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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6) - 위의 것을 찾으라

민수기 36:1-13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4-19

말씀내용
오늘 읽은 36장은 민수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런데 한 책의 결론으로는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민수기가 이렇게 마쳐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민수기의 결론인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27장과의 관계
본문은 민수기 27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27장에서 므낫세 지파에 속한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의 다섯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녀들이 나아온 이유는, 아버지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다섯 딸만 남기고 돌아가셨는데,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기업을 할당받을 때 자신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업을 받지 못한다면, 결국 아버지의 이름과 기업은 사라져 버릴테니 딸들인 자신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업을 얻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대 근동이나 히브리에는 여식들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유산을 상속하게 하셨고, 이것을 후대의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 사건이 민수기 27장에 기록된 이유가 있습니다. 26장에 기록된 두번째 인구조사는 민수기가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세대인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세대가 등장합니다. 이 세대를 소개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그녀들이 광야에서 죽은 부모 세대들과 달랐습니다. 부모 세대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의 기업 보다 자기들이 당장에 누릴 음식과 음료가 더 중요했고,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인 가나안 보다 자신들이 나왔던 애굽을 더 사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얻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2세대는 달랐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주실 유업에 눈을 고정했고 그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그 세대의 대표합니다. 그녀들은 탐욕때문에 자기들의 재산권을 주장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기업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얻기를 바라는 그녀들은 사실 자신들의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1~4)
오늘 본문에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온 것이 아니라, 그녀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말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업을 받게 된다고 했지만, 만일 그녀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을 하게 되면 그녀들이 받은 기업은 다 남편들이 속한 지파에게 귀속되고 결국 희년이 온다고 할지라도 므낫세 지파에게 속한 기업으로 찾을 수 없게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희년에 찾을 수 있는 것은, 매매를 통해서 팔려간 기업이지, 결혼이나 상속을 통해서 잃은 것은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합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두 원리가 서로 상충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기업은 본래 받은 그 지파에게로 귀속된다는 원칙이고, 둘째는 아들이 없이 딸만 있는 경우 딸들에게 기업이 상속된다는 원칙이었습니다. 이 두 원칙은 기업을 상속받은 딸들이 다른 지파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문제를 제기한 상황은 이미 므낫세 반 지파가 르우벤과 갓 지파와 함께 요단강 동편에서 기업을 받은 상태에서(32:39~42) 제기했다는 점에서 장래에 속한 일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불만이나 원망이라기 보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확신 속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태도는 민수기 27장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문제를 제기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허락하시는 기업을 소중히 여겼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지시(5~9)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5).”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들이 속한 므낫세 지파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그녀들이 상속받은 기업이 다른 지파에게 가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6~7). 여기서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라는 구절에서 ‘마음대로’라는 말은 ‘자기 눈에 좋은대로’라는 말인데, 이런 히브리 관용구는 ‘직관적이고 영적인 분별력’ 혹은 ‘평가하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긍정의 의미 뿐 아니라 부정의 의미를 다 가질 수 있습니다. 가령, 사사기 2:11과 21:25에서 그 용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삿 2:11).”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그러니까 ‘마음대로’라는 말은 그들의 분별력을 따라서 그들이 결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결국 순종은 영적 분별력과 깊이 연관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원리를, 딸로서 기업을 상속받은 경우에 대대로 지킬 하나의 원리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8). 일차적으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자 명령으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졌습니다(6).

슬로브핫의 딸들의 순종(10~13)
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슬로브핫의 딸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10절을 보지요.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그녀들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녀들이 어떻게 순종했습니까? 11절입니다.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들의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니라.” 슬로브핫의 딸 다섯 명이 예외 없이 숙부의 아들들 그러니까 사촌들과 결혼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사촌들과 결혼함으로써 설령 자식이 없이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 기업이 고인의 형제에게 귀속되므로(27:9) 그녀들이 받은 기업은 다른 지파로 흘러가지 않고 므낫세 지파 내에 영구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본문이 단순하게 설명하지만, 사실 슬로브핫의 딸들이 하나님의 기업을 최우선으로 여겼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으며 그래서 행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지키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행복의 조건이고, 이것은 그녀들의 순종을 통해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규례니라.” 민수기는 인구를 조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작하였고 이제 다시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로 마칩니다. 아마 여기서 언급하는 계명과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평지에 도착한 이후에 주어진 즉, 민수기 22:1 이후에 선포된 모든 율법을 가리킬 것입니다. 민수기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교훈과 적용
민수기의 마지막 말씀에서 우리가 얻는 교훈을 적용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업이 결혼 보다 우선이다.
먼저 기업이 결혼 보다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현대적 의미가 무엇일까요?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라고 했고 그녀들은 순종했습니다. 기업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구약의 기업은 오늘날 신자들에게 구원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께서는 심판날에 의인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 25:34).” 이것은 성도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성도들에게 기업이 결혼보다 우선한다는 말은 믿음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 결혼보다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벧후 1:1)”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다고 해도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보배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 4:7)”라고 고백했습니다. 믿음이 결혼보다 우선하고 모든 것에 우선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이 땅의 모든 가치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자기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을 했다는 말은, 성도가 주안에서 결혼해야 한다는 원리를 가르칩니다. 주안에서 결혼한다는 말은 결혼할 때 인종, 학벌, 물질, 출신지 등을 다 양보하더라도 신앙의 가치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종종 저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중대사 앞에서 신앙의 가치보다 다른 가치들을 우선시하는 것을 봅니다. 결혼이라는 중대사는 우리 신앙이 시험을 치르는 중요한 장입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에 우리 눈을 고정하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주는 시험장입니다. 기업은 결혼 보다 우선합니다.

광야에서 우리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얻는 교훈은 공동체의 중요성입니다. 사실 민수기는 두 세대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두번째 세대는 첫 세대와는 정말 다른 세대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첫 세대는 눈 앞의 먹을 것, 마실 것에 의해서 일희일비하고,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았으며, 하나님께서 주실 기업 보다 애굽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 보다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만족을 더 선호했습니다. 사실, 민수기는 의도적으로 불신앙과 불순종의 첫 세대와 믿음과 순종의 두번째 세대를 대조시켜 보여줍니다. 두번째 세대의 시작과 마침에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장의 손익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장차 얻을 기업을 바라본 여인들, 그 기업을 잃지 않으려고 기업을 결혼보다 우선시한 여인들의 이야기는 모든 세대 성도들이 따라야 할 믿음의 삶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 두번째 세대를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셨습니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이 말씀이 어느 시대를 가리키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두번째 세대와 함께 하셨던 때를 ‘신혼 때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면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이 세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믿음의 세대였습니다. 이런 최고의 믿음의 세대의 이야기로 민수기가 마무리되는 것은 가나안 입경을 눈 앞에 둔 광야 백성의 이야기를 마무리하기에는 더 없이 적절합니다. 슬프게도 이후 역사는, 이스라엘에 불신앙과 불순종의 세대가 이어졌고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이방 제국에게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는 슬픈 결말을 보여줍니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 거룩한 한 세대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통찰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세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죄인들이 어떻게 거룩한 세대를 이룰 수 있었는가? 물론 여러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본문에서 주목하는 한 가지 이유는, 이들에게 건강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절입니다. “요셉 자손의 종족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이 나아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수령 된 지휘관들 앞에 말하여.” 모세와 지도자들에게 나아와서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슈를 제기한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종족들의 수령들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분명히 믿음의 여인들이었지만, 이들에게는 또한 믿음의 공동체가 있었고 믿음의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그들을 대변해줄 수 있고 보호해줄 수 있는 공동체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공동체 안에 거할 때, 그들은 견고합니다. 웬만해서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민수기는 히브리어로 ‘광야에서’라는 제목을 가진 책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광야 같은 인생에서 우리를 거룩한 삶의 자리로 붙들어주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거룩한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의 삶에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십니까? 느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말씀에 정초한 든든한 교회로 세워가야 하는 것은, 교회야말로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호하는 울타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녀들의 세대가 우리 자신보다 더 거룩한 세대가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하는 것 외에, 말씀에 정초한 든든하고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세워 그들에게 물려주는 것입니다. “오, 주님! 이 일에 저희 남은 인생을 값지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위의 것을 찾으라(골 3:1)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 위의 것을 생각하고 사십시오. 위의 것을 찾으십시오. 땅의 것에 여러분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십시오. 그 소망이 여러분의 현재를 좌우하게 하십시오.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던 믿음과 순종의 삶을 보십시오.
우리의 희년이시고, 우리의 고엘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희년이고 고엘이 되셔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하여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소홀히 여겼던 것, 우리가 땅의 것에 몰두하느라 잃어버린 하늘의 기쁨을 그리스도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대속자가 되시기 때문이고, 그가 우리의 희년이시기 때문입니다.
광야를 살아가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에서 무엇을 바라고 살아가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바라겠습니까? 광야에서 씨뿌릴 땅을 많이 차지하겠습니까? 광야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거기에 우리의 모든 소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