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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2) - 발람2

민수기 22:36~24:2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1-23

말씀내용
발람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우리는 본문을 살피고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자신의 영토로 접근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레 겁을 먹고 정상적 전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멀리 메소포타미아까지 가서 당대에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던 점쟁이 무당 발람을 청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부탁하는데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대로, 발람은 돈에 대한 탐욕을 가지고 발락의 요청에 응하여 모압으로 오게 되는데, 오는 길에 그의 나귀가 하나님의 사자를 보고 놀라 말을 하게 특이한 일을 경험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 받은 자들이므로(22:12) 그들을 저주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말만 해야 한다는 조건을 듣고(22:20,35) 두려움 가운데 결국 모압에 도착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선지자라고 볼 수 없으며 그저 많은 신을 섬기고 특별히 저주를 전문으로 하는 다신론자 점쟁이 무당이며 또한 자신의 의도를 잘 숨겨서 표현하는 대단히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하였습니다.
발락은 발람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멀리 나와 극진하게 맞이하면서 그를 존귀하게 해주겠다고 말합니다(22:35). 섭섭지 않은 대우를 해줄테니 기대하라는 말입니다. 발람은 자기는 하나님을 움직이기 보다는 그저 받아서 말할 뿐이라고 하지만, 발락은 그를 위해 성대한 환영 잔치를 배설합니다.

발락과 현대인의 불안과 두려움
모압 왕 발락을 한 번 살펴보지요. 그는 발람과는 달리 난해한 인물이라기 보다는 매우 공감이 되는 인물입니다. 발락이 왜 발람을 필요로 했을까요? 불안했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22:2~3). 발람은 미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는 발람을 필요로 했습니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사실 어느 시대 어느 인간에게도 허락된 일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특별한 예언을 하게 하셨고 그 예언으로써 당신을 계시하기도 하셨습니다. 때로는 마귀의 제한된 능력으로도 인간은 어느 정도의 예언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미래를 예측하거나 더우기 컨트롤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중대한 문제를 직면할 때마다 불안감과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소위 신통력이 있다는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발락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알려진 사람으로부터 예언기도를 받거나 축복기도를 받고 싶어하는 경향과 그에 따른 문제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많은 경우, 사깃군들로 판명이 나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발락의 문제가 오늘날 현대인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것은 소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려 놓으신 영역 때문입니다. 그 가려 놓으신 영역을 조금이라도 보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사실 본문은 그런 우리의 성향을 고발하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첫번째 예언(22:41~23:12)
드디어 발락은 바알의 산당에 올라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합니다(22:41). 거기서 발람은 이스라엘 진영을 끝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이스라엘 진영의 진 끝까지 보니라”는 말씀은 끝만 보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끝까지 다 보았다는 말일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전체를 다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나중에 23:13에서는 ‘끝만 본다’는 의미를 전달하지만 말입니다. 보통 당대에 저주하는 점쟁이들은 저주할 대상을 직접 보고 저주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바알의 산당’이라고 되 곳은 어쩌면 ‘바하못바알’이란 고유 지명일 수도 있습니다. 발람은 거기서 발락에게 일곱 제단을 쌓고 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숫양을 제물로 드리라고 요구합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 때문에 우리는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일곱 제단을 쌓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오직 하나의 제단에서만 가능했고, 제단이 많아진다는 것은 곧 종교적 배교와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발람이 여기서 일곱 제단을 쌓게 한 것은 그야말로 많은 신을 섬기는 발람의 이교적 관습에 유래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발락은 발람의 요구를 따라 다 행하지만,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도리어 축복하는 발람 때문에, 자리를 비스가 산 꼭대기와 브올 산 꼭대기로 두 차례나 더 옮기면서 모두 세 번 이 번거롭고 동일한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23:14,29).
발람은 발락에게 제단 옆에 서있으라고 하고 자신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언덕길’로 자리를 옮깁니다(23:3). ‘언덕길’은 그 의미가 분명하지는 않은데 아마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는 언덕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임하여 전할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이 첫번째 발람의 예언인 23:7~10입니다.
발람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신대로 전했을 것입니다. 요지는 아무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자들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23:7~8). 그리고 이스라엘은 ‘홀로 살 것’이라고 말하고 이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민족이라고 말씀합니다(23:9). ‘홀로 산다’는 말은 이스라엘은 다르다는 말인데, 그 다름은 세상의 신(우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의 1/4도 셀 수 없다고 말하는데(23:10) 이것은 창세기 13:16의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저주를 해야할 발람은 도리어 이런 고백까지 하게 됩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23:10b).”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제대로 본 사람이 할 수 있는 정직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이점에서 발람은 제대로 보았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두번째 예언(23:13~26)
발락이 항의하자 발람은 이미 말한대로 자기는 신을 움직이거나 조작해서 저주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그저 신의 말을 받은 그대로 전하는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대답합니다(23:12). 하지만 발락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거짓 신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발락은 발람을 데리고 소빔 들, 비스가 산 꼭대기로 갑니다. 아마 앞에서는 이스라엘 진영 전체를 보고 놀란 나머지 발람이 제대로 저주를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진영의 전체를 볼 수 없고 일부만 볼 수 있는 곳으로 온 것 같습니다. 여기서 발람은 “그들을 다 보지 못하고 끝만 보았습니다(23:13).” 물론 여기서도 발람은 일곱 제단을 쌓고 일곱 수송아지와 숫양을 드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두번째 예언의 말씀을 발람에게 주십니다(23:18~24).
사실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23:19~20절을 보지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하나님은 변덕스러운 인간과 달리,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오래 전에 약속하셨고 지금도 변함없이 그 약속을 성취하고 계시며 복을 베푸신다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허물과 반역을 보지도 않으신다고 말합니다(23:21). 우리는 그것을 광야 40년의 여정에서 이미 본 바 있습니다. 이 예언의 결론은 23절 상반절입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발락이 발람을 불러서 하고 싶은 것이 이것인데 이게 불가능하다고 확언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발락은 저주도 축복도 하지 말라고 주문합니다. 힘들게 발람을 불러와서 저주를 하게 할 셈이었는데, 저주는 커녕 축복을 하고 있으니 이런 역효과가 어디 있겠습니까? 발람은 원래 자기가 말한대로, 자기는 하나님이 하라는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다시 말합니다.

세번째 예언(23:27~24:13)
불안과 두려움에 쫓기는 발락은 집요합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장소로 발람을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일곱 제단을 쌓아 제물을 드리는 똑같은 일을 다시 행합니다. 이번에는 브올 산 꼭대기입니다. 발람의 경험은 발람을 상당히 바꾸었습니다. 24:1을 보지요. “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점술을 쓰지 아니하고 .” 그는 앞에서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점술을 썼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점술을 쓰지 않고 그냥 이스라엘을 바라보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셨습니다(24:2). 앞의 두 경우에는 할 말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아마 발람은 무아경에 들어가서 말하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발람은 자기가 눈을 감고 있었는데 이제는 눈이 열려서 말한다고 합니다(24:3~4). 이어지는 세번째 예언은 24:5~9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말할 뿐 아니라(5~6) 장래의 흥왕함을 말합니다(7~9). 이스라엘은 원수들을 상대로 승리할 것이며 이스라엘은 복의 근원이 되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창 12:1~3)?
참다못한 발락은 이제 손뼉을 치면서 화를 냅니다(24:10). 고비용 역효과를 참아내는 그의 인내심이 바닥난 것입니다. 그는 속히 떠나라고 하면서 아무 것도 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발람도 발락의 집에 있는 은금을 다 주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겠노라고 사신들에게 했던 말을 반복함으로써 맞받아칩니다(24:12~13). 그리고는 한 가지 더, 먼 훗날에 이스라엘과 모압 사이에 일어나게 될 일을 예언하고 떠나겠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네 번째 예언이 시작됩니다.

네번째 예언(24:14~25)
발람의 네번째 예언은 일종의 보너스입니다. 물론 모압에게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예언은 먼 미래에 관한 일이었습니다(24:17).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망하지 않는다. 먼 훗날 이스라엘에서 한 별이 나올 것인데(17b), 이스라엘에게 길을 내주지 않았던 에돔이 심판을 받을 것이고 모압도 그럴 것이다. 17절에 ‘셋의 자식들’은 모압을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에돔과 모압을 정복하는 일은 다윗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삼하 8:2,13~14; 왕상 11:15~16; 시 60:2,10). 아말렉도 멸망할텐데, 그들은 위대한 민족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나왔을 때 제일 먼저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민족이기에 ‘민족들의 으뜸’이라고 했을 것입니다(24:20). 네번째 예언의 요지는 이스라엘은 흥하고 그들을 대적하는 나라들은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발람은 이 마지막 예언을 하고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24:25). 정말 그들이 완전히 결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번 설교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교훈과 적용
자,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인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의 지각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불안의 요소
첫째로 이 발람 사건의 특징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각 영역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락이 발람을 초청했고,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한 일등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하여 아무 것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이 점을 한 번 적용적 관점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지각하고 알고 있는 영역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실 발람과 발락의 사건처럼 우리의 지각 영역을 벗어나서 우리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일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지각 능력은 아주 제한된 것입니다. 욥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욥은 왜 자기에게 이런 고난이 주어지는지 알고자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천상에서 벌어진 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기가 현실적으로 당하는 고난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고난의 의미도 알 수 없었고 하나님께서 자기를 얼마나 믿어주셨는지 그 영광스러움에 대해서도 더더욱 알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저주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자 모의하고 애쓰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에게 가해진 어떤 일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지 않았는지 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인간의 불안의 요소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발락은 이스라엘에 의해서 자기 나라가 멸망을 당할까봐 두려웠습니다. 미래는 일종의 우리 지각 능력을 벗어난 영역입니다. 발락은 두려웠고 번민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영적 힘을 빌리기로 결정하고 신통력을 인정받은 점쟁이 무당 발람을 부른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과학문명이 발달한 21세기를 살면서도 점쟁이를 찾아갑니까? 과학이 인간 지각 능력을 벗어난 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발락이 했던 것처럼 거짓 신에게로 향하게 됩니다. 거짓 신이 가져다 주는 것이 무엇인지 본문은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발락은 많은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멀리 사신들을 두 차례나 보내서 발람을 초청해야 했고, 복채와 많은 비용을 약속해야 했습니다. 또 세 차례나 장소를 옮겨 가면서 각기 일곱 제단을 성대히 만들고 거기서 고대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를 일곱 마리씩 그리고 숫양도 일곱 마리 씩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발락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비용을 허비하면서 거짓 신을 찾아 발락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람을 불렀다가 축복하게 되는 결과만을 보았습니다. 고비용을 들여서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확실성이 전혀 보장되지 않은 일을 한 것입니다.
발락이 자기 지각 능력 밖의 일에 대해서 불안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거짓 신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많은 비용을 쓰게 했으나 아무 것도 준 것이 없이 비참함만을 남겼습니다. 이것이 거짓 신이 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것이 어떻게 적용됩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교회를 다니다가도 인생의 위기나 중대사를 만나게 되거나 자기 지각 능력 밖의 일을 만날 때 점집을 찾아가는 일이 많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발락과 같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의 지각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비록 많을지라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섭리하고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일들이 우리의 지각 능력 밖에서 일어나고 있고 또 그중에는 미래라는 요소가 있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지각하거나 알아서가 아니라,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앎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가져오는 평안입니다. 욥은 자기가 어디로 가도 하나님을 뵈올 수 없고 자기가 가는 길 끝도 알지 못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욥 23:10).” 그렇습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나는 몰라도 하나님이 아시니까 나는 그 길을 간다는 태도 말입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아시니 나는 평안을 누린다는 태도 말입니다. 우리의 지각 능력 밖에서 우리와 관련해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지각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신뢰함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
이제 이 이야기 전체에서 정말 중요한 개념을 소개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하셨던 말씀 중에 있습니다. 22:12입니다.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가 과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충분하게 알고 느낄 수 있을까요? 나중에 발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23:23).” 왜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발람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23:19).” 하나님은 우리의 잘잘못에 따라서 변덕스럽게 바뀌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신실하게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23:21). 광야에서 그렇게 반복적으로 범죄하고 하나님을 반역한 백성들임에도 하나님은 여기까지 그들을 인도하여 내셨습니다. 마치 죄를 지은 적 조차 없는 자들인 것처럼 여기시면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복락이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안다면, 장래의 일들을 포함하여 우리의 지각 능력을 벗어난 모든 일들은 결코 두려움이니 불안함의 요소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어떤 사건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하나님의 복을 받은 우리를 저주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저주를 하나님은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그것이 발람의 사건을 기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확신이고 위로입니다. 질병도, 사업의 실패도, 결혼의 실패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일도, 직업을 잃어버리는 일, 심지어 죽음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저주가 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영광스러운 고백처럼 말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5~39).”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하나님께서는 이 근거 위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을 향한 저주를 변하여 축복이 되게 하십니다. 발락이 원했던 저주를 발람도 하기를 원했고 그렇게 해서 부를 얻고자 했던 발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주를 축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저주가 변하여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 저주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하여 모든 저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입니다(민 22:1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지각 영역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모든 저주를 하나님은 축복으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 앞에서 서게 될 때, 우리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일들을 우리는 알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 우리는 놀라겠지요? 아니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군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당신의 생명싸개에 싸서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해주셨군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임을 아십니까? 그 어마어마한 의미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움과 불안함에서 벗어나 기대감과 감사함으로 나아가십시오. 그 은혜를 평생 누리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복을 주신 선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감사와 존귀와 찬송을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