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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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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8) - 예배 원리

민수기 28:1-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1-25

말씀내용
우리는 이미 두 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안식일과 절기들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과 월삭과 각종 절기들을 주신 의도를 우리는 기억의 장치, 가르침의 장치, 그리고 교제의 장치, 세 가지로 살펴본 바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번 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추가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예배의 방식과 원리에 관심이 있으신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과연 이와 유사한 예배의 규정이나 원리가 존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민수기 28~29장에 기록된 안식일과 절기들을 구약의 백성들이 지켰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키지는 않습니다. 의식법으로서 그 규정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고, 구약 율법의 그 규정들이 그림자였다면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배의 방법에 관심이 있으신가?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가 드리는 에배의 방법과 원리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칼빈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으로 분명하게 인정되지 않는 그 어떤 예배의 형식도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성경에 명시되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으로도 경배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칼빈의 논지는 장로교회가 표준문서로 채택하여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기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등이 견지하고 있는 예배의 원리를 통해서도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만일 이 입장이 옳다면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도 그 방식과 원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실 뿐 아니라, 그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3주째 상고하고 있는 민수기 28~29장의 본문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가르쳐주는 바도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방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8:1~2을 다시 보지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내 헌물, 내 음식인 화제물 내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바칠지니라.” 무조건 아무 때나 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 제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기 즉 때를 결정하여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모든 말씀은 그 정한 시기에 어떤 방식과 원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들인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배의 방법과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에 명기된 너무나 많은 내용들이 바로 예배의 규정과 원리들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구약의 규정들이 여전히 율법적 효력을 가지고 있어서 성도들이 문자적으로 따라야 하는 규정들은 아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과 원리에 관심이 있으신가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 입니다.


규정적(Regulative) 원리와 규범적(Normative) 원리
그렇다면, 예배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 하는 예배의 형식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취향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제에 대해서 500년 전의 종교개혁자들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특별히 중세 시대에 로마카톨릭교회가 만들어놓은 예배는 종교개혁자들의 눈으로 볼 때 타락한 예배였기에, 그들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 원리를 따라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참된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점에서 종교개혁의 두 영웅인 칼빈과 루터는 견해를 달리 했습니다. 칼빈은 성경이 예배에 대해서 하라고 명한 것들만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예배의 규정적(Regulative) 원리라고 부릅니다. 루터는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이 금하고 있지 않은 것을 예배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규범적(Normative) 원리라고 부릅니다. 과연 이 두 영웅의 입장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성경적인 입장일까요? 루터의 규범적 원리는 문화적 상황화를 포함하여 많은 자유를 허용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마는, 때로는 너무 많은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이교적인 혼합주의로 흘러갈 위험이 있습니다. 또 이 원리는 하나님 보다 우리의 즐거움과 만족을 예배의 척도를 삼을 수 있는 위험, 그리고 성경에 언급된 예배의 요소들 보다 언급되지 않은 요소들을 더 많이 사용할 위험도 있습니다. 자유가 많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위험도 높습니다. 반면, 칼빈이 주장했던 규정적 원리는 예배의 방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실 뿐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성경을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비성경적인 이교적 요소들이 예배에 들어오는 것을 예방합니다. 규정적 원리에 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적절한 방법은 그분 자신으로 말미암아 제정되고 그분 자신의 계시하신 뜻에 따라 제한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단의 암시를 따라 예배 받으시지 않으시고, 어떤 보이는 표현물이나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어떤 다른 방식을 따라 예배 받지 않으신다.” 우리가 규정적 원리를 극단적으로 적용하게 될 때, 율법주의적 혹은 위선적 양상으로 갈 위험이 여기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율법에 명한 제사의 방법과 원리들에 비추어 볼 때, 루터의 입장 보다는 더 성경에 가깝다고 볼 이유가 있습니다. 가령, 민수기 28~29장에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제사의 원리들은 여기에 명한대로 하라는 것이지, 명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알아서 하라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는 칼빈의 이 입장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명령된 것 이외에 그 어떤 것도 공적인 예배에 필수적인 것으로 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는데, 이 예배의 원리를 잘 표현해주는 문구가 있습니다. “성경을 노래하라. 성경으로 기도하라. 성경을 읽어라. 성경을 선포하라.”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예배의 시종을 결정해야 하고, 그 내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릴 때 모든 순서는 하나 하나 신학적 의미가 풍성하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은 충분히 인지하고 계십니까? 충분하지는 않으나 전에 예배의 주제를 한 번의 설교를 통해서 전반적으로 다룬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 그 순서들의 의미를 하나씩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그 순서들의 성경적, 신학적 의미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시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은 훨씬 더 풍성한 의미 속에서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이 실종된 오늘날, 이런 중요한 신학적 원리는 사라지고 현대인의 취향과 실용적 필요가 예배의 형식과 원리를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배의 방법과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례들
보충적으로 하나님께서 예배의 방법과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성경에서 몇 가지 생각해 보는 것도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이해하는데 유익할 것입니다.
제일 먼저 창세기 4장에서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예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고 오직 아벨과 그의 예배만 받으셨습니다(창 4:3~5). 가인은 예배의 방법과 제물의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물론 그의 동기와 태도에 있어서도 문제를 드러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예배를 거절하셨습니다.
출애굽기는 시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섬긴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의 행위이기도 했지만, 잘못된 예배의 방법을 보여주는 전형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예배하도록) 하시려고 애굽에서 불러내셨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2,18; 4:23; 5:1). 예배는 구속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것을 가리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하며 경배하였습니다(출 32:4~5).
시내 광야에서 성막이 완성되고 제사장들이 세움을 받게 되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는 보다 구체적인 형식으로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대제사장 아론의 장자와 차자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가지고 예배하다가 성막에서 함께 즉사하는 참극을 겪게 됩니다(레 10). 이 사건도, 구약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가 자리를 잡아야 하는 시점에서 발생한 사건으로서, 예배의 방법과 원리가 하나님께 중요하다는 것을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주는 교훈적 사건이 됩니다.
다음으로는 웃사의 죽음 사건입니다(삼하 6). 왕위에 오른 다윗은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올 계획을 세우고 성대하게 의식을 거행합니다.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싣고 앞과 뒤에서 아효와 웃사가 끌고 밀면서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소가 뛰면서 언약궤가 넘어지려 하자, 뒤에서 밀던 웃사가 언약궤에 손을 대서 잡게 되는데, 그 순간 웃사가 즉사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 사건은 즐겁고 성대한 축제의 분위기를 망쳐놓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는 짐승이나 수레가 아니라 레위 지파 고핫 자손이 언약궤의 양 옆으로 길게 꿰어진 채를 잡고 운반해야 한다는 규정이었습니다. 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실은 것이나,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사례만 더 언급하면, 남과 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분열되고 나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예루살렘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지 않을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자기 영토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 없는 두 곳, 단과 벧엘을 성소로 삼아 제단을 쌓고 금송아지를 세우고 백성들로 하여금 거기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했습니다. 그가 한 일은 정확히 광야에서 조상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한 일과 일치합니다(왕상 12:28). 이것은 두고 두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든 왕과 백성의 타락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예배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는 교훈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사례들은 하나님께서 예배의 방법과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중요하게 여기실 뿐 아니라, 예배의 형식과 원리까지도 구체적으로 지시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날 신앙 생활을 하는 가운데 그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예배와 관련해서 가지는 생각은 언제나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너무나 많은 교회와 교인들은 자기의 취향을 따라서 주관적인 기준에 의해서 예배의 요소들을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성경에서 벗어났고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먼 헛된 예배입니다.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예배는 결코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만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충만한 예배는 인간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이 말은, 오직 자기의 기쁨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명제와도 맥을 같이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규정적 원리를 따라서 예배를 드린다고 전제한다면, 쉽게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방식을 따라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면,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삶의 중심축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여러분께 세 가지 삶의 중심축을 제시했습니다.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 교회 중심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배 없는 하나님 중심의 삶은 불가능합니다. 예배 없는 말씀 중심의 삶은 지식만 무성한 바리새인을 만들 것입니다. 예배 없는 교회 중심의 삶은 교회를 사교모임을 전락시키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배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구약의 안식일 전통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신약 교회에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의미로 전환하면서 안식일에서 주일로 옮겨졌고 그날에 주의 백성들은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주일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제가 던진 두 개의 질문은 우리 인생을 결정한다고 말해야 할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배와 주일은 여러분의 인생의 우선순위가 되기에 합당한 두 요소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하기 위함이었듯이, 우리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고”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엡 1:6~7).
다시 한 번, 우리는 민수기 28장과 29장에 있는 율법의 절기와 제사 규정들을 통해서 우리 삶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예배가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우선순위를 더 이상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정한 바가 아니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평생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 중심이며 가장 큰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우리가 예배한 하나님을 친히 뵈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도 우리는 사도 요한이 영광을 입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고 그 앞에 죽은 자와 같이 엎드러져서 경배했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의 영광스러운 예배를 바라보고 소망하면서, 우리는 매주일의 예배를 우리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날로 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