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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1) - 발람1

민수기 22:1-3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1-16

말씀내용
민수기 22~25장은 하나의 큰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를 지나면 두번째 인구조사가 실시되는 26장부터 민수기의 마지막 부분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발람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완전한 세대교체의 전야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과 연관되어 1세대의 남은 자들이 다 죽게 됨으로써, 가데스의 반역이 초래한 1세대의 죽음이 마무리되고 새로운 세대가 시작하게 됩니다.

해석의 난점들과 열쇠
민수기 22~25장에 등장하는 핵심 인물은 발람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귀가 말한 것으로 더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가보면 그 해석이 어렵고 논쟁적이기까지 합니다. 해석의 난점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발람이라는 인물이 누구냐 하는 문제이고,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가도록 허락하신 후에 왜 진노하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발람은 과연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돈을 사랑해서 타락하게 된 선지자인가, 아니면 그저 고대 근동에 살던 저주-전문(curse-master) 점술가인가? 간단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발람은 누구인가?
발람이라는 인물에 대한 해석이 엇갈리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도 자명합니다. 오리겐이나 제롬은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였으나 후에 타락하게 된 사람으로 보는 반면, 암브로스나 어거스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닌 악한 이방 선지자/점술가로 봅니다. 이 사람은 구약과 신약 성경에 꽤 많이 인용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먼저 그 구절들을 살펴보는 것이 발람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먼저 신약 성경의 평가를 보지요. 사도 베드로의 평가입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그 다음은 유다서의 평가입니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유 11).” 한 군데 더 보면 요한계시록에서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앞의 두 구절은 발람이 돈을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민수기 25장에서 보게 될 음행의 꾀를 낸 것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들만으로는 그가 본래 참 선지자로서 타락한 것인지, 아니면 이방의 점술가였는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민수기 외의 구약 성경에서 어떻게 이 사람을 언급하는지 보지요.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네 평생에 그들의 평안함과 형통함을 영원히 구하지 말지니라(신 23:3~6).” 이 본문은 모압과 암몬에 대한 말씀인데, 모압이 발람을 돈으로 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 저주를 복으로 바꾸셨다는 이야기가 언급됩니다. 여호수아서의 언급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수 13:22).” 여기서는 발람의 죽음을 묘사하는데, 그를 분명하게 ‘점술가’라고 지칭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다시 한 번 이 사람이 언급되는데 마지막 24장입니다.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수 24:9).” 이것은 오늘 본문을 포함해서 22~24장의 이야기를 회고하는 내용입니다. 이외에 느헤미야서도 발람이 발락에게서 뇌물을 받고 저주를 하려 한 내용이 언급됩니다(느 13:1~3). 마지막으로 미가서의 내용입니다.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미 6:5).” 이 사람 발람과 관련된 이 사건이 워낙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큰 배교의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성경의 인용들을 통해서 볼 때, 발람이라는 인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돈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였는가, 점술가였는가를 모든 성경이 다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고, 대부분의 구절들도 선명한 구분을 주는 것 같지 않지만, 그를 이방 점술가로 단정하여 기록한 여호수아서의 본문(수 13:22)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선지자라고 부른 곳은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약간 의문이 남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가령, 발락이 보낸 사신들에게 말하기를,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한 말이 그렇습니다(8). 또 처음에 거절당한 뒤, 발락이 더 높은 직급의 신하들을 더 많이 보내서 더 많은 복채를 약속할 때, 발람이 한 말도 보십시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 이 말은 사실 대단히 훌륭한 신앙의 소유자처럼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보겠다”고 말합니다(19).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 설명드리자면, 이 사람은 성경 외의 기록에도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1967년 요단강과 얍복강이 만나는 ‘데이르 할라’에서 발굴된 석회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기둥이나 벽을 덮고 있던 것으로 주전 9세기 경 신전 건물의 조각들이었는데 발굴된 119개의 조각 중 이가 맞는 것이 12개 였는데 여기 기록된 글이 발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브올의 아들 발람이 요단 동편에 살았던 전설적인 점쟁이로 꿈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밤에 꿈을 꾸는데 거기서 다산의 여신 샤가르와 샤다이 신들이 인간 세상에 가뭄을 주기로 결정하는 회의를 지켜보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적어도 민수기 본문의 기록과 세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그가 히브리 예언자가 아니라 저주를 전문으로 하는 점술가/무당이라는 사실이고, 둘째로 샤다이를 포함하여 신들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잘 이용하는 사람이며, 셋째로 밤에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발람은 정치적인 사람이다.
이런 성경의 자료들과 또 성경 외적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발람을 어떤 사람이라고 보아야하겠습니까? 이언 두귓(Iain M. Duguid)은 그의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발람이 선지자냐 이방 점술가냐 하는 문제와 하나님께서 그를 가게 하셨다가 그를 향해서 진노하신 문제는 그를 한 사람의 교활한 정치적인 인물로 이해할 때 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정치적 인물, 정치가라고 하는 묘사는 부정적인 면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정치가는 좀 천하게 말해서 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고, 자기가 의도하는 바를 말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이미 말부터 하고 나서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냐, 아니면 이방의 점술가냐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는 교활하고 거짓된 정치인과 같은 면모를 지닌 사람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호수아 13장이 지적하는대로 발람이 이방 점술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22~25장의 본문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발락이 발람을 부르다.
이제 이 사건의 개요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족속이 자기 영토를 지나는 것을 거절하는 바람에 멀리 우회하여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그 여정에서 생각지도 못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21장에서 본 바,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이었고 이스라엘은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 전쟁의 소문을 들은 정도가 아니라 직접 이 전쟁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2). 그래서 발락 뿐 아니라 모압 온 나라가 두려워했고 번민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발락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파괴자’인데 이제 발락은 자신이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발락이 이웃인 미디안 장로들에게 한 말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제 이 무리가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음 같이 우리 사방에 있는 것을 다 뜯어먹으리로다(4).” 사실, 미디안과 모압은 오랜 기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등장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의 적 때문에 그들은 동맹의 관계를 맺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22~25장에서는 모압과 미디안, 미디안과 모압이 함께 이스라엘의 대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발락은 정상적인 전쟁으로는 도저히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낸 승리의 공식은 당시로서는 국제적인 저주-전문 점술가 발람을 불러와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파멸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대인들에게는 얼마든지 합리적인 전쟁의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발람이 고대 근동 세계에 신통력이 있다고 널리 알려진 점술가였을 것은 분명합니다. 발락이 발람을 부르기 위해서 발람의 고향 브돌로 사신들을 보내게 되는데, 이 거리는 모압에서 무려 650km 떨어진 곳이어서 한 번 가는데만 최소 20일이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사신들이 두 번을 왕래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발락이 발람을 초청하는데 거의 3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먼 길을 두 차례나 사신들을 보내고 공을 들여서 발람을 불러오려고 했다는 것은, 발람이 가진 명성을 가늠하기에 충분합니다.
처음에 사신으로 발람에게 온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은 빈 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복채를 가지고 왔습니다(7). 발람은 그 밤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후 발락의 요청을 거절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냅니다.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사신들을 보내는데 더 높은 직급의 더 많은 사신들을 보냅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약속합니다. 결국 발람은 발락의 요청에 응하여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발람의 저주 사건이 시작됩니다.

발람의 문제-돈을 사랑함
우리는 본문이 매우 자세하게 발람의 문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 사신들이 왔을 때 발람은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고 말했습니다(8). 이 말은 다분히 발람이 하나님의 선지자인가를 의심하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발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는 충분한 정보는 없습니다.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깨서는“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는 질문에 이어(8) 가지고 말고 저주하지도 말며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 여기서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개념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고 언약하신 바, 창세기 12:2~3을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놀랍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발람의 사건입니다. 결국 발람은 거절하고 사신들을 돌려보냅니다. 발락이 2차로 더 높은 고관들을 더 많이 보내서 더 큰 제안을 했을 때, 발람의 태도를 주목하는 것은 발람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데 실마리를 줍니다. 발람의 첫 대답은 멋집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여기서 끝났더라면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말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19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이것이 발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민족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들을 저주하지 말아야 하며 발락의 사신들을 따라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은 멋졌습니다. 그런데 그의 진심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달리 말씀하시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그는 사신들에게 지난 번처럼 하루 묵으면서 기다려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0).” 이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발람이 길을 떠날때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사자를 보내 길을 막으셨기 때문입니다(22). 이언 두귓은 말합니다. 20절에서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말씀은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백성들에게 한 말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즉, 이런 말입니다. “그들이 너를 부르고 네게 제공하겠다고 말하는 복채(영광)를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것이 네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따라가거라.”
이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결국 제 욕심을 따라 길을 떠난 발람을 향하여 진노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발람이 18절에서 한 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정치가입니다. 18절이 그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19절이 그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는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몸값을 올리고 싶어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지금까지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은 결국, 그가 다른 모든 신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방식으로 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소위 다신론의 세계에서 모든 신들의 이름을 언제라도 사용하는 점술가요, 무당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할 때, 발람에 대한 신약성경의 언급들, 그의 탐욕에 관한 언급들이 다 맞아떨어집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타락한 자가 아니라, 본래 이방 점술가요 무당으로서 돈을 사랑하고 돈을 위해서 무당짓을 하는 자였습니다.

발람의 문제-영적 소경됨
돈을 사랑하는 것, 즉 탐욕이 발람의 첫번째 문제였다면, 이것은 필연적으로 영적 소경됨으로 인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그 유명한 말하는 나귀의 이야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발람은 아침에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사신들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심으로 사자를 보내 길을 막으십니다. 나귀를 타고 가는 발람은 영적 소경이기에 하나님의 사자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의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는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고 맙니다(23). 발람이 채찍질을 하니 나귀는 다시 길로 들어서지만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서게 되고 나귀는 여전히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는 가지 않으려고 몸을 담벼락에 대자 발람의 발이 담에 짓눌리게 되어 다시 한 번 발람은 나귀를 채찍질합니다(24~25). 이제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좌우로 피할데 없이 자기를 가로막고 계심을 보고는 아예 엎드리고 맙니다(26~27). 이제 흥분한 발람은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귀 입을 여셨습니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28).” 나귀가 말하는데 발람이 놀랐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아마 발람 자신도 어떤 징조로 알았던 것 같습니다. 발람은 자기 손에 칼이 있었다면 나귀를 죽였겠다고 거칠게 말합니다(29).” 나귀와 발람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30).”
이때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십니다. 그러자 발람이 드디어 나귀가 보았던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서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는 머리를 숙이고 엎드립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32~33).” 무슨 말입니까? 사실 칼에 죽어야 하는 것은 나귀가 아니라 발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당이요 점술가로 명성을 떨치는 발람은 사실상 나귀만큼도 분별력이 없고 나귀만도 못한 영적 소경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자기 탐욕을 채워줄 돈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탐욕은 영적 눈을 멀게 하여 나귀만도 못한 존재가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눈을 열어 보게 하셨고,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심으로써 나귀에도 미치지 못하는 발람의 존재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발람은 이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범죄함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으면 돌아갈 것을 말하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에는 발락이 약속한 것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합니다. 만일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그는 더 이상 조건을 달고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바로 오던 길을 돌아 집으로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결국 발람은 하나님께서 이르는 말씀만 하라는 준엄한 명령을 듣고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0~12a).” 무엇보다도 사역자인 디모데에게 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교회 지도자들에게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라면 우리가 돈을 얼마나 주의해서 다루어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얼마나 많은 목회자와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에서 넘어지고 있습니까? 그리고 뭔가 특별한 일이 터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아직 괜찮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이전 시대와 오늘 우리 시대를 비교해보십시오.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가난했던 시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오늘날 그렇게 편리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가져오는 가장 비극적 결과는 영적 눈이 멀어서 분별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이 그것을 깊이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발람이 자기 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자기는 여전히 똑똑하고 여전히 분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지적인 영역에 머무를 뿐입니다. 영적 분별력은 완전히 상실되고 맙니다. 이것이 버려진 상태의 무서운 모습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징계일 것입니다.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국 점점 더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되고 그 마음을 황폐하고 강퍅한 상태로 가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어디서 시작합니까? 탐욕, 즉 돈 사랑이 그 길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험한 상태에 머물고 있지는 않습니까?
돈을 사랑하면서 얼마든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면서도 얼마든지 목사가 목회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분별력은 상실되고 영적 소경이 되고 맙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종교사깃군이 되거나 종교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발람의 교훈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울려주시는 경종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