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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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개 강해 (2) -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는 오늘의 삶

학개 2:1-9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17-01-15

말씀내용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는 오늘의 삶> 학 2:1~9

1. 두가지 명제
학개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해서 백성들은 16년이나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제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보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면모는 하나님께서는 일을 끝내시는데 모든 관심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의 말씀만 보면 그렇게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하나님은 이기적이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 건축이라는 일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행위 보다 동기의 문제를 다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또 가르쳐줍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무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왜 하는가, 어떤 동기로 하는가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사람 그리고 사람의 마음에 주목하게 합니다.

2.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을 넘어뜨리는 무기: 낙심
A. 낙심은 사단의 주요한 도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또 신앙을 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를 넘어뜨리는 가장 강력한 대적은 낙심입니다. 물론 그 대적, 원수는 마귀입니다만,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을 가장 많이 위협하는 무기가 낙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종들도 거의 넘어질 뻔한 시간들이 있었고, 그 때마다 마귀가 낙심이라는 무기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위대한 사람 엘리야에게도 낙심이 찾아왔고 요나에게도 그랬습니다. 바울 사도 자신도 얼마나 이 낙심이라는 괴물과 싸워야 했는지 그의 서신서의 많은 부분들이 보여줍니다(롬 7:14~24; 갈 5:9; 고후 5:8; 4:1,16). 성전 건축을 재개한 이스라엘 백성도 낙심이라는 장벽에 부딪혔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을 기억하는 노인들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이었기에,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의 규모를 보고는 너무나 보잘것없다고 느꼈습니다(3). 어쩌면 이런 수준 없는 성전을 짓느니 연기하자, 다음에 더 멋지게 짓자는 말들이 나왔을 법 합니다. 여기 ‘보잘 것 없다’는 표현은 직역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nothing)’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16년 전에 성전을 지으려고 성전 기초를 놓을 때, 노인들이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에스라 3). 그들은 솔로몬 성전과 비교할 때 그 터의 규모가 너무 작아서 울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성전 건축에 흥분하여 기뻐했을 때 노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낙심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한지 약 한 달이 지났을 때(7월 21일),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첫번째 말씀이 바로 이 낙심하는 마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이 없지 아니하냐?”라고 물으십니다(3).

B. 낙심의 원인: 그릇된 동기
비록 사탄이 낙심을 자기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한다고 해도 우리 자신이 살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낙심이 우리 심령에 들어와서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낙심하지 않는 이유를 한 가지 밝힙니다. 자기가 받은 사도의 직분, 복음 전하는 자의 직분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얻은 것이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쟁취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의 성과에 따라서 낙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고후 4:1). 대개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맡은 일이나 직분에 따라서 기대하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격이 있었서가 아니라 본래 긍휼하심과 은혜로 받은 직분이니 내가 그만한 성과를 내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자기 행위와 공로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아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원하는 만큼의 성공, 성취, 열매를 얻지 못할 때 낙심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낙심할 것이 아니고 사실은 “주님, 이게 제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매일 매순간 주님이 필요합니다. 은혜가 없으면 저는 이것 밖에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즉, 내가 이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증명하겠다는 그릇된 동기로 가면 낙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명하는데로 가게 되면 이런 낙심이 우리를 지배하는 자리로 가지 않고, 오히려 실패가 더 큰 은혜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의 낙심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어디로부터 낙심이 그들의 삶에 찾아왔습니까? 그릇된 동기가 순수한 동기를 대체하게 될 때였습니다. 바로 동기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동기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처음에 바른 동기로 시작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도 모르게 불순한 동기가 들어오고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3. 부적절한 동기(2:3)
학개 선지자는 솔로몬의 성전과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을 비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시작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 이스라엘의 부적절한 동기를 지적하기 위해서 입니다.

A. 자만심
첫째는 자만심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전 건축이 그들 자신의 우월감이나 자만심 같은 이유들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웅장하고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이 동기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영광, 기쁨, 자만, 해냈다는 성취감을 위한 것과 깊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십니다(사 48:11).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 자신이 편승해보려는 미묘하고도 숨겨진 부적절한 동기들을 순수한 동기와 섞는 것입니다. 에쿠아도르 아우카 족을 위한 선교사로 갔다가 1956년 29세의 나이로 4명의 다른 선교사들과 아우카 족에게 살해를 당했던 짐 엘리엇은 20세쯤에 이런 일기를 썼습니다. “주님, 제 길을 번영케 하옵소서. 제가 저의 높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 삶이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가치를 드러내는 전시물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영광에 편승하려는 의도로 드린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실로 엘리엇은 하나님의 영광을 너무나 순수하게 추구했고, 또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높이셨고 적어도 지난 60여년 동안 그의 삶이 그 일기에 나타난대로 만인의 전시관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일기와 그에 관한 책을 읽는 이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의 가치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질그릇임을 아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질그릇 자체가 아니라 그 질그릇이 담고 있는 보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질그릇이 깨어지면 그 깨어진 틈새로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빛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질그릇은 그로써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존심이 있습니다. 다 자기가 속한 교회가 커지고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유명해지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 그런 것은 우리 자신의 자만심만을 높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젠가는 우리를 낙심으로 인도하게 될 길잡이인 그릇된 동기입니다.

B. 비교의식
자만심과 비교는 어울리는 짝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입니다. 처음 죄가 인류에게 들어왔을 때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을 비교하는데서 죄를 받아들였습니다. 모든 형태의 경쟁심은 죄를 유발합니다. ‘선의의 경쟁’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경쟁은 비교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비교의식은 자만을 향한 싸움에 스스로를 던지게 합니다. 이 싸움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점점 더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인도합니다. 신앙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쟁은 결국 자기를 영화롭게 하여 더 큰 자만심으로 인도하든지 아니면 패배감과 낙심으로 인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 큰 자만심이나 패배감이나 낙심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는 도구들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이 바로 이런 문제들입니다. 지금 당장 문제가 없을지 모릅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했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기회가 되면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낙심의 문제를 하나님은 다루십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접근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잘 하고 있는데 긁어 부스럼이신가 묻고 싶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는 이미 현재의 상태가 장차 어떤 문제를 야기시킬 것인지를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삶에 문제 삼을 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보다 바로 ‘우리들 자신’을 다루고 싶어하시며,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성전 건축이라는 ‘일’보다 ‘우리 자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의 동기, 교회에서 여러분의 섬김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 안의 한 구석에 장차 이 섬김으로부터 야기될 어떤 그릇된 모습들이 잠재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루시는 동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평가 기준은 성취 보다 동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뭔가를 잘 하고 싶어합니다. 좋은 마음입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을 가져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는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동기야 어떻든 열매만 맺으면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비참한 결과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열매를 위해 동기를 희생하지 마십시오. 좋은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서 오히려 바른 동기로 살고 섬겨야 합니다.

4. 바른 동기(2:4~9): “스스로 굳세게 하라”
바른 동기는 어떤 것입니까? 학개 선지자는 낙심한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라고 권면합니다(4). 학개의 권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용기는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그저 ‘잘 될거야’하는 식의 나이브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A. 참된 용기의 근원: 하나님 임재의 약속
참된 용기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옵니다. 학개는 그의 권면의 근거로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합니다(4).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주님의 약속이 있었기에 순종할 수 있었고 성전 건축을 재개할 수 있었습니다(1:13). 성전 건축을 재개한지 약 한 달이 된 지금 다시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 약속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힘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동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시기 때문에 내가 간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내가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기 때문에 이것은 옳고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가 우리의 참된 동기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니까”라고 바꿔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았고 너무나 잘 보여주었습니다(출 33). 하나님께서는 금송아지를 섬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천사를 통해서 약속은 지켜줄테니 네가 데리고 가라. 나는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원한 것이 성공인가, 하나님인가를 테스트하는 순간입니다. 그가 성공을 원한다면 하나님은 그 성공은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하나님 없는 성공은 실패요, 저주며 파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장받고서야 그는 움직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참되고 바른 동기입니다.

B.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이 낙심을 날려버린다.
두번째로 바른 동기와 관련해서 다룰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형태의 낙심을 날려버립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 역사를 내다보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낙심을 극복하게 하는 최고의 요소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믿고 말합니다. 지금 일어나는 최악의 문제들 조차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당신의 광대하고 선하며 거룩한 목적을 이루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이기실 것이라는 확신이며, 이런 확신이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가 그것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형태의 낙심을 물리치게 됩니다. 학개 선지자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표현을 계속 사용합니다. 이것은 거룩한 용사이신 하나님, 왕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 285회 사용되었는데 그중 91회가 포로후기 선지서(학개, 스가랴, 말라기)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 6~9절에서도 5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주권에 대한 신앙이 약화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동기로 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C. 하나님의 약속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약속하신 것을 좀 더 정확하게 상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6~7a). 이것은 세계적인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만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그는 온 세상, 모든 열방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세상 모든 열방으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기에 너무나도 합당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세계가 다 내게 속했다”고 말씀하시며(출 19:5),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사 40:15~17). 하나님의 관심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은 성전의 건축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작은 일’을 통해서 온 세상을 바라보시며 이 ‘작은 일’을 통해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7b). 모든 나라의 보배에 대해서는 몇 가지 가능한 해석이 있지만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 구속론적이고 기독론적으로 가장 합당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결국 모든 나라를 진동하게 하는 분은 모든 나라의 보배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전을 충만하게 채우시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들이 짓는 성전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이 없어서 거의 없는 것(nothing)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재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모형일 뿐입니다. 모든 나라의 보배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존귀함은 결코 금이나 은 같은 고가의 장식물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신만이 성전을 성전 되게 하시며, 이들이 짓고 있는 이 작은 성전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이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8). 금이나 은 같은 것 가지고 하나님의 집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만이 모든 나라의 보배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성전을 영화롭게 하십니다.

5. 성전
이 본문을 살피는 가운데 우리는 성전의 역사에 대해서 조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성막의 디자인을 하나님께서 다 주셨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짓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시대에 그것을 허락하셔서 참으로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그 안의 모든 값진 기구들은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법궤도 이 때 역사 속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포로를 지내고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성전을 짓게 되는데 이것을 스룹바벨의 성전 혹은 제2성전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학개서의 배경입니다. 나중에 헤롯 1세가 로마의 봉신으로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얻게 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민심을 사기 위해 스룹바벨의 성전을 엄청난 규모로 확장 증축하게 됩니다. 주전 20년 경에 공사를 시작했는데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에도 이미 46년을 짓고 있었지만 완공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이 화려한 성전 앞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성전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요 2). 이 헤롯 성전은 결국 증축을 마치지 못했고 주후 70년 로마 장군 디도의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된 후 다시 서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던 순간, 헤롯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마 27:51).”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찢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하는 성소의 그 두꺼운 휘장을 친히 찢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이제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영원하고도 새롭고 산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막는 장막이 걷혀졌습니다. 성전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성전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대제사장이 되셨고 또한 완전한 제물이 되어 영단번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전과 관련한 모든 것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를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게 하는 성전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로마 장군 디도를 통해 완전히 파괴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역사 속에 묻어버리신 것입니다.

6. 결론
참된 성전은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 보다 크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평강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단번에 그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도 요한은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계 21:22~27).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러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하게 하시리라던 말씀을 이렇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결국은 이사야 선지자나 하박국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대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실 것입니다(사 11:9; 합 2:14). 학개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 대로, 그리스도께서 모든 나라를 진동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섬기든지, 그리스도의 철장 아래 짓눌리든지 모든 육체가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그 발 아래 엎드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가 또한 성전입니다(엡 2:19~22). 개별적으로 신자의 몸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고전 3:16; 6:19~20). 금과 은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금과 은으로 장식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시는 ‘작아 보이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눈 앞에 너무나 작아 보이고 보잘것없이 보여서 아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여러분이 섬기는 이 교회가 여러분의 눈에는 보잘 것 없어 보이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서 섬기는 일이 그렇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도전하시는 것은 이 교회의 나중 영광이 지금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것을 보십시오. 우리가 섬기는 이 작은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십시오. 아무도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우리 교회를 기억해주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이름으로 아시고 우리 교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입니다. 주님께서 알아주시는 것 말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교회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볼 수 없다면 세상에 그 누가 교회의 영광을 보고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작아 보이고 심지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장차 오게될 충만한 영광의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나중에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고린도 교인들은 자신들을 음행의 관습으로 더럽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여러분은 성전을 잘 가꾸고 있습니까? 성령님께서 기쁨으로 거하실 성전으로 유지하고 가꾸는 일에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작은 성전을 너무나 사소하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성전을 가꾸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고 은혜를 필요로 하십니까? 여러분의 육신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과,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을 비교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너무나 보잘것없어 보여서 힘이 드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작고 사소해 보이는 일,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 여러분의 영혼을 먹이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는 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수고를 멈추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시는 일을 멈추지 마십시오. 때로는 뭔가 대단한 결과가 내가 기대하는 만큼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서 낙심할 때가 오지만, 모든 자기 중심의 생각과 비교의식을 내버리고, 나를 존귀하게 하시는 보배이신 그리스도를 주목하십시오. 만국의 보배이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기에 내가 존귀한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를 위해서 열심으로 심는 일을 멈추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 열심을 내십시오. 하나님이 하시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니까 해야 하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많아지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눈으로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십시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내일의 그 영광을 사모함으로 오늘의 작고 사소해 보이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수고를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고 약속하신 것을 여러분의 삶에 성취해주시는 그 영광의 날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는 오늘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