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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5) - 새로운 지도자

민수기 27:12-2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2-28

말씀내용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제거되어야 할 남은 장애물은 단 하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신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려치면서 백성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드러냄으로써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선언을 들은 바 있습니다(20:2~13).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지적하셨는데 하나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0:12). 이것들은 죄의 본질을 보여주는 두 가지 특성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여기에는 자기 의로움을 드러내려는 동기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본문은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12~14). 모세는 아바림 산맥의 느보 산에 올라 거기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로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 마지막 장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참 목자를 만들어가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 (15~17)
모세는 이런 자신의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고를 확증받으면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놀랍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주시기를 간구했었다는 것을 압니다. 신명기 3:23 이하를 보지요.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셨사오니 천지간에 어떤 신이 능히 주께서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 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신 3:23~25).” 모세의 이 기도를 하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 3:26~27).” 모세의 기도가 거절되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확정된 뜻을 받아들입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 위에 관철시키는게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것을 모세의 태도가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세의 또 다른 기도를 만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죽음을 선언하시자 모세는 기도합니다. 이것은 들여보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그가 구한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15~17).” 여러분은 모세의 이 기도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모세는 이 기도로써 그가 이스라엘의 참 목자임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참 목자의 모습을 여기서 발견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지난 40년 간 인도해왔던 이 백성을 위해서 모세가 간구했던 것은 새로운 지도자를 세워 자신을 대신하게 하사 이 백성이 목자 없는 양 같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본문은 단순히 모세가 훌륭한 목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이 자리까지 오도록 하나님께서 모세의 목자가 되어주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40년 간 이 백성을 인도하면서 속이 썩어 들어갔을 모세는 참으로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면서 자신을 대신할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간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모세를 세우셨고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백성을 통해서 모세를 만드셨고 빚어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위해서 우리를 희생시키시고 우리를 이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 또한 당신의 사람을 빚어가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 속에 그 누구도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일은 언제나 나를 성화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백성의 안위를 구합니다. 이제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소망을 가집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소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목사인 저도 여러분을 통해서, 목회라는 버거운 소명을 감당함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갈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런 목사와 함께 벧샬롬의 회중들 또한 성장과 성숙의 여정을 걸어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40년의 세월 동안 모세를 이런 참 목자의 자리로 인도하셨고 그를 빚어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이것은 여든 살을 먹은 미디안 광야의 한 목자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과분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명(18~21)
모세가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지명하여 세우라고 명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18).” 지도자를 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세워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이 사람이 가장 적합하다고 하나님께 추천하지 않았습니다.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세우시는 이유를 단 한 가지 언급합니다.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모세의 수종자로서 여호수아가 능력을 검증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또 여호수아가 아말렉과 싸울 때 백성의 장수로서 나가 잘 싸웠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데스에서 가나안 땅의 정탐꾼으로 보냄을 받아 갈렙과 함께 믿음으로 용기있게 반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급하시지 않은 면모들로 여호수아를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가 입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성실하게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의 영이 머무는 자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외적으로 대단한 업적과 성취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것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사람은 한 때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멋지게 반응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 사람이 참된 믿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임을 완벽하게 입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속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로운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여호수아에게서 보신 결정적인 것은 ‘그 안에 영이 머문다’는 내적이고 영적인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중심을 보셨고, 이것은 실패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모세에게만 은밀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19~20).” 제사장 앞에, 그리고 백성 앞에 세우라고 하십니다. 백성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지도자직을 위탁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주셨던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고 하십니다. 존귀는 다른 말로는 권위, 아름다움, 영광, 탁월함, 영예, 위엄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모세가 본래 가졌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시고 그에게 주신 것들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주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안수는 이런 일을 행하는 상징적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존귀를 그에게 돌리라고 하시는 이유는 백성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였던 것과 같이 여호수아에게도 복종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고 배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고 세우셔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셨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제 여호수아를 백성의 지도자로 세우신다는 것을 공적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순종(22~23)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은혜를 구했던 모세의 기도는 거절되었지만, 백성을 위해서 지도자를 달라고 구한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에게 안수하여 자기에게 주셨던 존귀를 위탁합니다(22~23). 이제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지도자를 얻게 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교훈과 적용
지도자의 문제는 오늘날 모든 사회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지도자를 잘못 세운 일로 온통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수없이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지도자의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솔직하게 이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당신의 백성을 위해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시는가?”
저는 우리 시대의 너무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이 질문에 자조 섞인 의문을 표시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충분하고도 남는 우리의 쓰디쓴 경험에서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런 우리의 반응은 우리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자조 섞인 태도는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시는 일을 신실하게 행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반증하기 보다는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 새로운 지도자를 친히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위해서 그렇게 행하실까요? 여러분은 그렇게 믿고 계십니까? 물론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믿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교회의 실상은 슬프게도 우리의 불신을 보여준다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참으로 교회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공급하여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자기 뜻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 자기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공동체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지도자를 주신다고 믿는다면, 그들은 모세가 했던 방식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기도하면서 자신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모세는 여호수아가 대를 이을 지도자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의 생각과 뜻을 아뢰지 않습니다. 그는 그냥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 청빙 과정을 보십시오. 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는 조건을 결정합니다. 이 조건은 거의 외적 조건들입니다. 그리고 조건이 결정되면 교계 신문에 광고를 냅니다. 그리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들어오는대로 자신들의 기준으로 심사를 하여 소수의 인원을 추려냅니다. 이 과정에서는 더 나은 스펙 혹은 누가 아는 사람이냐 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추려낸 소수의 후보들에게 연락하여 와서 설교를 하고 면접을 보라고 날짜를 정해줍니다. 그리고 투표나 기타 방식으로 최종 선발을 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청빙이 아니라 고용이고 고빙이며, 교회의 타락을 보여주는 한 단면입니다.
여기에는 본문에서 모세가 보여주는 어떤 비슷한 과정이나 특징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교회에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이런 방식을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온 교회가 엎드려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위임 받은 당회나 위원회는 다시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목양할 지도자의 영적 조건들을 성경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합한 자를 두루 찾는 과정이 이어질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그들은 모세의 마음으로 기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에 합한 분을 찾았다면, 온 교회는 다시 기도하는 가운데 그분을 청빙할 것이고, 청빙 받은 분은 주의 뜻을 물어 가부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도자를 공급해주신다는 것을 믿을 때 행해지는 바른 방식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는다면, 일반 회사에서 사원을 뽑는 방식으로 목회자를 고용하는 천박한 방식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교회는 자신들이 청빙한 목회자를 통해서 목양을 받을 수 있게 되고, 그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아름다운 본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모세와는 다른 지도자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순종은 오늘날 교회가 잃어버린 치명적 결함입니다. 목사들의 비행과 이기적 성향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존귀를 스스로 다 무너뜨리고 말았고, 비성경적 청빙의 과정도 여기에 일조를 했다고 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 새로운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신명기 34:9도 이것을 강조합니다.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영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 실제로 백성들은 새로운 지도자에게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백성들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모세와 비교할 때 여호수아는 현저하게 부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하던 사람입니다(출 33:11). 모세는 지면에서 그와 같이 온유한 사람이 없다고 말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민 12:3). 모세는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았고 무엇이든 하나님께 직접 물어서 대답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권위를 부여받았다기 보다 모세에게 주셨던 권위(존귀)를 모세로부터 물려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직접 묻기보다는 대제사장에게 주어졌던 우림과 둠밈을 통해서 하나님께 여쭙고 답을 얻어야 하는 지도자였습니다(21). 백성들이 볼 때 이것은 매우 현저한 차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여호수아에게 순종했다는 것은 그들이 실제로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유리방황하지 않도록 세우신 지도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그들로 하여금 이 부족한 지도자에게 순종하게 했습니다.
여기서 제가 하나 현상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한 가지는, 우리가 지도자를 비교하는 기준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존경하는 은퇴하는 연로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후임자로 모셔야 할 지도자는 40대이거나 그 전후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기준에서 보더라도 두 목회자의 비교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많은 세월 목회하면서 성숙해진 목회자와 젊은 목회자를 비교하는 것은 온당한 비교가 아닙니다. 이런 문제도 실제로 우리의 순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모습과 비교해보십시오. 우리는 처음부터 잘못되었고, 과정에서도 잘못되었으며, 결과에서도 비참함을 많이 겪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목자 없는 양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자기 백성을 위하여 지도자를 공급해주십니다.

양의 큰 목자 그리스도(히 13:20~21)
그러나 이 본문 속으로 우리는 조금 더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여호수아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 속에서 거듭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가리키는 지도자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0~21).”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완전하고 안전하게 인도하시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성취하시는 우리의 참 목자이십니다. 인간 역사에 하나님께서 세운 모든 목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부족함과 결함이 많은 사람들을 불러 세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지도자들에게 순종을 보일 수 있다면, 그것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김없이 우리 모두를 인도하고 계심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칼빈이 기독교강요에 쓴 말씀을 인용하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겸손을 실천하고 훈련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이 된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을 통해서 ? 때로는 우리보다 비천한 사람들을 통해서까지도 ? 주의 말씀이 전해진다 할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그 말씀을 순종하는 일에 익숙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신다면, 그 거룩한 말씀들을 모든 사람들의 귀와 마음이 지체하지 않고 귀하게 받게 된다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처럼 크나큰 위엄을 몸소 대하고서 놀라서 쓰러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토록 한량없는 영광스러운 광채 앞에서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름없는 연약한 사람이 티끌 중에서 일어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을 전할 때에, 그 사람이 우리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순전하게 받는다면, 바로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경건과 순종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그의 하늘의 지혜의 보화를 연약한 질그릇 속에 감추어 두셨고(고후 4:7), 그리하여 그것을 얼마나 높이 기려야 하는지를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다.”(강요 3.3.1).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며 부족하고 결함많은 사람을 세워 하나님의 기이하고 놀라운 역사를 보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