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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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강해 (3) - 거룩한 순종이 가져온 영광스런 축복

학개 2:10-23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1-22

말씀내용
<거룩한 순종이 가져온 영광스런 축복> 학 2:10~23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축을 재개한지 3개월이 지났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이제 파종을 하기 위해서 이른 비가 내려주어야 하는 때였습니다. 이른 비가 파종 전에 오고 늦은 비가 추수 전에 와 주어야 큰 수확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자신들의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어서 그동안 고통을 겪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3개월 전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내려놓고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이른 비를 달라고 구할 권리가 생긴 것일까요? 하나님의 축복을 구할 권리를 그들은 이제 확보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또 하나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1.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는 가장 큰 문제?부정함의 만연(10~14)

A. 부정함은 전염력이 있어도 거룩함은 옮겨지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축의 일을 시작은 하였지만, 금새 생각이 나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생각의 나태함은 동기의 불순함만큼이나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다시 ‘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14). 그들이 부정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모든 일과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다 부정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섭섭하고 충격적인 말씀이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제사법으로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관한 두 가지를 물어보라고 학개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옷자락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제물의 고기를 쌌다면 그 옷자락이 그 제물에 닿았다고 해서 거룩한 성물로 변하는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학개 선지자가 묻자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또 하나를 묻습니다.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게 된 사람이 거룩한 제물을 만지게 되면 그 제물이 부정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그렇게 되면 제물이 부정해진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부정함은 전염이 되는데, 거룩함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손으로 거룩한 제물을 만지면 제물이 부정해지지만, 거룩한 제물이 부정한 것에 닿았다고 해서 부정한 것이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유컨대 감기는 전염이 되지만 건강은 전염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단 한 방울의 독약으로 컵에 가득 담긴 물을 오염시킬 수 있지만 한 방울의 깨끗한 물로 한 컵의 더러워진 물을 정화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B. 하나님의 지적(14)
하나님께서는 이로써 두 가지를 지적하십니다.

i. 외적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생각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있다는 외적 행위 때문에 자신들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성전 건축이라는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자체로 당연히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을 권리를 가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느새 이런 착각 속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성전을 짓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거룩한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셔야 한다.” 이런 천박한 생각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멸망하기 전 그들의 선조들이 가지고 있었던 태도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성전 제사를 드렸고, 이것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삶은 엉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 확신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조상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런 종교적 태도들이 이들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태만해진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주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노라면 어느 새,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을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런 태만한 태도를 무섭게 지적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렘 48:10). 이 게으른 태도는 깊이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어떻게 되겠지 하면서 쉽게 가려고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어? 우리가 평생 교회를 다녔는데 설마 지옥에 보내시겠어? 내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이 문제 하나 안 들어주시겠어?” 하는 식의 태도들입니다. 어느 새 익숙해져 버리는 것이 신앙 생활에서는 독입니다. 형식적 신앙으로, 태만함으로 흘러가는 길이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이런 익숙함과 형식적 신앙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때 우리는 첫 사랑의 은혜와 감격으로 주님을 섬기게 됩니다. 우리를 그 자리로 데려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쉽게 쓰는 표현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큰 은혜는 언제나 주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를 갈망하고 구하고 찾는 자들, 주님을 경외하고 주께로 피하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쌓아두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시 31:19). 이와 같이 은혜를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태만한 생각 속에 결코 머무르지 않습니다. 머무를 수 없게 됩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태만한 생각 속에 머물면서 신앙 생활을 하시지 않습니까?

ii.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과 함께 있어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다. 거룩함이 효율성보다 중요하다.
두번째로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16년 만에 다시 성전 건축을 재개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전과 같이 다시 접근을 하였습니다. 성전 건축을 하는 것이 힘에 부치는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유혹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방해하는 대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도와주겠다고 말하면서 접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은 너무 명확합니다.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다 백성과 함께 일한다고 해서 거룩해질 수 없으며, 도리어 거룩한 유다 백성들이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들 때문에 부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정함은 유다 사람들의 삶의 모든 국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거룩함을 유지해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호의(?)를 거절하는 결단을 해야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동일한 문제가 교회에서 일어납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교회에 많이 몰려오게 하면 교회는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명 연예인을 불러와서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게 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오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마음은 복음을 들을 가난한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결국 교회가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적지 않게 봅니다. 교회로 밀물처럼 몰려 왔던 사람들이 다 썰물이 되어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다시 교회를 이런 프로그램으로 몰아가고, 교회는 결국 거룩함을 훼손한 채, 믿지 않는 아니 믿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교회로 사람들이 밀려 들어온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이 교회의 거룩함을 몰아내고 교회의 양적 성장으로 향한다면 그 결과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지배하는 원리는 언제나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이 실효성이나 효율성보다 중요한 곳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세상의 것과 섞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권징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이 권징의 바른 시행이 없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고까지 말을 한 것입니다. 거룩함을 포기하고 효율성을 취한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복음의 능력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관심사, 교회 지체들인 성도들의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마땅하겠습니까? 자신과 교회의 거룩을 유지하고 그것을 상승시키는 일이 우리의 근본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일 때, 당회가 모일 때, 교회의 장로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할 뿐 아니라, 거룩한 교회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교회의 코이노니아가 모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의 교회인 벧샬롬교회가 더 거룩하고 정결한 교회로 설 수 있을까를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을 듣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땅한 반응인입니다.

2. 불순종은 징계를 초래하고 순종은 축복을 보장한다(15~19)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나서 그들의 삶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징계와 축복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 언제 징계하시는지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범죄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징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490년 동안 안식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것을 허용하고 참으셨습니다. 바벨론 제국의 손에 나라를 넘기시기까지 오래 참으셨습니다. 징계는 범죄하는 순간에 바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 시작됩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돌이키기 시작하는 순간에 즉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을 뿐입니다. 아직 그 일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19).”

여러분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으려는 목적 혹은 어떤 문제를 해결 받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매일 기도와 말씀읽기를 시작하셨다면 그것은 잘못된 동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서 그 일을 시작하셨다면 바로 그날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 전의 그들의 삶을 회상해 보라고 하십니다(15). 그때는 성전 건축이 황무한채 버려져 있던 때입니다. 그때 그들은 이십 석의 곡식더미를 털면 십 석 밖에 얻지 못했습니다. 오십 그릇의 포도주를 얻곤 하던 포도주 틀에서 이십 그릇 밖에 얻을 수 없었습니다. 삶에 만족이 없었고 곤고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나마 있는 것도 폭풍과 곰팡과 우박으로 쳐서 그것들을 거두어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때를 회상하라고 하십니까? 행복의 조건이 물질에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그것들을 거두어 가신다는 원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17). 하나님께서 악하셔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하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행복의 조건이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에 하나님이 오신다면,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살아간다면, 바로 그날부터 하나님은 그들을 축복하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물질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물질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적 생명을 저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성전 재건을 시작한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12~14)과 순수한 동기를 계속 가지고 가라(15~19)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순종은 징계, 순종은 축복이라는 하나의 인과율 같은 공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입니다. 둘 다 강조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최고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세상에서 축복 받고 잘 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것은 다 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친교를 누릴 수 있다면 그의 삶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그의 삶은 축복이다 라는 것입니다.

3. 성취의 메시지(20~23): 소망을 가지고 살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날 다시 학개 선지자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셨습니다(20). 그것은 그들의 살아 생전에 이루어질 일들은 아니었지만, 그들로 소망 가운데 살게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A. 세상 역사를 바꿀 것이다(21~22)
하나님께서는 6~7절에 주신 말씀을 반복하여 전하십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심판의 확실성을 다시 한 번 확증해주시고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6~7절에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함께 하나님 앞에 모든 나라가 무릎을 꿇게 될 것을 강조하였는데, 21~22절에서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강조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요한계시록 18장에서 분명하게 확인하게 됩니다.

B. 상상할 수 없는 은헤의 복: 스룹바벨, 너는 나의 인(23)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이 전세계적으로 임할 때(‘그 날에’ 23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택하신 종으로 스룹바벨을 안전하게 취하실 것이고 하나님의 도장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축복의 말씀이 얼마나 상상 조차 할 수 없는 은혜의 복인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그 어떤 가공할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안전을 누릴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어떻게 바뀌어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그 날에 안전을 보장받습니다. “너로 인장으로 삼는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기시겠다는 의미이고 사랑과 보살핌과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말씀입니다. 아가서 8:6에서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고 술람미 여인이 남자를 향해서 말합니다. 고대에는 도장을 끈에 달아서 목에 걸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와 같이 여자는 남자의 마음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 여인의 말을 들으신 것처럼, 스룹바벨을 향하여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이 누구길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축복하십니까? 스룹바벨은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 바벨론으로 사로잡혀갔다가 사면 받고 죽은 여호야긴 왕의 손자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여호야긴(고니야)의 후손이 다시는 왕위에 앉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신 바 있었습니다(렘 22:24~30).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님이 스룹바벨을 축복하시는 것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예언을 취소하시는 것입니까? 여기서는 단순히 유다 왕국의 왕권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국의 회복과 계승을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루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스룹바벨의 족보를 통해서 오실 것이며 스룹바벨이 세운 성전의 실체로 오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 건축의 사명을 다할 때,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사 당신의 도장 같이 마음에 품으신다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바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은혜인 것입니다.

4. 하나님 영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의 집을 세워라.
우리 시대와 학개 선지자의 시대는 여러 모로 비슷합니다. 학개 선지자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성전이 폐허였고 하나님의 영광을 잃어버렸듯이, 오늘날의 교회는 쇠퇴의 커다란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전세계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금이나 은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꾸미려고 애를 쓰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으로 감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유럽에서는 교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한지 오래고, 미국과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도 너무나 돈과 물질주의 그리고 세속주의의 포로가 되어버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본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은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들이 더 이상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봉사를 그쳤다는 말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어긋나 버렸고, 그 어긋난 우선순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상적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은 그리스도인의 중심에서 밀려난지 오래입니다. 이런 말은 자기 일에 바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뿐입니다. 취업하고 돈을 더 벌고 성공해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피곤하고 지친 삶은 정상적 삶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향이 근본적으로 어긋났으며, 우선순위가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하여 말하지 않은 목사들의 책임도 큽니다. 이것이 학개 선지자의 시대는 우리의 시대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관심사는 자신과 교회가 거룩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거룩함이 정말 중요합니까? 바로 이런 문제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주님은 오늘 지적해주셨습니다. 우리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이 명백한 말씀을 못들은 척 그냥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정직하게 반응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의 집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짓는 집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지을 집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맡기신 일, 사명이 무엇인지 우리는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위해서 감당해야 할 몫이 무엇입니까? 교회는 여러분의 삶의 중심을 차지해야 하고, 여러분은 잃어버린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을 위해 엎드리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인 여러분 자신의 거룩함을 위해서 감당해야 할 일들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수행해 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적당한 핑계를 대면서 미루고 자기 일에 빠른 삶을 살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집에 얼마나 빠르게 반응하면서 섬겨왔습니까? 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학개 선지자의 말씀 앞에 굴복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이 말씀 앞에 굴복하는 복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