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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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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4) - 레위인과 온 이스라엘

민수기 35: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3-22

말씀내용
35장은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모두 레위지파와 관련된 것이지만, 또한 이스라엘 모든 백성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은 단지 레위인만 알면 되는 규례가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듣고 알아야 하는 규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누구 들으라고 주시는 말씀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의미있는 말씀이라는 대전제를 가지고 우리는 이 말씀을 들어야하고, 또 당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자세로 이 규례를 들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35장의 첫번째 이야기는 1~8절입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께서 레위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읍과 목초지에 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레위지파는 자기 기업을 별도로 얻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의 기업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살 집이나 가축을 먹일 목초지도 가지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레위지파도 정상적 가정으로서 살아갈 집이 필요했고, 그들이 가진 가축을 먹일 땅도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가 살 집(성읍)과 목초지를 어떤 방식으로 주실지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이 1~8절입니다.
35장의 두번째 이야기는 우리가 잘 아는 도피성에 대한 자세한 규례입니다(9~34). 도피성은 레위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가운데 6개를 지정하여 도피성으로 삼고,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해주는 제도적 장치였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에게 표적(1~8)
오늘 우리는 첫번째 이야기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방금 말씀한대로, 하나님께서 레위 자손에게 주시지 않는다고 한 것은 그들이 일하여 소득을 얻고 살아가는 터전으로서의 땅이었지, 가옥이 있는 성읍이나 가축을 먹일 목초지를 주시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위지파도 이스라엘의 한 지파로서 상당한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에서, 레위인은 1개월 이상된 남자아이를 포함하여 남자가 총 2만 3천명이었습니다(민 26:62). 대략 남여 비율이 일정하다고 볼 때, 1개월 이상된 레위 사람의 총 인구는 4만 6천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지파에게 이스라엘이 차지한 가나안 전역(트랜스요르단 지역을 포함하여)에서 6개의 도피성을 포함한 48개의 성읍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6). 이 말은 레위지파가 함께 모여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각 형제 지파들로부터 할당받은 48개의 성읍에 흩어져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의 성읍에 약 1000명 미만의 레위인이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흩어져 살면서, 전임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장을 도와 성소와 제사의 일을 도와야 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알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 말씀이 단지 레위인만 들으면 되는 말씀이 아니라고 강조한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지파로부터 48개의 성읍을 떼어 레위지파를 위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기준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의 소유에서 레위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받은 자에게서는 많이 떼어서 주고 적게 받은 자에게서는 적게 떼어 줄 것이라 각기 받은 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인에게 줄지니라(8).” 많이 받은 지파에게서 많이 떼어준다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은 모두가 이것을 공평하다고 말하게 하지 않습니다. 많이 받은 지파는 많이 받은 대로 다 쓰임새가 있기 때문에 자기들의 형제요, 자기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부름받은 레위지파를 위해서 내놓을 성읍이 여의치 않다고 말할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언제나 여유가 있는게 아닙니다.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다 남에게 줄만한 여유가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주십니다. 이 말씀을 지켜야 하는 사람은 사실 레위지파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모든 백성입니다. 본문은 레위지파에 관련된 내용이지만, 이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할 사람들은 모든 백성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레위인은 자신들이 기업으로 얻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수익을 올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편안하게 정착할 수 있는 자기 농경지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들의 기업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으로 그들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점에서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표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순종과 불순종(수 21)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나 이 말씀을 잘 순종했고, 레위지파가 살아갈 성읍을 내놓았을까요? 후일 여호수아의 지도하에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고 자기들의 형제 레위지파를 위해서 각 지파에서 성읍 48개와 거기에 딸린 목초지를 내놓았습니다. 여호수아 21장이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레위지파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관대한 섬김을 통해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 48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합하면 가나안 땅 전체 면적의 0.1%정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지파로서 레위인의 숫자는 다른 지파 못지 않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 지파가 두 지파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열 세번째 지파로서 레위지파는 적어도 7~8%의 면적은 얻어야 공평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지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농사를 짓고 살아야 하는 것과 달리, 레위인을 친히 먹여주시겠다고 하셨고, 그들에게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대표하여 전임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땅이 많이 주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렇지를 않습니다. 레위인은 흩어져 살아야 하는 불편함 외에도, 편안히 정착하여 안정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형편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여러분이 당시의 레위인으로 태어났다면, 여러분은 감사했겠습니까, 아니면 불평을 했겠습니까? 많은 PK, MK 들이 어쩌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경험하면서 자랐을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들이야 자신이 주님을 사랑해서 헌신하여 목사나 선교사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자녀들은 아무리 목사나 선교사의 집안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죄인으로 태어나며 은혜를 받기까지는 이런 고통스러운 나름의 고민과 과정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서는 레위지파 자신의 순종, 레위지파 자신이 자신의 부르심을 영광스럽게 여기고 살아가는 순종이 요구되었습니다. 물론 이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순종한 사람도 있고 불순종하여 불평과 원망을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작할 땅이 없는 레위인들은 형제들의 십일조를 기본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입니다. 48개 성읍과 목초지는 거주할 집을 주는 것이었고, 이제 이스라엘 모든 백성은 그들의 형제인 레위인이 먹고 살도록 소득의 십일조를 나눠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 속에서 십일조를 충성스럽게 했을까요? 적어도 구약 성경이 가르쳐주는 바에 의하면 긍정적인 답변을 주기는 어렵습니다.

불순종이 초래한 슬픈 이야기
이점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초래한 한 슬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사기 17~18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모세의 시대로부터 그리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미가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부잣집 아들인 미가는 어머니의 거금 은전 일 척 백을 훔치고는 어머니가 그 도둑놈을 저주하자 저주가 무서워서 어머니에게 자백하고 훔친 돈을 토해냅니다. 어머니는 감동을 받아 이 돈을 여호와께 다 드린다고 선언하고는 아들을 위해서 은 이백으로 신상을 하나 만들어 줍니다. 미가에게는 신당이 하나 이었는데, 어머니가 만들어준 신상으로 부족해서, 제사장의 옷 에봇을 만들고 우상 드라빔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중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이때 한 레위인이 거주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미가의 집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잖아도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사장 삼은 것이 마음에 찜찜했던 미가는 이 떠돌이 레위인에게 높은 보수를 약속하면서 자기 집안의 개인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부탁합니다. 미가가 약속하는 보수와 조건이 마음에 들었던 레위인은 미가의 요구를 받아들여 미가의 집의 개인 제사장이 됩니다. 돈, 생계에 굴복하여 거룩한 제사장직이 매매되고, 종교장삿군으로 전락한 레위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사사기 18장에서 계속되는 이 슬픈 이야기를 더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문제를 설명하기에 이미 충분합니다. 미가 집안의 제사장이 된 타락한 레위인 같은 존재가 생긴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 개인의 경건을 문제 삼자는게 아닙니다. 거류할 곳이 없어서 떠도는 레위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레위인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48개의 성읍과 목초지를 받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땅은 경작하고 먹고 살 수 있는 땅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를 통해서 레위인은 먹고 살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백성의 십일조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레위인은 자신과 가정의 삶을 정상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떠돌이 레위인들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미가 집안의 제사장이 된 레위인의 이야기는 사사시대에 하나님 앞에서 레위인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 이스라엘 백성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를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은 미가 집안의 제사장이 된 레위인의 신원입니다. 사사기 18:30입니다.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그 떠돌이 레위인은 모세의 아들인 게르솜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모세의 손자였습니다. 단 2세대가 지났을 뿐입니다. 요나단이 모세의 손자니까,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받은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어야 하는게 아니었나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가 모세였든, 아브라함이었든 상관 없습니다. 그들의 형제로서 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레위인의 섬김 때문에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제를 잊었습니다. 그들은 형제보다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레위인들아, 그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지,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희도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지, 우리는 일을 하는데 너희는 어째서 무위로 먹고 살려고 하는가?”
하지만 성경은 레위인에 관한 규례가 이스라엘 백성 모두와 관계되었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지켜야 할 규례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이스라엘의 악순환은 멈출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과 교훈
이제 본문의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을 정리하겠습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다.
첫번째 교훈은 응답되지 않은 기도가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여러분이 과거에 하나님께 드렸던 간구는 다 응답되었습니까? 레위인 가운데는 아마 자신들이 살아야 하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그리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가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하시면, 레위인들 중에는 “오, 주님, 저희도 저들처럼 먹고 살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수입에 따라 집도 늘리고 안락한 것들을 누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기도는 좋은 기도입니까? 우리가 본성을 따라 원하고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특히 우리 신앙이 미숙할 때 우리는 더욱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드렸던 모든 간구에 다 응답해주시던가요? 그리고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모든 간구가 다 응답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오늘날 지금보다 더 괜찮고 더 경건하고 더 예수님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적어도 저에게는 잊어버릴 수 없는, 응답되지 않은 기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욥도, 다윗도, 바울도, 그리고 예수님도 이런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경우에,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는 주님의 첫번째 간구가 응답되었더라면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존재는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리고 미숙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간구했던 기도에 하나님께서 다 응답해주시지 않은 것은 너무나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레위인들에게 바로 이런 감사가 가능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의 표적으로서 살아가라는 부르심, 생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구별된 자로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함으로 살아가라는 부르심, 어쩌면 이것들은 우리 자신이 구하려고 하여도 구할 수 없을 만큼 영광스러운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어리고 미숙한 레위인의 자녀들이 구하였을지도 모르는, “우리도 여느 지파들처럼 평범하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심으로써 특별한 부르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응답되지 않은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감사할 제목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이다. 네 것이 아니다.
두번째 교훈은 우리의 청지기직과 관련된 것입니다. 레위지파를 제외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경작할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기업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들이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그 기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우리는 다 맡은 자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분 앞에서 정산을 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셔서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실히 땅을 일구어 살고, 거기서 얻은 수입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정하신 뜻을 위해서 사용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어느 부분에서는 순종했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불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종은 온전한 순종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타협한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살아가는 청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순종이고 충성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인의 뜻이 중요하고 그 뜻을 따라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이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인생이라는 시간 동안 맡기신 것이며, 여러분은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해야할 책임이 있습니다.

다 지나간다.
세번째 교훈은 세상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충성스럽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여 사는 것이 어려울까요? 그것은 우리가 맡아서 가지고 있는 것이 영원히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되거나 내 행복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전 7:29~31).”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했다는 말이 있지요. “아내 말고는 다 바꿔라.” 이 말에는 아내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역설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그 소중한 아내라 할지라도, 그 존재가 너에게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가지고 누리는 그 무엇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지나갑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본문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모든 것으로 형제를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고, 사랑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레위지파의 부르심과 존재가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지 구약 시대에만 유효한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서신에서 우리에게 반복해서 말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옵션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인에게 위로부터 주어진 새로운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능을 따라, 세상의 본성을 부인하고 형제를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떠돌이 레위인의 이야기는 사사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 참 레위인 예수 그리스도
마지막 교훈입니다. 레위인과 온 이스라엘은 뗄 수 없는 관계로 존재합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에게 표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을 사는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보여주는 현실은, 이스라엘이 실패하자 레위인도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 레위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의 대표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표적이 되셨고 모든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지구상에 살았던 그 어떤 인간 보다 행복을 누리는 삶임을 예수님께서는 보여주셨습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히 12:2).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입니다. 우리의 행복은 결코 땅의 소유에 있지 않고, 물질의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예비하신 그 기업의 영광을 바라보고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