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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별 강해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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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9) - 하나님의 전쟁

민수기 21:1-35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1-02

말씀내용
새로운 세대
20장은 우울함 혹은 어두운 그림자를 비쳐주었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 그리고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21장은 일종의 반전을 보여줍니다. 1~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에서 승리를 거둔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여러분은 호르마를 기억하십니까? 가데스에서의 반역 사건에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을 악평한 1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광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백성은 아니라고 하면서 가나안을 향해 진군합니다. 올라가면 패할 것이라고 하는 모세의 만류를 듣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가나안을 향해 올라가다가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곳이 흐르마였습니다(민 14:39~45). 호르마는 패배 이상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1세대가 광야에서 다 죽기 전에는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타난 뜻을 반하여 행동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고 1세대는 거의 다 죽었습니다. 바로 앞장에서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들 1세대 중에서 생존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세대가 이전 세대를 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출애굽할 때 성인이 아니었던 사람들, 즉 민수기 1장에서 계수할 때 포함되지 않았던 미성년과 아이들이었습니다.

호르마와 가나안 정복 전쟁(1~3)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호르마 앞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약 삼십 칠 팔년 전에 그들은, 아니 그들의 부모 세대는 여기서 쓰라린 패배를 안고 광야로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고 부모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호르마 앞에 섰습니다.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그들을 향하여 진격하기도 전에 그들이 먼저 공격을 감행하여 이스라엘 몇 사람을 사로잡아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가운데 호르마에서의 트라우마가 있었다면, 이 일로 그들은 위축되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2세대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와는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서원을 했습니다.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기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2).”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서원을 들으셨고 그 가나안 사람들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였습니다. 이곳이 호르마입니다.

첫 승리-새로운 세대의 서곡, 가나안 정복 전쟁의 첫 열매
이 전쟁 기사는 매우 짧고 단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민수기의 흐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민수기 14장의 호르마 패배 이후 승리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은 이후에 그들이 싸운 전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삶에 승리의 경험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호르마 앞에 서서 그들은 승리를 경험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승리가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드디어 가나안에 들어와 승리의 행진을 이어가기 시작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가나안의 문을 여셨다는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한 세대가 가고 가나안에 들어가 살게 될 새로운 세대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전쟁
이런 점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이 짧은 전쟁 기사에 나옵니다. 1~3절에서 반복된 단어가 있습니다. ‘멸한다’하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서원할 때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라고 했고, 실제로 그들은 “그들과 그들의 성읍을 다 멸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멸해야 했고 쫓아내야 했다는 사실을 압니다. 여리고성을 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라고 하셨고(수 6:17), 이스라엘 백성은 “그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되 남녀노소와 소와 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였습니다(수 6:21).” 많은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바치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3절에 ‘멸한다’는 단어와 같은 단어이고 ‘호르마’가 같은 어원의 단어입니다. 우리 개역개정역에서 호르마에 난외주를 보면 ‘완전히 멸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싸울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 전쟁은 그들이 땅과 부를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역사 속의 모든 전쟁은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거나, 영토를 확장하거나 자기들에게 이로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그런게 아닙니다. 설령, 이 전쟁을 가나안 정복 전쟁이라고 명명할지라도, 이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가진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사람들과 그 성읍들과 모든 것을 온전히 바치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혹 노약자이기 때문에 제외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를 둘로 나눕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사면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잘 묘사해주는 역사의 경험입니다. 이것은 섣부르게 행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이 있기 4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창 15:16).” 아모리 사람들의 죄악과 함께 하나님의 시간표는 찼고, 그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준비시키셔서 그들로 심판을 대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행한 일이 크게 심판을 받은 것은, 이 전쟁을 자기 이익을 위한 전쟁으로 삼았기 때문이고, 그가 한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거스르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호르마 전쟁은 앞으로 이어지게 될 모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서곡이고 그 전쟁의 성격을 분명하게 계시해주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이기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서 전쟁을 수행해야 했고,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하심으로 승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희망-새로운 세대는 달랐다
새로운 세대는 달랐습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들의 고집을 부리면서 자기 힘으로 호르마로 올라가 싸웠으나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묻고 행했을 뿐 아니라,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싸움을 싸웠고 승리했습니다. 본문은 이제까지의 암울한 분위기를 접고 이제 희망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줍니다. 믿음의 세대, 새로운 세대가 한 시대를 담당하게 되었고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본문은 희망을 제시해줍니다. 한 세대가 간다는 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설령, 그것이 미리암과 아론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그들, 그 세대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가 함께 하였을지라도 이전 부모들의 세대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인간 지도자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이것은 결코 인간 지도자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시혼과 옥을 이김(21~35)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이 왕의 큰길을 내어주지 않음으로써 우회로를 택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백성이 먼 길을 돌아서 이스라엘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또 한 번의 위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다음 주에 다루기로 하고, 우리는 이 주제에 맞추어서 21~35절에 기록된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로 바로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본문은 10절부터 20절까지 매우 중요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에서부터 어떻게 어떤 노정으로 모압 평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행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절에 보면, “비스가 산 꼭대기에 이르니라”라고 했습니다. 비스가 산에서 모세가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신 34:1). 이 지명은 모압 땅에 속한 곳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을 멀리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 땅을 바라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까지 이른 것입니다. 물론 학자들이 여기 언급되는 지명들을 모두 현대의 장소와 일치하도록 정확한 정보를 얻은 것은 아니지만, 이 정보는 출애굽의 노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우회함으로 얻은 덤
우회하는 것 때문에 이스라엘은 크게 불만을 표했고 또 크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21절 이하의 본문에서 보게 되는 두 번의 전쟁은 우회하는 바람에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지도 않은 영토를 얻은 것을 보여줍니다. 아모리 왕 시혼의 영토와 바산 왕 옥의 영토는 본래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소위 트랜스요르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바, 모두 요단 강 동편에 위치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회하게 하심으로써, 그리고 이들과 맞닥드리게 하시고 전쟁을 피할 수 없게 하심으로써, 자기 백성에게 덤으로 요단 동편의 땅을 허락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 인생에서도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본문은 우리가 어떤 상황이 악화된다고 여겨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습성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최상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에돔 때문에 우회함으로 덤을 얻은 것입니다.


아모리 왕 시혼과의 전쟁(21~30)
모세는 처음에는 에돔에게 그렇게 했듯이, 아모리 왕 시혼과도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도록 허락해줄 것을 사신을 보내서 부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리 왕 시혼은 악한 왕 답게 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과 싸우겠다고 길목인 야하스로 군대를 이끌고 나와서 먼저 이스라엘을 쳤습니다. 이것은 큰 실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칼날로 그들을 쳐서 무찌르고 그들의 모든 성읍을 빼았고 거기에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왕도는 헤스본이었습니다. 사실, 이 본문에는 28~30절에 하나의 시가 나오는데, 이것은 과거에 아모리 왕 시혼이 모압을 쳐서 그 땅을 삼켰을 때 한 시인이 그 승리를 찬양한 시입니다. 이런 용맹한 왕 시혼을 굴복시키고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사람들의 땅에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바산 왕 옥과의 전쟁(31~35)
두번째는 바산 왕 옥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외교적 사신을 보내기도 전에 바산 왕 옥이 군대를 거느리고 에드레이로 나와서 싸움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아모리 땅을 점령하여 거주하는 중, 그곳에 남아있던 아모리 사람들을 몰아내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산으로 올라가면서 바산 왕 옥이 걸어온 전쟁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하기 전에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십니다.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나니 너는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 같이 그에게도 행할지니라(34).” 하나님의 말씀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나가 싸워 바산 왕 옥도 굴복시키고 그 땅을 점령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주의해서 보십시오(35).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두 전쟁의 의미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싸워 이긴 전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기억되곤 하였습니다. 아마 여러분이 구약 성경을 읽으시다 보면 그런 구절들을 발견하실 수 있으실텐데 가령, 이런 구절들입니다. “그가 많은 나라를 치시고 강한 왕들을 죽이셨나니 곧 아모리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가나안의 모든 국왕이로다(시 135:10~11).” “유명한 왕들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 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8~20).” 느헤미야도 이 사건을 회상합니다.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그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그들이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느 9:22).” 왜 이 두 전쟁이 그렇게 기억이 되는 걸까요? 여기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이 두 전쟁의 사건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르우벤과 갓 두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건너 동편에 기업을 얻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승리의 시리즈가 시작되다.
본문에는 세 전쟁이 나오고 그 모든 전쟁에서 승리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제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광야에서 죽어야 할 세대가 거의 죽었고 이제 새로운 세대, 2세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기업을 얻게 될 세대입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전쟁이거나, 그들이 땅이나 부를 얻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 승리는 보장될 것이었습니다. 승리의 시리즈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부터 그들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싸우게 될 모든 전쟁의 서곡이고 예고편이었습니다.


최상의 것을 주시는 하나님
이 싸움의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동안 그들의 부모 세대들이 끊임없이 원망하고 불평했던 주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우리가 다음 주에 보게 되겠지만 새로운 세대에게도 존재하는 죄성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죽이시려고 애굽에서 광야로 끌고 나왔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제 드디어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고 약속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시기 위해서 불러 내신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시기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이 새로운 세대에게 허락하신 세 번의 전쟁에서의 승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흐르마는 첫 열매로써, 그리고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는 전쟁으로써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을 기념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싸우는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본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과거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여전히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싸우는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단지 우리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 싸우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이란 탐욕을 만족시키는 아간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서, 더 큰 부를 얻기 위해서, 더 많은 소유를 누리기 위해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의 싸움은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은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마음의 간구를 안고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자기 나라를 세우는 것이 목적인 삶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꿈이고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는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 사는 대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에 자기 삶을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그는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을 싸우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간의 삶이고, 아간의 삶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것으로 여기셨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신자의 삶의 승리는 이렇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사욕을 위해서 탐욕을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면서 얻는 것은 이스라엘의 1세대가 경험한 호르마에서의 쓰라린 패배일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