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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강해 (55) - 도피성

민수기 35:9-34 / 김형익 목사 / 수요기도회설교 / 2017-03-29

말씀내용
55 도피성(민 35:9~34)
우리는 지난 주에 35장이 다루는 두 가지 주제 중 첫번째 내용(1~8절)을 상고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형제 지파들을 통해서 레위 사람에게 주시는 48개의 성읍과 목초지에 관한 규정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35장의 두 번째 주제를 상고할텐데, 그것은 도피성에 관한 규정입니다. 이것은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 은혜의 장치였습니다.

도피성의 결정(9~14)
먼저 본문은 9~14절에서 48개 레위인에게 주어진 성읍 가운데 6개의 도피성을 지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록합니다(13).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중심으로 요단 동쪽에 3개의 성읍을, 요단 서쪽에 3개의 성읍을 각각 지정하라고 하십니다(14). 이것은 요단 동편의 땅이 비록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 모두 2지파와 반이 살게 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강을 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요단 동편의 소수 지파들을 배려하신 은혜로운 조치입니다.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15)
두번째로 15절에서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합니다.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도피성은 단지 혈통적 이스라엘 백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 안에서 살아가는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사람 모두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마치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피성에 피할 수 없는 자(16~21)
하지만 이스라엘의 기업 안에 거주한다고 해서 모든 살인자가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6~21절에는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이 비교적 상세히 설명됩니다. 분명한 조건은 살인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는 ‘부지 중에 살인한 자’입니다(11). 살인 도구에 따라서 세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 철 연장을 가지고 사람을 죽인 경우(16), 둘째 사람을 죽일 만한 돌로 사람을 죽인 경우(17), 셋째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가지고 살인한 경우는(18) 도피성으로 피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사람을 죽일 의도를 가지고 살인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살인할 의도가 있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만일 미워하는 감정이 있어서 밀쳐 죽였거나 기회를 엿보아 죽였거나 혹은 악의를 가지고 손으로 쳐죽였다면, 이 경우들은 살인의 의도가 있었다고 판단되므로 도피성에 피할 자격이 없습니다(20~21).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는 오직 ‘부지 중에 살인한 자’입니다.

부지 중에 살인자(22~23)
부지 중에 살인한 자에 대한 경우를 22~23절에서 이어서 설명합니다. 악의나 해하려는 의도가 없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인 경우입니다.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 경우를 17절에서 언급했지만, 그 경우는 의도를 가진 경우이고 비록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사람이 죽었을지라도 우연히 된 일임이 입증되면 도피성에 피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 말은 모든 살인의 경우가 재판을 받아야 했고, 이것이 도피성에 피할 자격이 주어질지에 대한 판결을 필요로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은 판결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살인사건 판결에 대한 규례(24~34)
고대 사법체계는 일반적으로 경찰의 법 집행 이전에 피해자의 가족에게 피해자의 피를 복수할 일차적 책임과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실제로 아랍의 베두인족은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족이 피의 복수자가 되는 관습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복수할 자, 혹 보복하는 자가 ‘고엘’이라는 히브리 말인데 이 말은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잃어버린 기업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기업 무를 자’와 같은 말입니다. 욥이 고통 속에서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욥 19:25)”라고 부르짖었을 때, 대속자가 바로 고엘입니다. 이 고엘이 또한 친척의 죽음에 대해서도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우리의 대속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기업을 대신 얻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원수에 대한 심판도 행하시는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모든 살인은 그것이 고의이든, 우연이든 모두 살인으로 간주되어 복수의 법 아래 놓였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도피성은 살인의 의도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된 사람을 보호하는 매우 절실하고 은혜로운 장치였습니다.
도피성이 은혜로 주어진 장치였지만, 위의 설명과 같이 모든 살인자에게 허용되는 장치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살인 사건의 경우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경우인지에 대한 판단이 요구되었습니다.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 장로들의 판결과 허락을 받아야 도피성에 머물 수 있었습니다. “이 성읍들 중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 어귀에 서서 그 성읍의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건을 말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성읍에 받아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게 하고(수 20:4).” 이 절차를 통과하여 도피성에 머물게 된 사람은 피의 복수를 위한 보복자가 쫓아온다고 할지라도, 도피성의 장로들과 백성들에 의해서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수 20:5).
그러나 만일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자격에 합당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피성의 장로들은 살인한 도피자를 도주 전에 있던 자리로 돌려보내 보복자의 손에 넘겨 피의 응징을 받게 해야 했습니다(신 19:12). 아마 이 재판에서는 필요에 따라 피해자의 가족들의 증언을 청취하는 일도 있었을 것입니다.
판결 결과, 도피성에 피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면, 회중은 그를 도피성에서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피성에 피하던 당시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는 도피성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만일 그 전에 도피성 밖으로 나왔다가 피해자의 가족에게 피의 보복을 당하여 죽는다면 이것은 정당한 복수로 간주되었습니다(25~27).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 사는 것은 중요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라야 자기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었고, 피의 복수로부터도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피의 복수에 대한 일차적인 권리와 책임이 피해자의 가족이나 친척인 고엘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고대 이스라엘에 사법체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30절부터는 그 사법체계에 관한 몇 가지 교훈입니다. 살인자의 경우에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하려고 하면, 한 사람만의 증인으로는 부족했습니다(30). 살인사건에 대한 사형 언도를 내리기 위해서는 다수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사가 걸려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부지 중에 살인한 자’를 제외하면 살인한 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했습니다(31). 살인자는 속전(몸값)을 받고 풀어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도피성으로 피한 ‘부지 중에 살인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속전을 내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32). 그 이유는 땅이 피로 더럽혀져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33~34). 구약의 개념에서 어떻게 땅을 더럽힙니까? 피흘리는 것이 땅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살인이었던 가인의 아벨 살해 사건이 땅을 더럽힌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4:10). 또 주님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마 23: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벨의 때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죽였던 의인들의 피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땅에서는 억울한 피가 흘려지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피가 흘려져서 땅을 더럽히게 되었다면 피 흘리게 한 자의 피로써만 속함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33).

교훈과 적용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도성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록 부지 중에 살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그것을 살인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이 ‘살인’에 사용하는 모든 단어는 의도를 가졌든 부지 중의 살인이든, 모두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 그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불법적이고 부적절한 죽임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은, 살인이 실수이건 의도적인 것이건 생명을 거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똑같이 악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살인은 그 댓가를 응당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가지지 않은 실수로 일어난 살인에 대해서는 피할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도피성입니다. 우리는 “아, 이건 실수였으니까 괜찮아”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성경은 “그것은 살인이다. 그리고 살인은 응분의 댓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응분의 댓가는 “그 살인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16)”라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도피성은 은혜의 도성입니다. 부지 중에 사람을 죽인 사람이 당연히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살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일어날 수 있는 부지 중의 살인에 연루된 사람에게 생명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도피성을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제공하시는 의도가 12절에 나옵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11~12).” 도피성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을 향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피할 길, 곧 은혜의 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서 기자가 성도를 도피성으로 피하여 가는 사람으로 묘사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히 6:17~18).” 이스라엘 백성의 기업 안에 주어진 여섯 개의 도피성의 존재는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보여줍니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였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도피성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배려하심에 놀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명기 19:3,6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지정하는 원리로, 모든 지역에서 다가갈 수 있도록 가까와야 하고, 심지어 그 도피성에 이르는 길을 닦아두어서 속히 피할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은혜의 도성은 모든 백성들이 필요로 할 때 결코 도달할 수 없이 먼 곳이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도달한 도피성의 문이 닫혀있을리가 없습니다. 도피성의 문은 언제나 일단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했습니다. 이 도피성을 제외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부지 중에 살인한 자는 피하여 살 길이 주어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도피성에 들어와 살 것이 허락되면, 그가 비록 레위인이 아닌 외인일지라도 그곳에 있는 동안의 모든 필요가 채워졌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하시듯이 도피성은 은혜의 도성이었습니다.

대제사장과 살인자
우리가 이 은혜의 도성에서 흥미롭게 주목할 대목이 있습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 도피성에 머물러 자기의 보복자로부터 숨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는 더 이상 도피성에 숨지 않아도 됩니다. 도피성에 피한대제사장이 죽는 것을 오늘날의 법적 용어로 표현하면, 공소시효가 끝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부지 중에 살인을 저지르고 도피성으로 피했을 때의 대제사장이 죽은 이상 그는 도피성에 더 이상 숨어살지 않아도 되었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함께 안심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25, 28, 32절이 그것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부지 중에 살인한 사람과 대제사장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왜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만 도피성에 숨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 살인자가 도피성에 숨어서 사는 기간은 피해자의 가족들이 분을 삭이고 하나님의 뜻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겠지만, 살인자와 그 가족들에게도 실수이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한 가족에게 미친 고통을 느끼는 근신의 시간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닙니다. 대제사장과 이 살인자의 상관관계가 어떻게 되길래, 그가 도피성에 숨는 것이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만인가? 아마도 대제사장의 죽음의 시점에서 사면이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대제사장 자신이 희생제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살인자의 죄책은(비록 부지 중의 살인이었다고 할지라도 이것도 살인이었기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전가되었고 대제사장의 죽음이 살인자의 죄를 대속하는 죽음으로 간주됨으로써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자신의 죄가 속해졌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점에서 대제사장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예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단번의 죽음으로 우리를 영원히 모든 죄로부터 영원히 속량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우리를 변호하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제사장은 영원히 죽지 않으시고 우리를 영원히 보호하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가 이 은혜의 수혜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때, 피의 복수자가 우리를 청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피난처, 에수 그리스도
구약의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그 땅에 사는 모든 자가 도피성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라고 부르시는 사람은 어느 민족, 누구에게 한정되지 않았습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죄를 지은 자가 빠르게 피해야 하는 곳이었다면, 참 도피성이 되신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에서 우리에게로 내려오셨고 찾아오셨습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오직 부지중에 살인한 자들만이 피할 수 있었지만,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이신 주님은 모든 죄인을 받아주십니다. 우리는 범죄할 때마다 도피성으로 나아가 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죄인들을 이 도피성, “그리스도께 피하여 숨으로”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세상에 모든 죽어가는 죄인들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점에서 교회는 그리스도께로 피하는 모든 죄인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접근이 용이해야 하고, 그 길에 회개 외의 장애물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범죄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그리스도께 와서 피하라고 외쳐야 합니다.