세기 동안 “Neby Yunas"(선지자 요나)라고 불리워졌다. 비록 니느웨 지역은 오래도록 잊혀졌지만.
탁월한 선교의 업적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고국을 떠나기 전에 부흥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알며 그 광채를 얼굴에 지니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사 자신의 복음 체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한없이 중요하다.

부흥의 시작:‘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리에 있는가?’
부흥의 시작은 요나라는 단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써 왔다. 뿐만 아니라, 요나가 미래의 사역에 대해서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한 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쓰신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가?”

진정한 회개(대하7:14)는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
니느웨 왕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보다도 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 입술로 부르짖을 뿐만 아니라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모든 강포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개는 돌이키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다. 그들은 실로 그렇게 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하여금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니느웨의 부흥은 역사 속에서 재연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3일간 선교사가 외쳤는데, 시민들은 물론, 정치국원, 당원 그리고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가정해보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런 일은 과연 오늘날의 선교 현장에서 재연될 수 있는 일인가? 재연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서 발견하기 어렵다. 예수님은 “너희는 넉달이 지나야 추수하겠다고 하지 아니하느냐”고 물으시면서, “그러나 보라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요4:35). 영적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니느웨 부흥의 역사를 우리의 선교지 선교지 마다 다시 부어주시기를! 이런 부흥에 대한 기대없이 우리는 세계복음화의 성취를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3:10)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셨다. 니느웨 백성들이 먼저 돌이켰고 하나님은 이어서 뜻을 돌이키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는 입술을 보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셨다. 그리고 돌이키셨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얄팍한 입술이 아니다. 가볍기 짝이 없는 우리의 마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악한 길에서 떠난 것을 보셨다. 그리고 내리겠다고 예비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드디어 열매를 맺었다.

결론
요나와 니느웨를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부흥과 세계복음화의 비전-마지막 날의 임박 가능성
우리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만난 하나님을 만났는가?
우리는 과거를 신앙의 눈으로 정리하고 하나님의 구원과 좋으신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다시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하는 결심을 하고 있는가? 어떤 영역에서?
우리는 복음을 체험했는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된 것과 같이.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혹 아니면, 물고기 뱃속에 있는가? 하나님이 지금 당신에게 주시는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