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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0) - 기념이 풍성한 인생

민수기 31:1-5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2-15

말씀내용
모세의 마지막 전쟁(1~2)
우리가 여호수아서에서 많이 보게 되는 것과 같은 전쟁 기사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실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마지막 전투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민수기 25장에서 보았던 광야 40년에 가장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한 바알브올의 음행 사건과 관련된 전쟁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다가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협을 느낀 모압 왕 발락은 상당한 비용을 약속하고 신통한 능력을 지닌 무당 발람을 불러왔습니다. 발락이 고용한 저주 전문가 발람은 멀리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저주해야 했습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발람은 하나님의 명백한 말씀을 듣고도 저주를 해보려고 애를 쓰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발락에게 파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발람은 돌아가는 길에, 큰 돈벌이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꾀를 내서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방안을 발락에게 제공하게 됩니다. 발람의 말을 들은 발락은 미디안 여자들을 이용해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숭배와 음행에 참여하도록 부추겼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결국 많은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이 음행과 우상숭배에 참여했고 그 결과, 24,000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가나안을 눈 앞에 두고 벌어진 참혹한 일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7~18).”
그렇게 이스라엘의 광야 1세대에 대한 민수기의 본문은 마치고 26장부터 2세대의 인구조사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26장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잠깐 그 이야기를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알브올 사건을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어버리셔서 심판을 하지 못하시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2).” 이 전쟁은 모세의 마지막 전쟁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치루는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2~3)
우리가 지금 보았듯이, 미디안과의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명령하신 전쟁입니다. 이것은 모세가 결정했거나 백성들이 하자고 한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2절에서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라고 지칭하십니다. 3절에서 모세는 미디안을 ‘여호와의 원수’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는 곧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미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창 12:3).”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입니다. 스바냐 2:8~10에서 모압과 암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읽어보십시오. “내가 모압의 비방과 암몬 자손이 조롱하는 말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비방하고 자기들의 경계에 대하여 교만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장차 모압은 소돔 같으며 암몬 자손은 고모라 같을 것이라 찔레가 나며 소금 구덩이가 되어 영원히 황폐하리니 내 백성의 남은 자들이 그들을 노략하며 나의 남은 백성이 그것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할 것은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백성에 대하여 교만하여졌음이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작은 죄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종류의 죄악에 대해 친히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 17:1~2).” 자기 혼자 범하는 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만드는 죄는 크다는 말씀입니다. 미디안은 아무나가 아니라 하나님을 백성을 넘어지게 했고, 단지 몇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수많은 남자들을 넘어지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바알브올의 사건에 대하여 선언하셨던 것을 시행하겠다고 하십니다. 모압과 미디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보게 되는 미디안과의 전쟁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관점으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원수를 갚으시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심판의 칼로 사용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적 성전(聖戰)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약시대의 특정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행하는 칼이 되도록 허락하셨으나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원수를 갚으시고 심판을 행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차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기능을 정부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의무는 원수를 먹이고 마시게 하는 것입니다(롬 12:19~21).

전쟁의 방식(3~12)
이 전쟁이 성전임을 표시해주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비느하스가 이 전쟁에 참여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제사장들은 시체로 인하여 부정을 입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비느하스가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고 전쟁에 참여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지시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비느하스가 가지고 나간 성소의 기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언약궤 일수도 있고 아니면 제사장의 의복을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성소의 기구와 함께 신호 나팔을 가지고 비느하스가 전쟁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비느하스는 바알브올 사건 때 이스라엘 진영에 함께 들어온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창으로 꿰뚫어 죽이고 하나님의 칭찬을 들은 인물입니다.
전쟁에 나가는 군인들의 숫자는,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인구 60만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숫자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시한 것은, 각 지파에서 일 천명씩 모두 12,000명의 군인입니다(4~5). 어떤 자유주의 학자들은 불과 만 이천명의 군인으로 미디안 전체를 전멸시키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 본문의 역사성을 부인합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사람의 수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삼상 14:6; 17:4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전쟁을 통하여 앞으로 싸울 모든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치를 모든 전쟁은 그들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싸우실 것입니다. 그리고 적은 숫자로도 능히 이길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은 만 이천 명의 군인으로 미디안을 거의 전멸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남자를 다 죽였고 미디안의 왕 5명을 죽였습니다(7~8). 죽은 왕들 중에 수르라는 인물은 비느하스에게 시므리와 함께 죽임을 당한 고스비의 아버지일 것입니다(민 25:15).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주목할만한 인물, 발람도 칼에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칼로 심판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팔아먹은 발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습니다. 죄가 그를 찾아낸 것입니다(민 32:23). 이스라엘 군대는 미디안의 부녀들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고 모든 가축을 탈취하여 전리품으로 가지고 이스라엘이 진을 친 모압평지로 돌아왔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13~24)
백성이 전장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영접할 때, 모세가 갑자기 군대 지휘관들에게 노를 발했습니다(14). 미디안의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깐 성전의 원칙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신 20:13~18). 물론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울 때의 전쟁 원칙입니다. 가나안 밖에 사는 민족들과 전쟁을 하게 되면, 그들 중 성인 남자들만 죽이면 됩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사는 민족들과 전쟁을 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전체를 다 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으로 보면, 미디안과의 전쟁은 좀 애매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에 사는 백성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이스라엘을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이점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뜨린데 가담한 모든 여인들을 죽이고 사내아이들도 죽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이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를 다 죽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17).
이미 이 일에 관여된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죽었습니다(민 25:5,9). 그리고 이제 음행의 상대였던 여자들도 죽여야한다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은 간음에 대해서 사형을 선고합니다(레 20:10; 신 22:22). 미디안은 참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도록 이스라엘을 부추겼으니 이 음행에 가담한 자들은 양편 모두 죽임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따라 이제 미디안 편에서 가담한 여인들을 죽이라고 명합니다.
이것은 예외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겼을 때와 가데스에서 반역을 일으켰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었습니다(출 32:9이하; 민 14:11이하). 두 경우 모두 모세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모면할 수 있었던 경우들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전에 서는 우리는 언제나 거룩을 요구받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19절 이하에서 봅니다. 군인들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막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그들이 시체들과 접촉이 됨으로써 부정함을 입었으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7일 간의 정결의식을 통하여 깨끗해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들이 가지고 온 전리품들도 물이나 불을 통과하여 깨끗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1월에 세 주일에 걸쳐 상고했던 학개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목사나 선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그 행위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놓을 수 없고 놓아서도 안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권면대로, 우리는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히 12:4). 왜 그렇습니까?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못하(히12:14)”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전리품 배분(25~47)
군인들이 가져온 전리품의 규모는 대단했습니다. 양 675,000 마리, 소 72,000 마리, 나귀 61,000 마리, 처녀 32,000 명의 규모입니다(32~35). 하나님께서는 배분의 기준을 주십니다. 먼저 전쟁에 나간 군인들과 백성들이 이 전리품을 반분합니다. 그 다음에는 군인들이 자기들이 차지한 전리품에서 0.2%인 500분지 1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장의 몫으로 삼게 합니다. 백성들은 이보다 열 배인 2%(50분지 1)를 하나님께 바쳐 레위인의 몫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이제 많은 전쟁을 치룰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은혜를 발견하다(48~54)
본문은 하나의 이야기를 더합니다. 군대 지휘관들이 모세에게 나와 말합니다. 전쟁에 나간 군인들을 계수해보니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미디안을 다 죽이는 엄청난 전쟁을 치룬 소수의 군대가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상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승리에 도취했을지도 모를 군대 지휘관들은 여기서 머리칼이 설 만한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느끼면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들이 이끈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 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49~50).” 가축 등의 전리품 외에도 군인들이 직접 챙긴 전리품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자원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따라서 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헌물을 가리켜 자기들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께 속죄하려고 가져’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값, 목숨값이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우리 생명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이 승리를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게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들도 부모 세대와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죽어 엎드러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인 것을 그들은 압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여기까지 왔고 이 전쟁에서도 한 사람의 상함도 없이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나와있는 것입니다. ‘내 생명이 주님의 것’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우리도 생애에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은 내가 하나님께 내 의무를 다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엘르아살은 이들이 드린 헌물 가운데 금을 취하여 회막에 드려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습니다(54). 우리 생애에 이런 은혜가 많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생애에 베풀어 주신 과분한 은혜에 대한 우리의 감사가 하나님 앞에 기념이 되고, 그런 기념이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채울 수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기념들로 우리 모두의 인생을 충만하게 채워주시기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