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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3) - 발람3

민수기 25:1-18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2-07

말씀내용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알브올 배교사건은 출애굽 1세대의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용입니다. 26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 백성은 제2차로 인구조사를 함으로써 출애굽 2세대의 이야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22~24장에서 발람의 이야기를 살펴봤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저주의 신통력을 가진 무당 점쟁이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그 모든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복을 받은 백성을(22:12) 결코 발람과 같은 무당이 저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모든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르는 가운데 벌어진 일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모세에게 알게 하사 기록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도 모르는 가운데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속에서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앞의 장들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과 운명은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문도 그것을 잘 표현했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자, 이제 우리는 본문에서 모압/미디안 백성과 이스라엘의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앞에서는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아무 접촉도 없이, 이 산과 저 산에서 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바라보면서 저주를 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이라면, 이제는 이들 사이에 접촉이 일어난 것입니다.

금송아지(출 32)와 바알브올(민 25)
이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집단적으로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배교 사건입니다(출 32). 이 사건이 오늘 본문이 기록한 바알브올의 사건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까? 금송아지 사건은 출애굽 초기에 벌어진 사건이라면, 바알브올의 음행은 출애굽 막바지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본문 1절에서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는데, 싯딤은 요단 강 건너로 여리고가 보이는 곳으로 모압 평지에 있던 곳이었으니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 강을 건너기만 하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건으로 진노하셨고, 즉각적인 처형을 시행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첫번째 사건에서는 레위인들이 나서서 자기들의 형제, 친구, 이웃들을 3000명이나 살륙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었습니다(출 32:26~28). 그리고 바알브올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수령들을 잡아 매달라고 하셨으나 이 일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고 결국 비느하스의 열심으로 시므리와 고스비의 죽음으로 매듭이 지어졌습니다. 이 두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헌신하여 우상숭배한 백성들의 처형을 집행한 레위인들을 거룩한 직무를 위하여 구별하셨습니다(출 32:29). 그리고 바알브올 사건에서는 처형을 담당한 비느하스에게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의 직무를 허락하신 것이 유사합니다(13).
둘 다 우상숭배의 사건이었고,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이 두 사건을 출애굽의 여정 초기와 마지막에 기록하심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언약 백성에게 있어서 우상숭배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를 특별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브올 사건이 앞의 발람 사건들이 기록된 22~24장과 비교해서, 성적 부도덕인 음행과 우상숭배의 죄였다는 사실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사건의 발생(1~5)
먼저 이 사건의 개요를 개관해보겠습니다. 이 사건은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면서 불거졌습니다(1). 이 음행은 이들 사이에 접촉이 일어나면서 발생한 일입니다. 발락의 사주를 받은 발람이 이 산과 저 산에서 이스라엘을 보면서 저주를 하려고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하심으로 전적인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 개입되지 않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건에서는 이스라엘이 개입됩니다.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모압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사로잡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 둘씩 그리고 집단적으로 그들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하는 관점은 이것이 단지 몇몇 개인들의 범죄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집단적 범죄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 ‘백성이’라고 한 것은 의도적입니다.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아닙니다. 음행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 여인들은 자기들과 사귀는 이스라엘 남자들을 브올 산에서 열리는 자기들의 희생제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그들과 함께 바알 제사의 음식을 먹고 그 신들에게 절했습니다(2). 이것을 본문은 ‘바알브올에게 가담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바알브올은 ‘브올(산당)에서 섬기는 바알’을 뜻합니다.
성적 음행은 성적인 범죄로 끝나지 않았고 그렇게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배교로 이어졌습니다. 육적 음행은 그들의 남편인 하나님을 버린 영적 간음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6절 이하에 나오는 시므리와 고스비의 사건은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진노하셨습니다(3). 이 진노는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중요한 개념, 하나님의 질투로 시작되는 진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남편으로서 정당한 질투를 진노로써 표현하십니다.

숨는 모세(4~5)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백성의 모든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항하여 하나님 앞에 매어달라고 명하십니다(4). 이 명령은 이 죄악의 심각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모든 수령’을 처형하라는 것일까요? 개역개정역은 ‘모든’ 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있지만, 하나님께 지시하신 명령은 분명히 ‘모든 수령’을 다 목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명령은 이 사건이 개인의 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죄라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모두 자기 죄로 인하여 심판을 받게 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신 24:16). 백성의 지도자들은 결코 지도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심판을 받고 죽는 일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볼 때 합당한 해석입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을 본보기로 처형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풀려고 하셨습니다(4).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여기서 벌어집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축소 왜곡해서 재판관들에게 지시하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입니다. 5절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자, 모세가 제대로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옮겼습니까? 아닙니다. 잘 보십시오. 모세는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축소하고 왜곡한 것입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대로’ 했던 모세가 왜 이렇게 했을까요? ‘모든 수령’은 모세에게 있어서는 동료들이었고, 내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사람을 다 죽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만’ 죽일 것을 재판관들에게 명했을 것입니다. 학자들 중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서 재판관들에게 전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것은 고든 웬함(Gordon Wenham)의 해석이 더 타당해 보입니다.
이어지는 내용도 이 해석이 옳음을 지지해주는 듯 합니다. 본문은 그 어디에서도 모세나 재판관들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그것이 모든 수령을 다 죽이라는 것이었거나 혹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거나 간에 그 일을 수행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 대한 처형도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세나 재판관들이 아무도 그것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명령 불이행입니다. 무엇을 저지르는 차원의 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불이행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시는 것을 주저한 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모세는 이 이야기 속에서 숨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자리를 대신해서 등장한 인물이 비느하스입니다. 사실상 이 바알브올 사건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주인공은 아론의 손자이고 당시 대제사장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인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6절 이하에 모세는 그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자(聽者)로만 등장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문제를 더 확산시켰다.
자, 모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때,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문제는 그렇게 조용하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 커졌습니다.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가 축소하여 재판관들에게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온 자신이거나 혹은 그들의 형제, 친구, 이웃들이 처형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울고 있는 백성들 사이로 미디안 여인 하나를 끼고 들어오는 시므온 지파의 남자가 있었습니다. 본문은 14~15절에서 그들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합니다. 그 남자는 시므온 지파의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이었으니 그 자신도 지도자였습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명령대로라면 그는 진작 처형되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미디안 여인 하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진영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6절 하반절에 보면, “그의 형제에게로 온지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그가 이 이방 여인과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서 가족들에게로 데리고 왔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는 대담했습니다. 그가 데리고 온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였고 그녀는 미디안의 한 수령인 수르의 딸이었으니 그녀도 시므리와 마찬가지로 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울고 있는 백성들을 지나 자기 장막으로 갔을테니 모든 백성들은 그의 담대함에 놀랐을 것이고 모두가 주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모세도, 재판관들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인 엘르아살도 뭔가 그를 향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대제사장의 아들인 비느하스는 그 담대한 사람 시므리를 보면서 그대로 앉아있을수만은 없는 어떤 의로운 분노를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했다고 표현하십니다(13). 비느하스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손에 창을 들고 그 대담한 남자를 따라 그의 장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남자와 여자의 배를 꿰뚫어서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건대, 시므리는 단지 결혼 승낙을 얻는 것을 넘어 이미 자기들은 합법적인 부부인 것처럼 장막에 들어와서 동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든지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행합니다. 시므리와 같은 대담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양산되게 되어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현상을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모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느하스가 이 두 사람을 죽였을 때,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본문이 기록합니까? 8절을 보십시오. “그 이스라엘 남자를 따라 그의 막사에 들어가 이스라엘 남자와 그 여인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이니 염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그쳤더라.” 그 순간에 염병이 그쳤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염병이 언제 왔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든 수령을 처형했다면, 하나님의 진노는 말씀하신대로 떠나갔을 것입니다(4). 그러나 모세는 행하지 않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백성들 가운데 염병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이 염병은 비느하스가 그 두 사람을 죽였을 때, 그쳤습니다(8). 그리고 이 염병으로 죽은 사람은 자그만치 2만 4천명이었습니다. 고라와 다단, 아비람의 반역으로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약 만 오천명 가량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16:49), 정말 큰 숫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 남아있던 출애굽 1세대들이 거의 다 죽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 다시 우리 질문으로 돌아가야지요. 모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결과 무슨 일이 벌어진 것입니까? 리더십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을 때, 범죄는 더 극악한 형태로 두려움 없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게 됩니다. 대담하게 범죄를 행하는 시므리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염병을 보내어 2만 4천 명의 생명을 취하여가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값비싼 댓가였습니다.
우리는 26장에서 두번째 인구조사를 봅니다. 이 때 대다수 지파들은 첫번째 인구조사의 결과와 비교해서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지만, 유독 시므온 지파만은 큰 감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59,300명이었는데, 26장에서는 22,200명으로 감소한 것입니다(1:23; 26:14). 어떻게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시므리가 속한 시므온 지파의 대다수가 이 사건으로 죽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시므리로 대표되는 시므온 지파의 범죄가 가장 크고 만연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는 작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의 원조는 아담이었습니다. 그는 하와가 뱀과 대화하고 있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 모든 대화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그 대화에 끼어들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노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인류는 에덴에서 쫓겨난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서운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비느하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사람
이제 우리는 비느하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시므리와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일 권한이 그에게 있었습니까? 물론 레위인과 제사장에게는 성소의 거룩함을 지켜야 할 의무가 주어져 있었고 이것을 범하는 자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민 3~4). 그러나 시므리와 고스비가 성막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므리는 자기 장막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칭찬은 여기에 있습니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린 것입니다(11). 궁극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한 것입니다(13). 이런 식의 칭찬은 성경에서 매우 드문 것입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내는 심판을 행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간음인 우상숭배로 인하여 버려진 남편이신 하나님의 질투하시는 사랑으로 비느하스는 시므리와 고스비에 대한 심판을 행한 것입니다. 비느하스의 이 행동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로 깨뜨린 언약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비느하스에게 평화의 언약을 주노라고 말씀하십니다(12). 이것만이 아닙니다. 비느하스의 이 행동은 이스라엘의 속죄를 가져왔습니다(13). 하나님의 진노는 이 만족할만한 비느하스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거두어졌고 따라서 염병도 그쳤으며 언약이 회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했던 비느하스의 열심이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살렸습니다.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한 것입니다(13).

막간에 일어난 일: 발람의 꾀(민 31:16)
오늘 저는 말씀의 제목을 ‘발람(3)’이라고 했습니다. 발람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이 본문의 이야기에 왜 발람이라는 제목을 붙였을까요? 바알브올의 음행과 우상숭배의 배교사건은 비록 이야기 속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발람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발람이 세 번의 저주 시도를 실패한 후에, 발락과 결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24:25). 그런데 우리는 24:25과 25:1 사이의 막간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민수기 31:16을 보지요.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누가 이 모든 사건을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조직적 음모와 행동으로 빚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발람의 꾀’였습니다. 발람은 발락과 헤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실패하였지만,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일러준 것입니다. 그것은 음행?성적 부도덕한 범죄?이었고, 그 음행은 우상숭배로 이어져서 결국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망의 길로 데리고 갈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발람의 꾀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발람의 꾀가 한 시대의 시도로 끝나고 없어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으로부터 14세기 후에 사도 요한이 버가모 교회에게 경고하기를,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박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발람의 꾀는 모든 시대에 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과 교회를 넘어뜨리려는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매튜 헨리의 말입니다. “우리는 험상궂은 세상의 두려움에 의해서보다는 미소짓는 세상의 매력에 의해 더 위협을 당한다.”그리고 이 발람의 꾀는 적중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유혹들
오늘날 우리도 이스라엘과 동일한 유혹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을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22~24장에서 세상이 그리고 세상의 임금인 마귀가 아무리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을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써도 그것은 필패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실로 우리가 상상 조차 할 수 없을만큼 안전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그렇게 영광스럽고 안전하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로 보호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들의 눈 앞을 오가며 마음을 흔드는 모압 여인들 앞에 여지 없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저주로도 바꿀 수 없는 영광스러운 운명이 세상의 유혹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적 부도덕, 즉 음행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적 부도덕은 필연적으로 영적 우상숭배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너지기 쉽다는 것입니까? 성적 부도덕의 문제에서 넘어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35세기 전의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성도착적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이 무너지고, 교회의 언약적 정체성이 깨지는 것은 어떤 영적인 문제에서가 아니라 성적인 부도덕함의 영역에서 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현실이 이것을 입증합니다. 사도 요한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요일 2:15~17). 우리는 예배에서, 성경공부에서, 교회의 모임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성적인 영역에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것뿐이 아닙니다. 시므리와 고스비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오늘날 누군가가 비느하스처럼 죽이지는 않을지라도, 시므리와 고스비를 비난하고 책망한다면, 그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며, 타인의 일에 간섭하는 봉건적인 사람으로 매도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므리와 고스비 사건은 오늘날 세속의 눈으로 보면, 그야말로 개인의 사적인 영역의 문제이고 또 그들의 관계는 요즘말로 동의한 성관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죄의 문제는 결코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죄는 언제나 공동체 전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죄가 하나님의 전체 백성의 운명과 언제나 관련을 가진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우리를 성경적 권징의 개념으로 인도합니다. 권징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라져버린 개념입니다. 소위 개인주의라는 세상의 정신이 교회를 질식시켰을 뿐 아니라, 교회의 권징을 사장시키는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 회원의 죄의 문제를 다루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죄를 지은 것을 가지고 왜 교회가 난리냐?”고 묻습니다. 권징을 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당신들이 뭔데,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고 맙니다. 교회는 또 그런 사람을 묻지 않고 받아줍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권징이 사라졌습니다. 권징이 사라진 교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모세와 재판관들 앞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대담하고 극악한 형태로 범죄가 교회 안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집니다. 어떤 지도자도 어떤 권징도 행하지 않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 더 많은 영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회칠한 무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권징이 없다면 말입니다. 권징은 사랑어린 교정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여러분은 교회의 권징을 단 마음으로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이 질문은 우리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의 몸인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종교개혁자 칼빈은 권징을 참된 교회의 표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한 권징을 행하는 때에도, 그 규정이 있으니까 해야 한다가 아니라, 비느하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권징은 이런 마음에서 시행되어야 합당하게 교회를 세워가는 권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느하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문제 많은 상황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비느하스였습니다. 하나님의 질투가 그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그는 행동했습니다. 그런 행동은 필시 관계를 깨뜨릴지도 모르고, 비난을 살지도 모르며, 때로는 무서운 책임을 홀로 져야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한 질투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결국 이스라엘을 위한 속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넘어집니다. 이스라엘만큼이나 넘어집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비느하스 보다 나은 분이 계십니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십니다. 예수님은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라는 시편의 구절을 성취하시려고 성전 청결을 단행하셨습니다(시 69:9; 요 2:17).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질투로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단번의 속죄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그는 너무나 완전하신 대제사장이셔서 우리의 죄와 넘어짐과 실패를 덮고도 남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두가 다 매달려 죽었어야 했지만, 비느하스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모두가 살았듯이, 우리는 오늘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임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았고 또한 영원히 하나님 앞에 살 것입니다. 우리의 우상숭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음행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범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점점 더 거룩한 백성으로, 순결한 신부로, 깨끗한 교회로 지어져갈 것입니다.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이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성 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