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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1) - 너무 많이 가졌을 때

민수기 32:1-4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2-22

말씀내용
신 하나를 바닥이 떨어질 때까지 신어야 했고, 옷이 해어지기까지 입고 또 하나의 옷을 사 입던 시대에 비하면 오늘 우리 시대는 많은 여분의 것들을 가지고 사는 시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에게 정확하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여분의 것들이 더 이상 여분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사람의 욕망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질문은 “이렇게 해서 인간의 실존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우리는 더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유의 풍부로 더 행복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뜻 밖의 소유로 풍부해질 때
본문의 중심에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모세에게 한 제안이 있습니다. 먼저 1절에서 르우벤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졌더라’고 상황을 설명합니다. 다른 지파들에 비해서 이 두 지파가 소유한 가축 떼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가축 떼와 함께 나왔습니다(출 12:38). 이 두 지파가 가진 심히 많은 가축 떼는 그들의 근면한 수고를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이 풍부한 소유는 사실 뜻밖에 얻은 은혜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최근에 원치 않았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뜻밖의 많은 전리품들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투, 시혼 왕 옥과의 전투(21:21~35), 그리고 미디안과의 전투(31장)로부터 그들은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이들이 소유한 심히 많은 가축 떼의 상당 부분은 뜻밖에 얻게 된 소유물이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본문에서 보아야 하는 것은, 지금 르우벤과 갓 자손이 보는 땅, 그리고 자기들이 이곳에 거주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이 땅이 어떤 땅이냐는 것입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보았습니다(1). 야셀 땅은 시혼 왕을 물리치고 얻은 땅이고(21:32) 길르앗 땅은 요단 동편의 산지입니다. 두 지파가 본 땅은 요단 강 동편, 오늘날 트랜스요르단이라고 불리는 지역입니다. 이 두 지파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나아와 공식적으로 이 땅을 자기들의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은 요단 강 너머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그 땅이 아닙니다.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이 뜻 밖에 얻은 소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모리 왕 시혼이나 바산 왕 옥과 전투를 벌일 의도가 없었습니다. 그 지역을 통과하기만을 바랬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자기 영토를 지나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전투를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얻게 된 땅입니다. 그리고 미디안과의 전투는 하나님께서 바알브올의 음행으로 원수를 갚으시는 심판적 차원의 전투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심히 많은 가축 떼나,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구한 이 영토는 모두 뜻밖의 소유였습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로또가 당첨된 것이나 갑자기 주가가 오르면서 소득이 많아졌거나 생각지 못했던 유산이 주어진 것과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꼭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을 놓고 형제들이 다투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런 일을 겪습니다. 그리고 로또가 당첨된 사람들의 인생을 추적해보면 그들 대댜수가 그 이후 불행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자살을 한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 뜻 밖의 소유가 그리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약속 대(對) 소유(1~5)
1절에서 ‘본즉’이라는 단어는 전체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든 문제가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역은 그들 말대로 소를 먹이기 적합한 ‘목축할 만한 장소’였습니다(1,4).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이 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나아와서 말했습니다(3~5).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 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이들이 요단 동편의 땅을 자기들의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한 근본적인 이유, 동기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본다는 것은 종종 믿음과는 반대되는 용어로 등장합니다. 고린도후서 5:7을 보십시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지금 이 두 지파가 모세에게 이 땅을 자기들에게 달라고 요구한 것은 그들의 눈에 이 땅이 좋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1절에서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를 창세기 3:6에서 보게 되는데, 그 사건은 인류 최초의 범죄 사건이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또 있습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자기 눈에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따른 선택이 아닌 감각적인 선택입니다.
2절부터는 계속해서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라고 순서가 바뀌어 나오는데 아마 이 일에 있어서 장자인 르우벤 자손 보다 갓 자손이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요구의 본질은 이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을지라도 자기들의 눈에 보기 좋은 땅을 요구했다는 데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의 영구한 삶의 거처를 결정함에 있어서, 기준으로 삼은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아니라 보기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성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더 안락한 삶을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과 무관하게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화하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태도의 전형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정당화하려고 했습니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목축할만한 장소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4).” 그러나 이들의 요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기준이 경제적인 이유냐, 아니면 영적 이유 곧 하나님의 말씀이냐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합니다.

그것은 죄다!(6~15)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엄한 책망으로 격하게 반응합니다. 모세의 말은 이들과 이들의 요구가 지닌 죄악성을 지적합니다.
첫째로, 모세는 이들이 가진 ‘안락함에 대한 이기적 욕구’를 지적합니다.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있고자 하느냐”고 묻습니다(6). 자신의 편안함, 안락함에 대해서는 민감하지만 다른 형제들의 불편함, 어려움에 대해서는 둔감한 태도를 지적하는 말입니다. 사람은 없을 때보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자기 자신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데 급급하게 되고, 다른 형제들의 삶의 필요에 대해서는 둔감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없을 때는 몰랐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은 소유가 생겼을 때 이런 성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죄인이 가진 경향성입니다. 모세는 갓과 르우벤 자손에게서 이런 태도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범죄하여 죽은 그들의 조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그들의 죄악성을 지적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이런 죄악성이 종종 드러나곤 합니다. 교회에 재산이 많아졌을 때 분쟁이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자신만 편하려는 이기적 태도가 다른 형제들의 불편함은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을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지적합니다.
두번째로 모세는 이들의 요구가 다른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했다고 지적합니다(7). 이것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온 10명의 지휘관이 보여주었던 태도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을 악평하고 그곳에는 거인 족속들이 살기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했을 때,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기적으로 자기 편함을 추구하는 죄일 뿐 아니라, 다른 형제들을 낙심하게 하는 더 큰 죄입니다.
세번째이자 결정적인 지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원하지 않았고 도리어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기분과 기호를 따라 살아가는 태도는 불신앙입니다.

돌이킴과 약속(16~32)
모세의 모진 지적을 받은 갓과 르우벤 자손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기서 이들이 한 일이 회개였다고 본문이 정확하게 쓰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은 분명히 돌이켰습니다. 이들은 광야에서 죽은 그들의 조상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들이 안전하게 거하도록 성을 쌓은 다음에 장정들이 무장하고 강을 건너 가나안 정복전쟁의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그곳에서 기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전쟁이 마치고 형제 지파들이 기업을 다 받는 날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그 약속을 지켰고(수 4:12) 가나안 정복 전쟁을 마치고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고 돌아왔습니다(수 22).
이들의 수정 제안은 모세와 다른 지파들에게도 좋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엄중하게 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행할 것을 다짐하고 그 조건으로 요단 동편에 그들이 요구한 땅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모세의 경고입니다.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으니 너희 죄가 반드시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23).” 갓과 르우벤 자손은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합니다. 모세가 20절에서 32절까지의 본문에서 7번 ‘여호와 앞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엄중하게 말하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기업(33~42)
33절부터 42절까지에는 요단 동편에서 얻은 기업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 주목할 것은, 지금까지 갓과 르우벤 자손만 언급되었었는데, 33절에서 처음으로 므낫세 반 지파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므낫세 반 지파가 처음에는 갓과 르우벤 자손의 요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협상의 과정에서 이 두 지파와 마음을 같이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적용과 교훈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들을 얻습니다.

뜻 밖의 소유에 대하여
본문은 뜻 밖의 소유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뜻 밖의 소유는 우리의 죄성을 일깨우기 쉽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교회 선배들로부터 훈련 받을 때 배운 것이 기억납니다. “너는 생각지 않은 돈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 선배들은 “하나님께서 왜 이것을 내게 주셨는지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그 가르침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왠 떡이냐?”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표준적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주께서 나를 통해서 누군가를 축복하시려는 뜻이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뜻 밖의 소유는 내가 원래 가진 것이 아니며 가져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우리도 두 지파와 마찬가지로 안락함을 추구하는 이기적 죄성이 일깨워지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뜻 밖의 소유가 반드시 축복도 유익도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죄를 유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이 이야기는 두 지파의 이기적인 죄성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야기의 끝은 아름답습니다. 모세의 책망을 달게 듣고 두 지파는 온 이스라엘 형제들을 낙심시키지 않기 위하여 지혜롭고 자기 희생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반응했습니다. 17~18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고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받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대단한 말입니다.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형제들의 앞에 서서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결국 이 전쟁은 6년이 걸려서 마치게 되었고 그들은 모든 약속을 성실히 지키고 그 후에 여호수아의 축복을 받고 자기들의 기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수 22). 갓과 르우벤 자손의 이기적 요구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와 섭리로써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해주시는 유익한 결과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은 죄를 가볍게 여겨도 된다거나 죄가 유익을 낳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는 말씀은 변함이 없습니다(약 1:15). 죄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지혜의 섭리로써 이런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설명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선택과 결정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따라 선택하고 결정하고 살아갈 소명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우리가 욕심을 따라 행하고 기분이나 기호를 따라 행해도 된다는 허가장이 아닙니다. 결국 갓과 르우벤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편에서 자기들이 보기에 좋았기에 원했던 땅을 얻었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보겠지만, 이들은 요단강 건너에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의 일체성을 유지하고 살기가 쉽지 않았고 이질화에 노출될 위험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가장 먼저 앗수르의 포로로 붙잡혀갔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대상 5:26).” 아브라함의 조카 롯처럼 그들도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대한 댓가를 지불한 셈입니다.
여러분이 삶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여러분의 결정 기준은 경제적인 요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호를 따라 결정합니까, 말씀에 대한 확신으로 결정합니까? 여러분은 땅의 것을 구합니까, 위엣 것을 찾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사람이 큰 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눅 14:16~24). 그런데 하나같이 사양하며 말합니다. “밭을 사서 나가 봐야겠습니다.”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해보러 가야 합니다.” “막 장가들어서 못 갑니다.” 이들은 천국 잔치에 초청을 받지만, 재물을 사랑하거나 기타 사적인 이유로 그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눈 앞의 이익, 눈에 보기 좋은 것, 감각적인 것, 소유와 재물이 여러분의 삶의 이유와 선택의 기준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믿음을 부인함으로써 당장의 고난을 피하지 않은 초대 교회 신자들을 향해서 주는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우리의 구주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써,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기는” 삶을 보여주셨습니다(사 53:11).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당장의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후일에 영원토록 만족하는 선택과 결정을 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권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