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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40) - 놋뱀

민수기 21:4-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1-09

말씀내용
우리는 21장부터 민수기가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26장에 가서야 두번째 인구조사가 시행되고 그 인구조사는 이제 출애굽 1세대는 다 죽었고(물론 여호수아와 갈렙은 예외입니다) 2세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21장부터 주도적 역할을 감당하는 세대가 2세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1세대와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장대한 가나안 사람들과 그들의 공격을 두려워하는대신 도리어 반격하여 그들을 무찌르는 용맹을 보여주었습니다. 1세대가 패배와 방황으로 점철된 세월을 보낸 것과 달리, 2세대는 가나안과의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면서 입성을 준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2세대도 근본적으로 죄인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며 은혜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인간은 훌륭하든 그렇지 못하든 모두가 은혜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다
우리는 본문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만납니다. 아론이 죽은 호르산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이르는 지름길인 ‘왕의 큰길’을 지나 가나안으로 가기를 원했으나 에돔족속이 허락하지를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멀리 우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홍해 길을 따라 우회하여 가는데 이 길이 고생스럽다 보니까 마음들이 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수 없이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상한 백성들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백성들은 주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원망하는 대상은 하나님과 모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좀더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모세와 같은 인간 지도자를 향한 비난이나 원망은 곧 하나님께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을 했습니다. 원망의 말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업소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5).”
그들의 부모 세대들이 그랬듯이, 이들의 원망의 내용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기적적으로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늘 먹고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그들은 반석이 터져서 나오는 물을 마셨고 짐승들까지도 충분히 물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20:11).
1세대와 비교해볼 때 조금도 달라진게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오히려 그 도가 지나치다고 여겨집니다. 그들은 다베라를 잊었고 기브룻 핫다아와를 잊었습니다(민 11). 이들의 불평과 원망의 절정은 만나에 대한 그들의 언급에서 나타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난 40여년 간 먹고 살아온 하늘의 양식인 만나를 ‘이 하찮은 음식’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찮다’는 단어는 ‘끔찍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우습게 여긴다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만나는 하늘의 떡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이 끔찍한 자’라고 부른 셈입니다.

하나님의 대응
이 원망 사건은 다른 사건들과는 조금 다른 면을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주도적으로 행한 바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직접 불뱀들을 백성들 가운데 보내심으로써 응답하셨습니다. 여기서 불뱀은 보통 뱀을 말할 때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것은 ‘(불로) 태우다/타다’는 동사에서 비롯된 단어로 이 뱀에 물리게 되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 죽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불뱀은 죄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보여줍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서 원망한 것은 죄였고 그들은 불뱀에게 물림으로써 그 죄의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성격을 배우게 됩니다.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뱀에게 물린 자마다 다 죽었듯이, 죄에게 물린 자도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6절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고 했는데, 상당히 많은 불뱀들이 백성들 가운데 들어와서 무서운 피해를 입혔던 것 같습니다. 백성들의 반응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기 전에, 오히려 백성들이 모세에게 와서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7).” 회개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 가운데서 마음을 더 강퍅하게 하지 않고 도리어 부드럽게 하여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는 점은 분명히 그들의 부모세대와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단지 불뱀들이 사라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불뱀에 물려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백성들이 살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물린 자가 그것을 바라보면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았고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보면 모두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8절과 9절에서 눈으로 본다는 것을 두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저주받은 놋뱀
이 이야기의 중요성은 주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을 하시던 중 이 놋뱀 사건을 친히 언급하셨다는데서 드러납니다. 요한복음 3:14~15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놋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점에서 놋뱀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까? 놋뱀은 주님의 죽으심을 가리킬 뿐 아니라, 주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죽으실 것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놋뱀은 죄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예표입니다. 로마서 8:3에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고 했습니다. 놋뱀은 비록 뱀의 형상이지만 뱀은 아니듯이, 주님은 비록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지만 죄는 없으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이 바로 놋뱀이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이 놋뱀은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놋은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고, 또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는 강함을 보여줍니다. 놋제단의 놋도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심판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놋뱀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입니다. 놋뱀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뱀입니다. 장대에 달린 놋뱀은 죽은 뱀의 상징입니다. 그 뱀은 꿈틀거릴 수도 없는 죽은 뱀입니다. 그것은 장대에 꽂혀서 미동도 할 수 없습니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높이 나무에 달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으셨습니다.
장대에 높이 달렸다는 것도 잘 보이게 한다는 실제적 의미보다는 오히려 구약성경이 말하는 저주의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 21:23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무 위에 단다는 것은 저주를 의미합니다. 즉 이 장대 위에 높이 달린 뱀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뱀이란 뜻입니다. 즉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말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죽음을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죽음 즉, 주님께서 ‘들려야 한’ 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 달려서 우리가 죄인으로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저주를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자, 그러면 이 사건이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대에 매단 놋뱀을 쳐다보는 자는 산다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 어떤 것을 말해줍니까? 불뱀에 물린 자 가운데 놋뱀을 바라보는 자는 다 살아났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얻습니다. 이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특이한 방법으로 죽을 자들을 살려주셨습니까? 그들이 살아난 원인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쳐다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살아났습니다.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정답은 당연히 후자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봤다거나 우리가 고개를 들었다는 것에 구원의 원인이 있지 않고, 놋뱀이 달렸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는 사실에 구원의 원인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놋뱀 사건을 통해서 구약의 백성들에게와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복된 교훈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모든 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은 놋뱀이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광야를 살아가는 방식
한 가지 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저는 이 본문을 통하여 탁월하게 적용점을 제시하는 이언 두귓(Iain M. Duguid)이 도전한 내용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광야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회개에 자신을 드리는 삶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을 받는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사람은 장대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다른 모든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우리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인정하고 우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 자신의 심각한 죄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상의 어떤 것을 그리스도의 대체물로 여겨 거기서 자기 만족을 취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기 만족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삶은 지속적으로 죄로부터 눈을 돌려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회개의 삶입니다. 이 회개가 광야의 신자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둘째로, 광야를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내하는 삶입니다. 광야 여정에는 난관과 어려움이 산재하고 넘어지고 비틀거리는 삶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이 여정의 목적지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실하심에 달린 문제이지 우리의 성실함이나 실력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우리를 버리거나 죽이시지 않으십니다.
세째로, 믿음의 삶은 노래하는 삶입니다. 복음은 죄인(sinner)을 노래하는 자(singer)로 변화시킵니다. 이것은 물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광야의 거친 곳을 지나가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니요? 이것은 신자의 신비한 특권입니다.
넷째로, 광야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사탄을 이기신 주님의 승리의 기쁨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스라엘이 놋뱀을 받았다면(상징으로) 우리는 성찬상에 앉을 때마다 구주의 승리의 실재와 상징을 보고 기념합니다. 믿음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여러분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 성취된 자리이고,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보내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보장된 자리입니다. 눗뱀으로 상징되는 십자가는 이 광야의 여정이 마치는 날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안식의 보증입니다.
광야에서 놋뱀이 들린 것같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모든 주의 자녀들은 광야 같은 인생을 걸어갈지라도 날마다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