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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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8)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다

민수기 20:1-29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0-26

말씀내용
민수기의 마지막 부분이 20장부터 시작됩니다. 이 부분은 출애굽 여정으로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는 여정이고, 시간적으로는 광야의 마지막 2년의 기록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서 민수기 14장까지가 광야 생활 초기 1년 반의 기록인 점을 보면 광야 생활의 처음과 끝을 제외한 대부분의 36년이 우리가 앞서 살펴본 민수기 15장에서 19장에 압축적으로 기록된 셈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0장은 슬픈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모세의 형 아론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두 죽음 사이에는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그들의 범죄가 있습니다.
1. 미리암의 죽음(1)
1절은 ‘첫째 달’이라고 시간을 알려주는데 광야에 들어온 지 몇 년째 되는 해의 첫째 달 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론의 죽음이 33:38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십 년째 오월 초하루”에 일어났기 때문에 본문에 함께 기록된 미리암의 죽음도 40년째가 되던 해의 ‘첫째 달’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미리암은 아론 보다 약 4개월 일찍 죽은 셈입니다. 두 사람의 죽음은 광야의 1세대가 다 죽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미리암의 죽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주목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가데스’라는 지명입니다. 우리는 민수기 13장에서 이 지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픈 기억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열 두 사람의 정탐꾼을 가나안에 보냈었고 그들은 돌아와서 그 땅을 악평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부정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반역을 일으켰던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1세대가 다 죽은 뒤에야 비로소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하셨고 그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어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가데스에 와 있습니다. 벌써 37~38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그 세월을 방황하며 부모 세대의 죽음을 목격해야 했으니 그들에게 광야는 매장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가데스에 왔습니다. 비록 장소는 여전히 가데스지만, 여기서 미리암이 죽었다는 것은 말씀대로 이제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왔음을 시사합니다.
2. 모세와 아론의 범죄(2~13)
이어지는 사건은 소위 므리바 사건입니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출애굽기 17장의 사건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백성들은 물이 없어서 모세와 다투어 불평을 했고, 하나님께서는 호렙 산에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나오게 하여 백성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곳을 맛사 혹은 므리바라 불렀는데 맛사는 하나님을 시험하였다는 것을, 므리바는 하나님께 반역을 하였다는 것(다툼)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건이 일어난 곳도 므리바입니다(13). 하지만 이곳은 출애굽기 17장의 그 장소는 아닙니다. 출애굽기 17장의 므리바는 시내 반도 남단, 신 광야에 있는 르비딤 근처의 장소이고, 본문의 므리바는 가나안에 가까운 가데스 광야의 므리바입니다. 다만, 이 사건이 동일하게 하나님을 시험하고 다툰 사건이기에 므리바라고 불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건의 유사성은 놀랍습니다. 마치 데자부를 느끼게 합니다. 백성들은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다투어 불평합니다. 그들은 “왜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내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고 원망합니다. 다만 오늘 본문에서는 지난 40여년의 세월을 보낸 탓에, 과거의 힘든 사건들이 더 많이 열거됩니다. 그들은 자기 형제들이 죽을 때 자기들도 다 죽었더라면 좋았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고라의 반역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3). 고라와 그 반역자들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는 편이 오히려 나았겠다고 말하니,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그들도 역시 고라와 반역자들이 했던 식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5)?” 그들의 문제는 물이 없는 것이었습니다(2). 그런데 그들은 파종할 곳이 없다, 무화과와 포도와 석류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힘들고 지치고 곤고해지면 사람이 이렇게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온갖 것들이 한꺼번에 다 나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물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필요이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문제는 현실을 실상 보다 악하게 보고 과거의 모든 맺힌 것들을 가지고 나와 모세에게 쏟아 붓는 태도입니다. 필요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불신앙적 태도가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초점은 백성들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의 태도는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보아왔던 것에 불과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모세와 아론의 반응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모세와 아론은 회막 문에 엎드렸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중에 나타났습니다(6). 이것은 백성들을 주춤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8).”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7장에서처럼 한 반석을 지시하시고 그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모세의 행동이 놀랍습니다. 그는 백성을 반석 앞에 모은 후,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고 소리친 후에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내려쳤습니다(10~11). 결과, 그 반석에서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짐승들이 다 마셨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을지 모릅니다. 온유한 사람 모세가(민 12:3) 자신들을 향해서 화를 냈다는 사실 하나만 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만 좋으면 괜찮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도, 수단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두드러진 능력과 은사 혹은 외형적인 성공적 결과가 나타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사람은 옳다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 분명히 모두가 예상하고 바라는 좋은 결과가 나왔지만, 그 수단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12).”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첫째 ‘나를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셨고, 둘째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을 보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너무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40 여년을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여 여기까지 온 모세와 아론을 이 ‘사소한’ 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니 말입니다.
우리가 40년의 모세의 인내를 생각할 때, 이건 사소한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12절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불신의 문제였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두 가지 본질입니다. 모든 죄는 불신입니다. 성령님께서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 함은 ‘믿지 않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요 16:9). 그리고 믿음을 따라 하지 않는 모든 것이 다 죄라는 것도 분명합니다(롬 14:23). 또 죄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성품을 드러내는 대신 도리어 훼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해서 물을 공급해 주시려는 은혜와 자비와 선하심을, 자신의 분노로써 훼손한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반역자들’(반역한 너희여!)이라고 불렀고 자신이 심판자인 듯 행동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물을 내랴 하고 말했습니다. 언제나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자리를 취하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고 반영해야 합니다. 그 직분은 자기 성질을 내는 직분이 아닙니다. 모세가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는 말씀을 듣고서도 지팡이로 두 번이나 쳐서 물을 냈다는 것은 그가 분노하고 흥분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17장에서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치라고 하지 않으시고 반석을 향해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번에는 달리 명령하신 것일까요?
먼저 우리가 출애굽기 17장의 본문에서 반석을 쳐서 물을 내게 하신 뜻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17:6에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이 본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해석이 고린도전서 10:1~4에 나옵니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반석은 그리스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모세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내가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반석 위에 서 계셨고 모세에게 반석을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백성을 내리치심으로써 심판을 하시는 대신 하나님은 반석이신 그리스도의 깨어짐을 통해서 그들에게 생수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7장이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냥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 깨어진 반석은 이제 구함으로써 생수를 공급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두 번 십자가에 달려 그 몸이 깨어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성질을 내면서 두 번을 내리쳤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뜻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한 불신앙인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는 십자가의 충분성을 드러내는 대신, 도리어 모세는 자기의 의와 분노를 드러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크게 여기셨고 당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13).
3. 에돔의 영토를 우회하다(14~21)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에도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전진해야 하고, 모세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모세는 에돔의 영토 안으로 뻗어있는 ‘왕의 큰길’을 통과하게 되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에돔의 왕에게 그냥 지나갈 수만 있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모세가 에돔 왕에게 보낸 요청은 당시 완벽한 형식을 갖춘 외교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14~17). 에돔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 아닐 뿐 더러, 에돔은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손이었기에 이런 요청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에돔 왕의 무례한 거절에 모세는 충분히 보상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재차 요청합니다(19). 하지만 에돔 왕이 군사 충돌을 불사하겠다는 자세로 거절하자, 모세는 에돔과의 전쟁을 선택하는 대신 에돔 땅을 남쪽으로 우회하기로 결정합니다(21).
4. 아론의 죽음(22~29)
이스라엘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론을 데려 가십니다. 이것은 앞에서 벌어진 므리바 사건의 결과입니다.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24).” 하나님께서는 첫 대제사장 아론을 불러 가실 때, 모세에게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와 아론의 옷을 엘르아살에게 입히라고 하십니다. 아론은 그 산에서 죽고 모세는 새로운 대제사장 엘르아살 만을 데리고 산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대제사장 아론의 죽음을 한 달 동안 애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과거에 가데스 광야에서 말씀하신대로 1세대는 광야에서 죽어가게 됩니다. 미리암과 아론의 죽음은 이점에서 상징적 역할을 합니다.
5. 오직 그리스도!
우리는 반석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와 백성과 가축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반역하는 백성을 때리시는 대신, 반석이신 그리스도가 깨어지심으로 생수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본문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반역하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번번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언제나 충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제물 삼아 영단번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모든 백성의 모든 죄악이 사하심을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추가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성질을 부리고 스스로 백성의 심판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복음의 충분성을 신뢰하지 않음을 드러냈습니다. 절제되지 않은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고 도리어 자기 의를 드러낼 뿐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백성들의 목전에서 드러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40여년 동안 쌓이고 쌓인 모세의 감정은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모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모세처럼 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아니시며 인생이 아니십니다(민 23:19).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하라고 요구하십니다(레 20:26). 아브라함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 아무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롬 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자는 없습니다(롬 3:25). 그 훌륭한 모세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그 거룩하심을 드러내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실패와 죄를 반복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반역하는 우리를 하늘 본향으로 온전하게 인도하여 들이실 수 있는 분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속을 온전히 이루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사시는 동안에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써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4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그들은 다시 똑같이 범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이번에는 모세와 아론 마저 넘어집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 여전히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지도자에게 우리 소망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도 그리스도 외에 어떤 인간에게 그런 소망을 걸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복음 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과 위로를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고전 1:30~31). 그리스도 앞에서 세상의 모든 자랑거리들은 다 무색해 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함께 우리도 말할 수 있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