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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9) - 서원

민수기 30:1-16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2-08

말씀내용
서원에 대한 오해와 오용
오늘 본문은 서원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원은 종종 교회 안에서 부정적 뉘앙스를 가지는 말이 되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태중에서 주의 종으로 바친다고 서원을 해서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나의 서원을 떠올리게 하는 경우입니다. 또 부인이 집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는 바람에, 지키지 않으면 더 큰 어려움을 겪을까봐 두려워 집을 바쳤다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서원으로 사람을 빚쟁이 억누르듯 하셔서 결국 받을 것은 하나도 양보하지 않고 받아내신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많은 사람이 서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머니의 서원 때문에 목사가 되는 것으로는 좀 부족합니다. 어머니의 서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목사로 부르셔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서원 뿐 아니라, 실제로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써 그를 당신의 종으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목사가 되지 않으면 뭐를 해도 망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목사가 되었다면 그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의 값을 매겨서 하나님께 드리는 장치가 이미 율법 안에 제시되어 있었습니다(레 27:1~8). 입다의 서원처럼, 딸을 바쳐야 할 경우에도 사실 이 율법의 규정을 적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부인이 집을 바친다고 해도, 이것은 성경의 원리상 남편과 동의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편이 동의하지 않은 아내의 서원이 부부의 동의를 요하는 사안이라고 판단될 때에는 예외적 사항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서원을 이용해서 받아낼 것을 받아내신다고 보는 것도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오늘 본문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예외적 규정들을 마련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원의 문제는 비단 현대에만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중세 시대에는 수도사의 서원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수도사나 수녀로 서원하고 수도원이나 수녀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서원을 통해서 일반인들이 도달할 수 있는 영적 삶 보다 더 높은 경지의 삶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을 거부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외적 헌신을 참된 경건의 표지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신앙의 가치는 금욕에 있지 않고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고 세상에서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잘 결정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신실하게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의 신앙적 사고를 점검하는데 중요한 본문이 될 것입니다.

민수기 30장의 문맥과 구조
본문에 나오는 서원 규정들을 살피기에 앞서, 왜 이와 같은 규정들이 갑자기 등장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민수기 26장은 두번째 인구조사의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7장부터 30장까지는 이제 새로운 세대가 염두에 두어야 할 어떤 원리들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27장은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28~29장은 예물과 절기에 관한 규정들이고 30장은 서원과 관련하여 특별히 여성들에 관한 예외적 규정들을 상세히 담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게 될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30장의 서원에 관한 내용도 특별히 여성들의 경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27장의 슬로브핫의 딸들 이야기와 36장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유산을 받게 되는 이야기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구조는 대구교차법이라고 불리는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2절이 남자의 서원은 취소할 수 없고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고 9절은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 역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3~5절이 어린 여성의 서원이 아버지에 의해서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이고, 10~12절은 결혼한 부인의 서원은 남편에 의해서 취소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또 6~8절은 미혼 여성이 결혼 전에 서원한 것을 그녀의 약혼남이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이고, 13~15절은 부인의 서원은 남편이 취소할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서 취소하려면 남편이 아내의 죄를 담당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16절은 결론적 요약입니다.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서원의 일반적 원리(2)
서원의 일반적 원리는 2절에 명시된 대로,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대개 위급한 때에 행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시면 제가 이렇게 하겠습니다”하는 형식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해결이 되면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서원에서 중요한 요소는 지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야곱의 서원(창 28:20~22), 한나의 서원(삼상 1), 그리고 입다의 서원(삿 11) 등 잘 알려진 서원들이 있습니다.
본문이 3절 이하부터 여성들의 서원의 경우들이 어떤 예외적 조건들을 가지는지를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2절의 일반적 원리는 남자들에게 해당하는 경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원의 일반적 원리는 신명기 23:21~23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그리고 전도서에서도 말씀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전 5:2,4~5).”
왜 하나님께서 서원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실까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자신들의 삶에서 드러내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믿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약속은 사람 편에서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롬 10:17). 발람의 말을 기억하시지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언어생활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서원 규정은 단순히 서원을 지켜야 한다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모든 말을 신중하게 할 것과, 일단 한 말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믿을만 해야 합니다.
2절에는 서원과 서약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거의 비슷하지만 의미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서원(vows)은 보다 일반적 형태로, 어떤 것을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하는 적극적 의미로 사용되는 반면, 서약(pledges)은 자기 자신에게 부과하는 어떤 절제나 금욕적 헌신을 나타내는 바, ‘이것을 끊겠습니다’하는 식의 부정적 의미의 약속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두 단어는 종종 같은 뜻으로 혼용되기도 합니다.
서원의 일반 원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만, 예외적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몇 가지 경우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습니다.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외적 규정들(3~15)
부모의 권위 아래 있는 딸의 서원(3~5)
3절에서는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유대인의 관습상 거의 11~12세의 여아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대개 틴에이저의 나이에 결혼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아들의 경우에 자신이 서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가 그 내용을 듣고 아무 말이 없으면 그것을 재가한다는 뜻이지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여아의 서원이 성립된 것으로 보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결혼 전에 한 서원(6~8)
두번째 예외 규정은 미혼 여성이 결혼 전에 한 서약을 가지고 결혼을 하는 경우입니다. 6절에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결심한 서약을 경솔하게 그의 입술로 말하였으면”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뜻이 모호합니다. 이 구절은 “서원한 일이나 함부로 자제하기로 서약한 일이 있는 여자가 결혼을 하게 될 때에”라는 의미입니다. 즉 결혼 전의 여자가 서원을 했는데, 그것이 아버지에 의해서 승인되었으나 아직 실행되지는 않은 내용이라면, 이제 그 서원을 가지고 결혼을 하게 될 때, 그 서원의 내용을 받을 것인가, 받지 않을 것인가는 결혼할 남편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과부나 이혼 당한 여자의 서원(9)
세번째 케이스는 예외 규정은 아닙니다. 과부나 이혼 당한 여인이 한 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2절의 일반 원리와 동일합니다. 이것은 혼자 사는 성인 여인의 독립성을 인정하는 규례입니다. 이들은 더 이상 부모의 권위 아래 있지 않고 스스로 책임을 지는 존재입니다. 물론 제사장의 딸이 이혼을 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그들은 제사장이 먹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었지만(레 22:13), 이 경우는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아버지에게 의존하는 것입니다. 서원의 경우는 생존의 문제가 아니기에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결혼한 여자의 서원(10~15)
끝으로 결혼한 여자의 서원의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아버지의 권위 아래 있던 여아가 서원을 한 경우에 아버지가 그 서원을 취소하거나 승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남편이 그 동일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서원의 내용을 들을 때 의사표명을 하지 않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 그것을 무효하게 하려고 하면, 그 남편은 서원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한 아내의 죄를 자기가 담당해야 합니다(15).

왜 여자들인가?
이 내용에는 성차별적 요소들이 가득해 보입니다. 왜 여자들만 가지고 이러는가 하는 질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왜 여성의 서원이나 서약에만 아버지나 남편의 승인을 요구하는 규정이 있는가? 왜 남자 아이들의 서원이나 남편들의 서원은 다루지 않는가? 그들은 처음부터 독립적 개체로 인정하고 여자들은 남자들의 부속물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러나 고대 근동의 법규들이 거의 이런 문화적 반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를 넘어, 성경이 이런 형식을 통해서 훨씬 큰 구속사적 의미를 전달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서원의 경우에는 가정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입니다. 음식이나 부부관계나 기타 어떤 것들로부터 자신을 절제하기로 서약을 하는 경우에, 이것들은 모두 관계적인 차원에서 가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무엇을 헌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 경우에도 경제적 측면에서 가정에 미치는 영향이 있습니다. 전적으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서원은 가정이나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아버지나 남편의 승인 여부를 조건으로 제시한 것은 일종의 안전장치입니다. 서원이 가정과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는 일반 원리에서는 남편이나 아들 등 남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이 서원이나 서약을 언급하는 경우들을 보지요.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전 7:4~5).” 신약성경은 이 점에서 동등하게 부부의 권리를 인정합니다. 절제와 관련된 금욕적 성격의 서원을 하려고 하면, 결혼한 사람은 언제나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 아닙니다.
자, 그러면 이런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로 보이는 이 본문이 그저 구약시대에 속한 시대적 요소일까요?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신약성경의 몇 구절을 읽어본다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5:24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3:1,5~6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신약성경도 동일한 원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거나 남편이 아내보다 우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질서의 문제입니다. 남편과 아버지는 가정에 있어서 언약의 머리(대표)라는 점에서 이 말씀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의 구속사적 이해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하나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의 간통 문제를 다루는 민수기 5장에서 결혼한 여자의 간통 만을 다룬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11~31). 이런 접근들을 단순히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로만 보는 것은 제한된 이해입니다. 우리는 본문이 그런 문화와 유관하다는 점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이런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 성경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실하신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음행하는 이스라엘와 맺는 관계를 설명하는 차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아버지나 남편이 딸이나 아내의 서원에 대해서 가지는 권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경솔함, 우리의 과장하고 우쭐대는 성격, 그리고 우리의 변덕스러움은 인생에서 크나큰 많은 말의 실수들을 유발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서원이나 약속을 온전하고 신실하게 이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는 서원한 것을 지키는 우리의 능력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하나님이 맺으신 구속 언약 속에서 우리를 택정하신 일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지와 이성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택정하심(엡 1:4)과 계획 그리고 허락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붙드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의 모든 넘어짐과 실족 그리고 범죄는 우리의 구원을 위협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남편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깨뜨린 서원에 대한 댓가를 친히 감당하시고(15) 그 서원을 대신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런 성차별적으로 보이는 본문의 문화적 한계를 넘어서 성경은 이런 구속의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다 아버지 하나님과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주권과 허락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은 매일 넘어지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민수기 30장은 부인이나 어린 여아들이 경솔하게 서원을 해도 된다는 허가장이 아닙니다. 이 본문은 경솔하고 어리석음의 모든 곤경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남편이신 그리스도를 신뢰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서 만족과 평안과 위로를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안전합니까? 창세 전에 택정함을 입은 성도들은 얼마나 복된 존재들입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와 결혼한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이 무한한 사랑을 인하여 성 삼위 하나님께 찬송과 경배를 올려 드리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