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샬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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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37) - 부정함 가운데 머물지 말라

민수기 19:1-22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6-10-12

말씀내용
1.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하나님께서 제공하신다.
18장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을 이스라엘을 위한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고 자기들은 다 죽을 수 밖에 없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절규할 때(17:12~13), 하나님은 “내가 너희에게 살 길을 주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너희가 살 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18장입니다.
이점에서 우리는 그들과 동일한 인식을 가집니다. 그리스도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고 율법의 저주와 형벌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인생이며 우리에게 보장된 것은 영원한 지옥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완전히 담당하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함과 어떤 노력과 공로에 우리 구원과 소망의 근거를 두지 않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우리 구원의 모든 근거와 소망을 두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것을 정확히 가르치십니다. “너희의 존재는 너희가 이제 인식한대로, 죽고 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너희는 너희가 나에게 제공한 어떤 선함에 근거를 둘 수 없고, 오직 내가 너희에게 주는 은혜에만 근거하여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이 구약의 광야 백성들에게 주시는 분명한 메시지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크게 선언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완전히 죗값을 다 치르셨다는 것을 알고 확신하게 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대부분을 하시고, 우리가 남은 일을 조금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게 아닙니다. 우리 본성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 안에서 구원의 근거를 얻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이 율법주의라는 신앙의 왜곡된 형태를 만들어냅니다. 성경이 선언하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은혜로 더할 것이 없이 완전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 화룡점정하시듯이 가르치십니다.

2.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상의 더럽힘
사람은 다 암 같은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서 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일상적인 감기에 걸려서 그것이 폐렴으로 가고 그렇게 죽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때 별 것 아닌 듯 싶고, 또 일상을 살아가노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여서 ‘뭐, 이런 걸 하나님은 중요하게 여기시는가’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우상숭배를 하거나 안식일을 범하거나 살인을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일상을 사는 동안 겪을 수 밖에 없는 문제인 죽음에 연결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배우자의 죽음, 때로는 자녀의 죽음도 겪습니다. 내가 먼저 가든지, 그가 먼저 가든지 죽음은 피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부정해지는 문제 중, 시체와 접촉함으로써 생기는 부정의 문제를 다룹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이 처해 있는 상황을 볼 때 이건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그들 주변에서 죽은 사람의 숫자만 만 오천 명이었습니다(16:49). 이미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출애굽 1세대(출애굽 당시 20살 이상이었던 성인들)가 다 광야에서 죽어야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으니, 얼른 계산해봐도 60만명이 40년 동안에 죽어야 하는 어마어마한 상황이 그들이 맞닥뜨린 현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시체로 부정해지는 상황에 대한 설명은 이러합니다. 먼저 사람은 시체에 접촉할 때 부정해집니다(11~13). 그러나 장막 안에 있는 상황이라면, 사람이 시체를 만지지 않고 함께 있기만 했어도 7일간 부정하게 됩니다(14). 장막 안에 뚜껑을 덮지 않은 그릇들도 물론 부정해집니다(15). 만일 실내가 아닌 들이라면 시체나 유골 혹은 무덤을 만질 경우에만 7일간 부정해집니다(16).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이런 조건 하에서라면, 이스라엘 백성은 결코 자신들의 의식적 정결함을 항상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늘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고 겪으며 살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다루는 문제는 일상에서 시체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부정함을 씻는 문제지만, 이것은 치명적으로 중요하고 위험한 문제라고 가르쳐줍니다. 만일 이런 부정함을 입고서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는 죽게 될 것이라고 13절과 20절에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13).”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20).”

3. 죽음이 왜 부정하게 하는가?
그렇다면 질문이 생깁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는 것이나, 한 장막 안에 시체와 함께 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부정함의 문제는 죽음과 접촉할 때 혹은 죽음과 관련해서 일어납니다. 이런 경우의 부정함은 사실 문둥병이나 유출병 보다 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죽음이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으며 여전히 모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사람들과 온 세상의 생명 있는 피조물들을 위협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1:25).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께 죽음은 정복할 마지막 원수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또 히브리서 2:14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물론 문둥병이나 유출병도 부정한 상태에 이르게 하는 질병들이고 이것들도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에는 미치지 못하는 데 본문은 죽음에 접촉하는 것을 최고로 부정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문둥병이나 유출병 혹은 시체로 부정하게 된 사람이 진 밖으로 내보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민 5:2~4; 12:14). 그런데 오늘 본문이 그들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런 부정함을 입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정결함을 입고 진 안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단지 구원을 받았는가 받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 만큼이나 중요하고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4. 부정함의 전염성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식상의 부정의 문제를 크게 다루시는 이유를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부정함이 지닌 전염성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부정이 씻김을 받아 정결함을 입지 못한 채, 공동체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가 접촉하게 되는 모든 것에 부정함이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22).” 부정한 것이 전염되는 힘은 거룩함 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형편이 이렇게 죄악이 급속하게 퍼져가는 상태가 되었음을 학개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학개 2:11~14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거룩한 제물은 그것을 싼 옷자락을 거룩하게 할 수는 있으나 그 옷자락이 또 다른 것을 거룩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레 6:27). 반면, 시체에 접촉하여 부정해진 사람은 또 다른 것들이나 사람들을 계속 부정하게 만들게 됩니다. 부정함이 가지는 점염성을 아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부정함의 문제를 크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5.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책
이제 우리는 이 심각한 일상의 부정에 대한 하나님의 치료책을 보아야겠습니다. 1~10절이 그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않은 붉은 암송아지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일반적으로 숫송아지를 제물로 드렸으나 여기서는 암송아지인데, 특별히 ‘붉은’ 암송아지를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씻는 피에 가장 가까운 색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물의 색을 지정하신 유일한 경우이고 이것은 문자 그대로 ‘붉은’ 색이라기 보다는 ‘갈색’을 의미했을 것입니다. 이 소는 제단에서 드려지는 일반적인 제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 암송아지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예표입니다.
아론이 아니라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이 그 송아지를 받아 진영 밖으로 끌고 가서 자기 눈 앞에서 잡게 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엘르아살의 등장은 이제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로 가는 길목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실제로 다음 장인 20장에서 우리는 아론의 죽음을 마주할 것입니다. 세대 교체는 민수기의 흐름과 메시지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건입니다.
엘르아살은 암소의 피를 손가락에 찍어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자기가 보는 앞에서 불사르게 하는데 특이한 점은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함께 불사르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넣어 함께 불사름으로써 재를 만들게 됩니다. 우슬초는 첫 유월절에 피를 바르는 용도로 제시된 식물이었고 레위기 14장에서는 회복된 문둥병자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에서 백향목, 홍색실과 함께 언급되었고(레 14:4,6,49,51~52), 나중에 다윗은 그 유명한 회개의 시에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시 51:7)”라고 기도합니다. 정결의식에 사용되는 우슬초를 통해서 자기의 문둥병 같은 환처를 고쳐주시고 온전케 해주십사 하는 간구입니다. 물론 홍색실은 암송아지의 붉음처럼 분명히 피를 가리킬 것입니다.
이때 엘르아살은 이 일로 저녁까지 부정함을 입게 되고(7) 송아지를 불사른 자도 그렇습니다(8). 그들은 옷을 빨고 몸을 씻은 후에 저녁에나 진영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가 타고 남은 재를 거두어 진영 밖의 한곳을 정하여 간직해야 합니다. 이 재는 부정을 씻는 물을 만들기 위해 잘 보관되어야 했습니다. 송아지의 재를 거둔 사람도 저녁까지 부정해서 옷을 빨고 몸을 씻은 뒤에 저녁에야 회중 가운데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 재를 어떻게 정결의식에 사용하게 되는지를 보겠습니다. 17절 이하에 설명이 나옵니다. 재는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아 정결한 자가 우슬초로 물을 찍어 장막과 모든 기구와 사람에게 뿌리는데,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두 차례 부정한 사람에게 뿌려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행하게 됩니다. 이때, 이 물을 뿌리는 사람은 이 일을 함으로써 저녁까지 부정해 집니다(19,21). 부정하게 된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A. 속죄제사가 있는데 정결의식이 필요했는가?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습니다. 이미 제사 의식이 주어졌는데, 정결의식이 더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제사는 사실상 고비용이었습니다. 만일 이런 의식상의 부정의 경우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와야 한다면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했던 백성들은 그 비용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정결하게 하는 물로 정결의식을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회복된 관계로 나아가는 은혜로 얻을 수 있었습니다.

B. 왜 단번에 행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행해야 하는가?
우리가 여기서 던질 수 있는 질문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은 십자가에 주님께서 달려 죽으심으로써 영단번의 속죄제사를 드리심으로 된 일인데,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정결의식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상에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의식이었습니다. 단번에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 정결의식이 충분히 드러내고 있습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정결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속제제사의 ‘영단번’적 성격이 아닙니다. 이런 성격으로 우리에게 오늘날 주어지는 것은 세례입니다. 누구도 세례를 반복해서 받지 않습니다. 세례는 일생에 한 번 성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내 죄의 용서를 받겠다고 또 세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세례는 단번에 우리 죗값을 지불하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충족하신 은혜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 날 저녁,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거절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 13:10).” 계속해서 발을 씻는 일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구절은 신학적으로 논난이 많은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사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본들이 ‘발 밖에’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 밖에’를 생략하고 읽게 되면, “이미 목욕한 자는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라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이 속죄를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반복될 수 없는 완성된 사역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씻음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경에 있는대로 읽게 되면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자는 온 몸이 깨끗합니다. 그것은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죄사함입니다. 그런데 발은 계속 씻어야 한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사도 요한은 나중에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요한일서를 썼습니다. 요한일서는 이미 믿는 자들을 향해서 쓴 서신입니다. 거기서 사도는 그들이 계속적인 죄의 고백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이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께 의존하여 하는 죄의 고백입니다(요일 2:1~2). 요한복음 13:10의 주님의 말씀은 이 요점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은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일입니다. 그것은 반복될 필요도 없고, 아무리 악한 자의 억만 죄악이라 할지라도 당신의 피로 덮으시는 속죄사역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에게 조금의 남은 죄도 허락지 않으시는 완전한 속죄의 사역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바로 이 완전한 사죄의 은총을 받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죄의 은혜를 받은 사람도 계속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 발에 묻히게 되는 온갖 더러움을 털어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죄 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오해 없이 잘 들으십시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다 한꺼번에 도말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우리의 일평생에 짓는 모든 죄악이 한꺼번에 다 씻음을 받았습니다. 온 몸이 깨끗합니다. 그런데 왜 발을 씻어야 합니까? 왜 계속적인 죄의 고백이 필요합니까? 그것은 죄의 용서와 관계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의 회복에 관한 것입니다. 죄를 계속 지으면서도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절대로 누릴 수 없습니다. 발을 씻으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백성에게 이와 같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날마다 부정에 더럽혀질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하나님과 사귐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베푸신 은혜의 방편이 바로 19장에서 말씀하신 정결의식입니다.

6. 오직 그리스도!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붉은 암송아지가 아닙니다. 암송아지의 재나 재를 풀어 넣은 정결하게 하는 물도 아닙니다. 우리가 보아야 하는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3~15).”

7. 교제의 회복으로 나아가는 길?부정한 자리에 머물지 말라!
우리는 더 이상 부정을 정결하게 하는 구약적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붉은 암송아지를 태워 재를 만들어서 흐르는 물에 풀어 뿌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정하게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일상 속에서 더럽혀지는 일, 범죄하는 일이 일어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암송아지의 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은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말씀대로 날마다 미쁘신 주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는 것,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과의 비뚤어진 관계를 회복하게 하시는 은혜의 수단입니다. 이것은 일년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정함을 입을 때마다 행하고 하나님과의 사귐의 은혜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이것은 쓰지만 달콤하고, 슬프지만 영적 희열로 가득한 길입니다.
이스라엘의 삶에서 제사가 끊이지 않았고 이 제사가 그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던 만큼이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본 이 정결의식은 그들의 일상적 삶에 깊이 자리한 의식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결의식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부정한 자리에 머물지 말라는 것입니다. 부정한 자리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자리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은 위험합니다. 20절을 보지요.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무서운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회복의 방편을 주셨습니다. 정결해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그리스도의 피로 제공하신 그 방법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거절하면서 부정함 가운데 살아간다면 그는 멸망할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돌아감으로써 자신이 그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한 셈입니다. 아들에게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돌아올 길을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는 활짝 열려진 그 은혜의 길을 향하여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복된 교제의 자리에서 영광을 누리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